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섭_광주비엔날레, 예술의 정치화가 문제인가? 정치의 예술화가 문제인가?

2015.04.11 발행

안녕하세요 한재섭입니다.
예..음.생략..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무언가 거창해보이지만 2014년 개인적으로 써놓았던 3편의 글을 포괄하는 문장을 찾다보니 저렇게 되었습니다.
벤야민의 유명한 언설, “정치의 예술화가 아니라 예술의 정치화를 이룩하자”를 가져온 것입니다.
앞서 게재한 홍태림 선생의 글과 비슷한 맥락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가 오갈수 있지 않을까 싶어 노크해 본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신 홍태림 선생과 크리틱칼에 감사드립니다.

제 글은
작년 <광주비엔날레 20년후, 달콤한 이슬>전 홍성담의 세월오월 걸개그림 사태가 터지고 광주비엔날레 20년전 안티광주비엔날레와 같은 움직임들을 통해 대규모 국책사업(지원제도)에  아무런 당파성도 없이 후달리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고자 쓴 글 2편과 2014년 상상마당 <반사적 바깥>전시에 나온 오석근 김수환 작가의 작품, <콜트콜텍>전에 참여한 상덕작가의 작품을 통해 거리의 급진적인 구호와 예술의 전위적인 형식이 어떤 방법으로 조우할 수 있는지를 고민(만)하며 쓴 글입니다.,
지금 보니 둘의 분리는 세계의 총체적 파국앞에서
가장 먼저 호흡곤란을 일으킨 예술가들-당파성이나 아비투스를 떠나- 이 보여준 증환(sinthome)같은 것은 아닐런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쓰니 저도 제 글이 뭔가 대단해 보이는데요….그렇진 않구요…그냥 글입니다.

그럼

광주비엔날레, 20년 전
2014/08/11

예를 들면 이런 식일 것이다.

국내 최초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도시를 광주로 선정한 이유는 명백히 정치적 의도에서였다. 삼당야합으로 탄생한 김영삼의 전라도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국제비엔날레라는 대규모행사로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정치적 부담은 자신이 국회의원 시절 단식으로 세상에 호소했던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에 이제 그만 눈을 감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사업이 광주비엔날레였고 이를 위해 국가는 1995년을 아예 미술의 해(이를 기념하는 웃지 못할 김홍도 조각상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뜰에 설치되기도 하였다)로 지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1995년 전국의 학생들과 노인들을 동원해 160만명이라는, 세계 비엔날레 역사상 전무후무한 관람객 입장기록을 세운 광주비엔날레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에서 이제 십여년을 넘긴 광주가, 군부 파쇼 정권에서 벗어난지(?) 채 5년도 안된 한국에서 비엔날레가 주는 미학적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어려운 현대미술, 그들만의 리그라는 미술의 신화적 가치만 확대재생산 되었을 뿐. 관람객은 국가의 182억짜리 대규모 관제행사에 머리수를 늘리는 여전한 들러리들뿐이었다. 문화사적으로도 광주비엔날레 개최 얼마전인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자비와 권력으로 진행된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이 갖는 90년대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여는 듯한 상징적 제스추어보다도 그 내적 파장은 깊지 않았다.(1995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및 광주비엔날레 산파역활까지) 그래도 광주비엔날레의 문화사적 의미를 찾아야 된다면 그것은 국가의 정책이 자신의 입맛대로 언제나 문화예술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고, 그리고 문화예술계도 이념에 관계없이 언제나 국가정책에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차렷자세를 ‘열린 마음’으로 취하기 시작한 최초의 중요한 사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995년 광주의 민중미술 단체인 광미공(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은 광주비엔날레의 다분한 정치적 의도와 준비기간의 졸속성, 진행과정에서 시민참여 배제, 그에 따른 광주정신의 미학적 구현의 진정성 훼손, 비전문가 집단인 행정관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추진되는 점(당시 시장은 강운태)을 들어 광주비엔날레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하였고, 이러한 문제점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엔날레 기간동안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 란 형식으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표출하였다.

오월 망월동으로 가는 4km의 길목양편에 1,200개의 만장을 설치하고 망월동 묘역에서(요샛말로 하면 구묘역) 진행된 본 전시는 개막 보름만에 20만명이 넘는 관람객(동아일보, 1995.10.11.자)이 다녀갈 정도로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 이상의 파급효과를 발휘하였다. 또한 전시기간 모금한 자발적인 성금액도 4,0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전시를 발의하고 실행시킨 것은 광미공이었지만 이는 전국단위의 민예총과 재야 인사들이 ‘통일미술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실재 전시도 광주만이 아니라 전국의 민중미술단체들과 광주정신에 동의하는 작가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김영삼이 표도 안주는 광주에다 182억이란 돈을 들이면서까지 눈감고자 하였던 광주민중항쟁 특별법 제정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1995년 7월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촉발된 518 특별법 제정 촉구 시위는 전국을 뒤덮었고, 이는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가 비엔날레 반대의 가장 큰 명분으로 주창했던 광주정신의 계승이라는 문제의식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주정신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게)전국적인 문제였고, 1990년대 역사청산과 민주화투쟁의 절차적 안착화를 위한 중요한 잣대였다. 이를 국제비엔날레로 호도하려했던 김영삼 정권은 (안타깝게도?)역풍을 맞았고, 의도치 않게 그를 역사청산의 주역(?)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5년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의 성공은 1997년에는 광주비엔날레의 제도권으로 흡수된다.(아쉽다는 표현을 썼지만, 만약에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이라고 가정했을 때 선뜻 판단을 내리기 힘든 부분이다.) 2회 <통일미술제>는 ‘안티비엔날레’란 제목을 빼고 광주비엔날레 개최 15일전 프레 비엔날레 형식으로 망월동에서 개최하고, 사업비의 50%를 비엔날레 재단에 정식 요구하여 1억 3천만원의 지원을 받아낸다 내걸었고, 추진위원회 역시 1회와 달리 재야인사 외에도 유관단체들의 기관장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3회 역시 통일미술제를 추진하였으나 광미공 내부 이견차이와 1998년 당시 비엔날레 최민 감독 해임 파문 등 변화된 상황으로 인해 개최하지 않았다.

‘안티비엔날레’로 광주정신의 미술적 승화와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광미공의 작가들은 비엔날레측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비엔날레에 협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여전히 광주라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비엔날레의 재정 지원은 1회때의 결집된 미술운동의 소명의식, 이념적 치열성 등에 대한 작가들의 잦은 이견과 충돌을 낳게 되었고, 이는 미술운동의 패러다임을 변화해야 된다는 논리로까지 이어지며 광미공의 해체를 가져온다(2002년 공식해단). 대신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정신을 계승(물론 1회 본전시에도 <광주5월 정신전>은 구성되어 있었다.)하는데 정통성을 얻게 되었고, 광주비엔날레의 외연은 확장되어 갔고, 결과적으로 2002년 노무현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의 논리적 타당성까지 이어진다.

20년 전 광주비엔날레를 둘러싼 광미공의 대응과 변화과정은 엊그제 벌어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기념전시 사태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틀거리를 제공해준다. 그 중에서도 광주비엔날레의 불순한 정치적의도와 허구성을 비판하고, 518특별법 제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힙입은 ‘안티비엔날레’의 성공은 지금 단계 미술운동(흐름)에 적절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된다. 또한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된 1995년 1월 5일 개정되고, 그해 7월 13일부터 시행된 문화예술진흥법의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품 설치의 의무사항으로 이한 공공조각 붐처럼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과 지원의 일상화라 여겨질 정도의 지금. 더 이상 반성적 모색과 자율적 돌파구를 찾지 않고선 예술의 존재증명방식이 지원에 기댄 결과의 효율성(그래서 증명불가능한 허구성일 수밖에 없는) 말고는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는 시점에서 20년전 광주비엔날레는 더욱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다, 지원은 받되 할 말은 하겠다(할 수 있다) 라는 90년대 이후 모든 문화(지원)정책 수혜자들이 최선의 이데아로 여겼던 저 이념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과연 지금도 가능한 것인지를 검토해 볼 시의적절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것은 예술은 쓸데 있는 것인지, 쓸 데 없는 것인지의 해묵은 논쟁을 수반할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 광미공 관련 부분은 신창운의 전남대 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2006)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속?)광주비엔날레 20년전
2014/08/12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광주 시각매체연구소 회원이었던 전정호, 이상호(조선대 회화과 재학)가 민미협(민족미술인협의회, 1985년 창립) 주최 제 2회 통일전(민중해방 민족통일 큰그림 잔치)에 출품한 <백두산 산자락 아래 동터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걸개그림이 제주도 순회전시 중 제주도 대공과에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두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구속되었고, 작품은 탈취당한후에 소각페기되었다.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미술작품에 적용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됨과 동시에 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이라는 고양된 사회변혁운동과정에서 불붙은 한국사회에 대한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문화예술계로 전이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논쟁은 미술창작방법론부터 미술운동의 노선문제, 공교롭게 그 해 치러진 대선과정에서 미술운동그룹간의 제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민미협을 이탈하는 그룹들이 생겨나며 민중미술운동이 조직적 분화에 이르는 계기를 제공한다.

당시의 논쟁은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태를 예고한 당시 문공부 장관의 경주 발언(민중미술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으로 촉발된 조선일보에서 김복영, 정중헌과 유홍준, 원동석의 지상 논쟁 이후 민미협 내부에서 벌어진 최초의 논쟁이었다. 그림이냐 아니냐는 말초적인 논쟁부터 서구 모더니즘의 허구성과 북한 조선화풍의 단순이식이냐는 문제, 그에 따라 집단창작이냐 개인창작이냐, 전통의 계승에서도 전투적 신명이냐 공동체적 신명이냐의 문제, 리얼리즘의 계급 당파성까지 논쟁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논쟁의 큰 골자는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서울의 전시장 중심의 미술운동과 광주의 현장중심의 미술운동, 그리고 70년대 지사적 운동의 선배세대와 80년대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후배세대들간의 논쟁으로 볼 수 있다.

1979년 같은 해 창립된 서울의 현실과 발언이 문예회관(현 아르코 미술관)과 동산방 화랑에서의 촛불전시로 추진한(할 수 밖에 없었던) 창립전, 1980년 광주를 체험한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이 씻김굿 형식을 빌어 나주 드들강변에서 진행한 창립전은 이후의 행보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리고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과 1995년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까지 민중미술운동의 두 가지 큰 축은 마지막까지 서로 다른 물적조건을 보이며 민중미술운동은 일단락된다.(<민중미술 15년전>을 대개 민중미술운동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980년대 현장미술의 정서와 방법론이 전시장밖에서 조직적으로 표출된 <안티비엔날레 통일미술제>까지를 이 논의에 포함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2010년 한재섭 명지대 석사학위논문 참조)

민미협을 이탈한 작가들은 홍성담과 최열을 중심으로 1988년 광주(시각매체연구소), 부산(미술운동연구소), 대구(민중문화운동연합 미술분과) 등 미술그룹들과 대학내 미술패들을 규합하여 민미련(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준위를 세우며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제작에 착수한다. 200여명의 참여작가와 3개월의 제작기간동안 집단창작으로 이루어진 <민해운사>는 1989년 4월 서울대에서 공개되고 그 해 광주 518 거리전을 거쳐 한양대에서 전시중 경찰에 의해 압수 파기되었다. 당시 홍성담은 <민해운사> 작품 슬라이드를 1989년 평양세계청년축전 행사참가를 위해 북한으로 보냈고(북한작가들이 복제본을 제작하여 순회전시 하였음), 이 사건으로 민미련 작가들은 구속 수배되었고 홍성담은 다른 수감자들이 풀려난 후에도 한참 동안 석방되지 못하였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문제가 된 <세월오월>은 홍성담과 시각매체연구소 회원이었던 전정호, 이상호, 박광수, 홍성민, 백은일 등과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과 파견미술팀의 전진경 이윤엽 등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시민들과 함께 작품구상(강좌, 토론)부터 제작(주필, 보필)까지 공동으로 참여해 그린 그림이었다. <세월오월>의 전시참여가 불허되면서 이윤엽, 홍성민, 정영창은 작품 검열에 대한 항의로 작품을 철수 하였고, 특별전의 총괄큐레이터 윤범모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 상황이다.

어떻게 광주에서, 그것도 광주민중항쟁을 이번 전시주제로 내세운 광주비엔날레와 특별전에서 작품을 검열하는 일이 발생하였는가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있다.(그것도 오월시민군 출신이라는 윤장현 시장체체에서)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풍자도 용인하지 못하는 현 정부(광주시)의 권위주의와 물로 쓰여진 슬로건처럼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비엔날레재단의 무능력에 분개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공히 공감하는 상황이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87년 민미협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만큼의 토론과 이야기들이 오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충분히 그럴만한 여지도 있다. 공교롭게도 현발 창립멤버인 윤범모와 광자협(과 시매연)을 조직한 홍성담이 1994년 <민중미술 15년전>에서 조우한 적은 있지만 그 둘의 입장차이는 아직도 유효한 문제일거라 생각한다.

또한 80년대 거리와 공장의 집회현장에서 평택 대추리와 용산,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강정마을과 근자의 세월호까지 이어지는 파견미술의 흐름과 대안공간, 레지던시 공간, 지자체(?)의 공공미술 등으로 이어지는 제도권 내의(제도권내?, 이제 권력으로까지 상승하였지만) 대안적인 흐름들이 상호 교집합되고 합수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직까지는 정치와 예술, 검열과 저항이라는 85년 조선일보에서 벌어진 민중미술을 둘러싼 논쟁 이상으로 번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이다. 공부와 실천이 부족한 나에게도 토론의 주제는 급박해 보이고, 실천의 동력은 어딘지 빛이 바래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형국 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이 최초로 문제제기한,
“광주시의 보조금을 받는 광주비엔날레에서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는 발언처럼,
지금 우리 문화예술계가 처한 난맥상을 대놓고 폭로하는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난 여기서부터 다시 논쟁이 시작되길 바라고, 이 발언때문에라도 지금의 논쟁이 1980년대의 논쟁과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원을 받는 작가에게 책임의 문제란, 기획자로써 매개자로써 큐레이터의 역할과 권한은, 관료화를 넘어 고착화 되어버린 지원정책을 바꾸어낼 수 있는 담론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거리의 급진적인 구호와 예술의 전위적인 형식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 2014년 <반사적 바깥>(상상마당)전에 참여한 오석근, 김수환 작품에 대한 메모

2014/11/04

화답(和答)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모를 것이다.
나도 그들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본 내가 화답을 하고 싶다는 것이 맞을게다.

 근자에 본 이미지 중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이미지가 있다. 2012년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텍전>에 나온 상덕 작가의 <코끼리>이다. 그는 회사가 버린 공장을 해고노동자들과 점거하고 공장에서 버려진 재료들을 모아 <코끼리>란 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몸집이 크지만 가장 민주적인 동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도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동물인 코끼리는 그대로 이 땅의 노동자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실재 작품을 본 것이 아니므로 이미지와 이미지 주변의 텍스트(작가 인터뷰, 평문, 작품 소개 등)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나만의 상상의 이미지, 상상의 해석일지도 모른다.

2012년 부평에서 지척에 있던 나는 전시를 보지 않았다. 그 해 7월, 2000년에 사라진 <공장미술제>가 <콜트콜텍전>과 같은 시기에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실험정신을 발굴하겠다는 취지로 충남 장항에서 다시 열렸다. 다음달에는 조선일보가 주관한 청년작가들을 위한 <아시아프2012>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두 개의 전시와 <아시아프>는 청년작가(?)들에게 어떤 역학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두 개의 전시가 시작되는 주말에는 보령 대천해수욕장에서 머드 축제가 열렸다. 나는 머드 축제에 가서 진흙을 바른 싱싱한 육신들을 먼 발치에서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 주에 나는 생매장당한 안티고네를 생각하며 말도 안되는 노동으로 우리를 몰아치는 서해바다를 보며 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즈음 운영위원으로 모신 M선생님은 빈 공장이 많다고 인천에서 공장미술제를 하는 것이 무슨 문화적 의미가 있냐며 <콜트콜텍전> 이야기를 꺼내셨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공감은 하나 올드하다고 느끼는 분위기였다. 나도 속으론 그를 지지했지만 한편으론 요새 같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란 말이 차고 넘치는 이때, 공장말고 더 유니크하고 더 아우라가 쎈 장소는 어딜까 하고 한참 셈을 해보기도 했다. 시각을 다루는 자들, 그들과 관계된 자들의 거스를 수 없는 탐욕이 나에게도 내장되어 있음을 인지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는 상덕의 <코끼리>도 <공장미술제>도 보러 가지 않았다.

오석근 김수환의 <기계-프로토타입1, 2>은 홍대앞 상상마당의 전시 <반사적 바깥>에 나온 작품이다. 2층에 올라가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바다속의 문어-크라켄일지도-를 떠올렸다. 사방으로 풀어헤쳐진 문어발같은 환기구. 작품의 내부에 무거운 내 몸을 구겨 넣고 들어갔을 때에는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가 떠올랐다. 거기 하수구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전자음은 메두사-기계-의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육지로 올라온 문어대가리, 잘려진 메두사의 머리,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 거울, 불길하게 들려오는 기계의 소리.

그리고 <기계1>를 이동하며 감시할 수 있는 <기계-프로토타입2>의 거울렌즈. 페르세우스의 거울방패처럼-샤먼이나 신들의 청동거울이 이제는 렌즈라는 은유이거나- 기계를 감시하는 렌즈에는 거울이 장착되어 있다. 단, 거울은 <기계1>을 비추는 게 아닌 기계를 감시하려는 자의 얼굴을 비춘다. <기계1>을 비추려면 렌즈를 볼 수 없고, 렌즈를 보려면 셀카를 찍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과 대면해야 한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만 작은 렌즈의 구멍에 눈을 갖다 댈 수 있다. 그래서 메두사의 머리통을 힘들게 헤집고 들어간 <기계1> 내부의 황금거울에 비친 수천개로 분열된 자신을 볼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온다.

상덕은 파견미술가(팀?)들과 함께 작업활동을 해오고 있다. 오석근 김수환은 레지던시 공간 활동 이력을 가지고 있다. 파견미술은 미술의 사회적 실천에 방점을 두고 삶의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현장중심 미술운동의 정서와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 레지던시는 미술계 제도비판에 방점을 두고 대안공간, 리서치에 기반한 도심재생사업 등의 전시장 중심 미술운동의 정서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편의상 둘을 구분하였지만 미술의 사회적 발언, 공동체(community)에 기반한 미술의 역할과 책임에는 양자의 고민의 출발은 같은 지점이다. 최소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모더니즘의 신화에 갇힌 자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하는 곳은 다르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코끼리>와 <기계1,2>의 같은 점이 무엇이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나도 <코끼리>를 보지 않아 뒷심이 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잠깐의 경험으로 비춰보았을 때 그들이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다.

반드시 작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작업의 내적 논리를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는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에 가장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냐, 작업을 지도한 선생이든,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누구냐, 자신의 꿈과 가능태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현실태의 사회적 영역은 어디냐, 그 곳의 사회적 취향과는 통하느냐, 즉, 자신의 작품이 어떤 아비투스(habitus)를 가진 사람들과 소비되고 생산되기를 바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예, 80년대 민중미술 작가들의 학교별 계보도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조선시대 보학(譜學)을 공부한 자들은 조선시대 문화사의 당파별 미학이나 취향쯤이야 라고 쉽게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각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 대한 다소간의 편견이 있음을 알고 있다. 작가들이 우리보다 훨씬 근접하지만 모두가 초인(Ubermensch)은 아니지 않는가?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와 민중미술 두 개의 자장을 지나온 신학철은 그런 면에서 혼자였다.

상덕의 <코끼리>가 상상마당에 온다면, <기계1,2>가 콜트콜텍 공장에 전시된다면 나에게는 하등 그러지 말아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작품이 두 개의 장소에 바뀌서 전시하자고 했을 때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둘 모두 40을 넘기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고 사회적 고민의 결과물로 작업이 출현했으며 미술계 내부에 대한 제도비판과 문제의식에도 공히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다른 점은 태도가 만들어낸 형식이(when attitudes become form) 어디서 더 소비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형식이 태도를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형식이 장르와 방법론을 규정하는 힘을 잃어버린 이상, 같은 태도 다른 아비투스라면 이 둘의 분리를 당연하게 만드는 경계선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우리같은 범인들이라면 해법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불안한 태도 불온한 형식들을 가진 아무 쓰잘데기 없는 예술과 예술가들을 만나라고. 그래서 자신의 구조화된 감각들을 깨부수라고.

그런데 이미 열린대로 열려있는 예술가들에게는 무어라 말해야 한담. 정말 어떻게 저 독룡(毒龍)을 퇴치하여 공주를 구할 것이냐의 문제앞에서 내가 두리뭉실한 선문답으로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만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不一 하나가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같지 않다.
不二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