우윤진_기생의 미학: 전투를 떠난, 내부로부터의 파열

2015.10.19 발행

기생의 미학: 전투를 떠난, 내부로부터의 파열

숙주에 대한 일방적 약탈으로서의 좁은 의미를 넘어서, 기생(寄生)을 파열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모종의 관계맺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르게 묻자면, 어떻게 잘 단련된 기생의 기술(技術)은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자면, 우선 미학과 정치학은 상호연관된 것으로서, 또는 서로가 서로를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미적 형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해석될 수 없으며, 미적 형식이 일어나고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가 정치적인 것을 함의하고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학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단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

그렇다면 기생의 미학-정치학이란 무엇인가? 기생은 가장 익숙한 것 내부로부터 뚫고 나오는 가장 생경한 것, 가장 포괄적인 회유를 끈질기게 비집고 나오는 이질성이다. 자신이 속한 구조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직시하고, 그 내부로부터 그 것의 존재 목적과 양식을 전복하려는 행위. 내가 아닌 것으로 인해 내가 있음을 지각하면서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는 불화를 간직하고 다름을 벼리는 태도. 나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것을 배반하는 일.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 길러내는 일 또한 ‘기생’의 관계 맺음이다. 그러러면 일단은 멈추고, 살피고, 배회하고, 기다리고, 의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일은 그다지 거창할 필요는 없으나, 어떤 이에게는 삶의 대부분이 걸린 일일 수도 있다. 일상적인 행위일 수도 있고, 정신나간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억압하는 것이 내 안에서도 작동함을 깨달을 때, 내가 짐짓 ‘나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구성함을 깨달을 때에, 이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일상의 행위, 태도, 삶의 양식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미셸 드 셔토(Michel de Certeau)는 전략'(strategy)과 ‘전술'(tactics)의 개념을 비교했다. 둘 모두 병법에서 들여온 말로서 셔토 자신도 군사적 비유를 써서 이 둘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 중 전략은 고정되고 ‘적합한’ 장소가 정해져 있는 지휘 및 전투법을 말하고, 전술은 가변적이고 정해진 장소가 없는 지휘 및 전투법을 일컫는다.[1] 전략은 확고한 진지를 구축할 만한 자원과 힘을 갖춘 대규모 군사부대가 쓸 수 있는 대국적인 병법이라면, 전술은 소규모 전투대가 이리저리 숨어 움직이고 상대의 틈을 노리며 행하는 ‘게릴라’ 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셔토는 전략이 ‘공간을 소유함으로써 시간을 정복하는’ 방식이라고 말하면서, 이와 반대로 전술은 일정한 공간을 소유할 수 없는 이들이 시간을 통해 다른 이의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2]

이런 병법이 일상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저항의 ‘전투’ 속으로 들어올 때, 억압받는 소수는 부족한 자원과 힘의 규모를 상쇄할 수 있는 ‘전술’을 택하게 된다. 물론, 이 때의 ‘소수’는 단순히 수의 개념에서 작은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관계내의 약자를 말한다. 셔토는 전술을 기생의 관점에서 서술한 적은 없으나, 그에 적용될 수 있을만한 ‘위장’과 ‘잠입’의 언어로 전술을 묘사했다. 마치 물고기가 환경에 맞게 위장을 하고 곤충이 조용히 숨어 먹이를 기다려왔듯이, 전술은 사람의 역사나 전쟁 이전에도 이미 광범위하고 오래 수행되어온 생존의 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셔토의 전술에 대한 관점의 유용성은, 많이 배우고 자원있는 (인간)존재만이 저항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이미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지식인이 아니어도,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미 살아가는 양식 그 자체에서 지배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민 통치 하의 국민들이 제국이 강요한 ‘우월한’ 문화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내면서도, 그 가운데 제국이 알지 못하는 토착적인 방식으로 그 강요된 문화는 이미 변한다는 것이다.[3] 그렇게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일상의 주체들을 통해, 강요된 세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세계가 되어간다.

그런데, 만약에 억압이 점점 모호하고 친절하고 광범위해진다면 어떨까? 권력이 도처에 넓고 넓게 퍼져서 위장해서 잠입할 대상도, 숨어서 공격할 대상도, 점유해서 바꾸어나갈 대상도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면, 전술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억압의 저항내에서도 억압이 일어난다면, 또는 강자가 약자의 언어를 거꾸로 전용하게 된다면, 그래서 억압, 지배, 저항, 쟁취, 탈환의 주체도 대상도 서로 겹치고 흐려진다면, ‘병법’은 여전히 도움이 될까 아니면 단지 폭력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될까?

여기서 우리는 기존에 상정되어온 ‘숙주’의 작동방식을 다시 고찰해야 할지 모른다.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처럼 권력과 그에 따른 저항은 어느 관계에서나 생겨날 수 있으며, 권력은 지배-복종의 이분법보다 훨씬 유연하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4]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더 이상 직접적인 탄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넓게 구석구석 퍼진 자본의 힘은 저항을 적극적으로 처벌하는 것보다는, 순응하는 자를 인정해주고 길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저항적인 것은 곧 ‘비생산적’이게 되며, 순응적인 것은 지극히 (소비적인, 그러므로) ‘생산적’인 태도이자 활동이 된다. 억압이 이렇게 순응적 주체를 친절하게 도와주고 길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지금, 전술의 병법은 아직도 유효한가? 싸움의 방법으로서 차이가 있다해도, 전술과 전략은 모두 마찬가지로 대상과 나, 적과 아군, 선과 악을 가르고, 그럼으로써 승과 패를 결정짓는 전쟁의 기술 아닌가?

최근 삼십년 간의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나타나온 사회참여형미술 (socially engaged art)은 ‘정치적 미술’이라 불리는 계보의 끝자락에 있다. 그 중 현재 가장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중 한명인 나토 탐슨(Nato Thompson)은 자본이 오히려 전술적으로 우리를 포섭하는 지금, 사회참여형 (또는 ‘정치적’) 미술에게 필요한 것은 전략이라고 역설한다.[5] 자본은 이제 ‘게릴라 마케팅,’ ‘바이럴 (viral) 마케팅’ 따위의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숨어서,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기회를 노리며, 호시탐탐 우리를 깜짝 놀래켜 주려고 기다린다.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까지 우리는 소비할 수 있게 됐으며, 그럼으로써 어디서나 ‘생산적’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자본의 흐름을 쫓아 금세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여러 관계들 가운데, 정치적 미술이 해야할 일은 차라리 장기적으로 자리를 잡고 깊게 뿌리를 내림으로써 좀더 지속성있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드러나는 셔토(de Certeau)식 전술의 맹점은, 그것이 억압의 주체와 대상을 분명하게 가를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인식하거나 의도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일상적 삶의 형식을 통해 저절로 저항이 일어나려면, 그 저항의 주체는 억압의 주체와 극명히 다른 형식의 삶과 문화를 지녀야한다. 지배적 문화와 구별되는 이질적 문화가 생성하는, 포섭의 그물망 내에서 반짝이는 타자성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문화 또는 사회계급을 넘어 자본중심적 삶의 양식이 유례없이 보편화된 지금, 셔토의 전술은 신자유주의 이념의 근본이 되는 ‘개인적 자유’와 결합해, ‘소비자가 구매한 상품을 소비하는 그 각자의 개성적 방식만으로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완성된다’고 보는 편리한 논리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소비’는 자본가가 대규모로 생산품을 만드는 방식을 통해 정해놓은 지배적인 질서를 바꾸어놓는 다른 방식의 ‘생산’이 된다.[6] 이렇게 다양한 소비만으로도 체제가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우리가 그저 우리를 도처에서 기다리는 소비적 생산의 기회에 반응함으로써 ‘저항적’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가장 순응적인 것으로도 이미 충분히 저항적이라고 말한다면, 저항은 이미 필요없게 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내부로부터의 파열을 향하는 기생적 미학-정치학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미학-정치학은 외부에 어떤 분명한 억압의 주체가 있다고 상정하기보다는, 그 억압을 가능케 하는 힘의 관계가 자신 내부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일상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힘의 관계를 깨닫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미술계’ 또는 자신의 작업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구조가 그것이 비판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의 일부임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형식이건 간에, 지금의 정치적 미술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 스스로가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외부의 구조적 문제와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파열일지 모른다. 온몸으로 숙주와 맞닿아 있으나 그로부터의 이탈을 감수할 수 있는, 자신의 몸 속에 자리잡은 숙주의 파편을 읽어내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기생자(寄生者)로서.


 

[1]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Oaklan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 37.
[2] Ibid.
[3] Ibid. p. 31-2.
[4]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Volume 1.New York: Vintage-Random House, 1990, p. 94-5.
[5] Nato Thompson, Living as Form: Socially Engaged Art from 1991-2011, ed. Nato Thompson, Cambridge, MA: MIT Press, 2012, p. 32.
[6] de Certeau, p.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