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섭_다시, 현실과 발언 : ‘7인의 사무思無(또)라이’ 전

 2016.02.27 발행

작년 12월에 열린  ‘7인의 思無(또)라이’전 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100시간이 넘는 필리버스터로 국회의사당이 말의 사당같이 느껴지는 지금, 우리의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현실과 발언 : ‘7인의 思無(또)라이’전 1차 메모

1.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1980~1994》전을 1980년대 민중미술운둥의 퇴장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중미술운동은 시작부터 전시장중심과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94년의 전시는 전시장 중심 미술운동의 일단락으로 보는 것이 맞다.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이 쇠퇴기를 맞는 것은 1995년 《제1회 안티광주비엔날레》전이 끝난 이후이다. 1997년 제 2회<안티비엔날레>는 국비의 지원을 받아 프레비엔날레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이 둘 사이에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시 《새야새야 파랑새야》전이 있다.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을 아우르고 90년대 새로운 소비문화의 영향으로 등장한 매체들이 등장한 전시로써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1993년 백남준의 사비로 진행된 《휘트니비엔날레》서울전과 1995년 《광주비엔날레》는 차후 새로운 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전시로써 되짚어봐야 한다. 이후 한국미술계의 모든 것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는 점에서. 제도권 밖의 미술작가, 청년작가, 담론의 세계화, 국가 지원제도를 통한 당연한 지원제도의 도입.

2. 전시장 중심과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의 차이는 시작부터 달랐다. 서울의 현실과 발언이 창립전을 아르코미술관(옛 문예진흥원)에서 연 점,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가 창립전 준비중 5월 민중항쟁을 맞이하며 무산되었고 그 해 말미에 열린 광자협의 창립전은 씻김굿 형식을 빌은 굿판이었다는 점. 여기서부터 민중미술운동의 노선은 달리할 수 밖에 없었고, 1985년 민미협의 결성부터 1987년 대선 이후 후보지지자에 대한 노선차이로의 확대, 민미협을 탈퇴하고 민미련을 결성하며 현장중심미술운동을 전개하다 94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로 수렴되는 과정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2. 그래서 94년 전시에 너무 많은 강조를 하다보면 민중미술운동이 갖고 있는 지역적 차이, 운동노선의 차이, 그에 따른 표현방식의 다종다양함, 무수히 많은 담론들의 등장과 사라짐, 90년대 광주비엔날레 혹은 이후 등장하게 되는 한국 미술계 거의 대부분의 전시의 기조와 사업방향이 담겨 있음을 자칫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미술, 작품판매와 유통의 혁신, 국제교류(jalla), 생활미술의 확산, 미술교육, 미술창작의 글로컬, 대안공간의 등장(복합공간), 참여미학(관계의 미학), 性과 페미니즘, 젠더와 인종, 포스트콜로니얼, 사진 영화 비디오와 같은 매체의 확장과 전용, 비평의 등장 등등등 위의 언급들은 문자로 표현하니 민중미술운동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보이나, 분명 일부는 미비했고 일부는 과잉이었고, 일부는 억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한국에서 민중미술운동이라는 그 용광로와 같은 시대를 거치지 않고 한국미술계의 성장을 부인해선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3. 요새 어이없는 단색화 작가들이 역시나 어이없는 발언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90년대 한국미술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그저 박정희의 썬그라스처럼 세계를 흑백의 모노하로 환원시키는 작가들이고 사조이다. 단색화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회화사의 사대부 화가들을 지독히 계급적이고 편협한 관점에서만 재해석할 때 그나마 겨우 연결고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사조에 불과하다. 아시다시피 사대부 화가들의 그림에도 ‘지독히 계급적이고 편협한 관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말이다.

3. 더불어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담론을 확장시키려면 지금까지의 정치적 미술운동이란 함의된 개념에서 벗어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나는 70년대 모노크롬 일색의 화단과 화이트큐브에 지친 화가들의 전면적인 제도비판으로 보고 싶다. 민중미술운동이 굉장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을 앞세우며 제도비판을 가하였다면, 1981년 가평 대성리 바깥미술전, 1981년 야외현장미술연구회 ? 야투 충청도-와 메타복스, 난지도, 타라, 로고스와 파토스와 같은 80년대 (민중미술과 아카데믹에 반발한) 소그룹 운동들을 결합시켜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1. 물론 결은 상당히 다르다. 민중미술운동내에도 전시장 중심이니 현장중심이니 하는 차이가 상당한데, 어쩌면 당시 민중미술운동에 반발한 소그룹 운동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한 논리적 억측으로 빠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 아쉽다.

4. 그럼에도 그때그때의 단절과 이식만이 한국현대미술사를 지배해왔다고 해도, 그것들을 꿰메볼려고 함 시도라도 해보는 것도 지금 우리의 작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염병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검열에 능란한 외국인이라서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싶지만… 한국미술사에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극적인 사회비판 작업이나 미술인들이 조직화된 적도 없으나 모더니즘 계열의 모노파를 제외하면 예술 본연이 견지하고 있는 비판과 저항정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민중미술운동은 철저하게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의 태도였다면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좀 더 서구 주류(그것이 비주류라 하더라도) 미술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음… 푸닥거리냐 히스테리냐와 같은 용어의 차이, 소비공간의 차이, 아비투스의 차이 등등

 5.《7인의 사무라이전》는 조형보다는 발언이 앞서는 전시였다. 전시장에서 일어났지만 현장에서 쓰임이 더 많은 삐라, 깃발-비닐, 우산-, 포스터, 판화, 실사출력된 작품, 롹카를 활용한 작품-집회현장의 선전반의 거리 홍보수단으로 활용되던-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영상과 캔버스 작업 설치작업 조각 등도 있었으나 그들이 지칭하는 것도 대부분이 발언이었다. 삐라와 사방에 휘갈린 낙서, 직접적인 몽타주 영상과 사진, 실재 변기를 활용한 비판적 발언의 배설을 유도하는 작업 등 전시는 발언이 핵심 키워드였다. 이는 지난 여름 성남에서 열린 《저항예술제》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발언이 먼저이기 보다 조형적인 성찰과 숙성이 먼저여야 되지 않냐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조형적 성찰과 숙성은 어떻게 해야지 라는 생각에 이르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조형적 성찰과 숙성을 한다고 여겨지는 작가들-이를테면 전시장의 대가들? 이름있는 화랑이나 기관의 작가들? 최근에는 SNS를 중심으로 던전처럼 퍼지고 있는 신생공간들의 핫한 작가들? 발언의 시급성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들은 명확하게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깃발-비닐- 작업의 발언들은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미술계에 대한 항변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이 전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발언은 정치적 발언이 좀 더 거세져야 되는 작업에서도 그들의 당장의 고민을 놓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젊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민과 불안과 답답함은 꼭 정치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도 현실도 작업도 삶도 자신들의 나이도 비루하고 답답하고 뭐가 뭐다고 딱 정의내릴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그니까, 내 말은 그들이 박불똥은 아니지 않냐는 말이다.

5-1. 내가 앞에 긴 서설을 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시장 중심과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은 민중미술운동에서도 아직 봉합되지 않은 무언가로 보인다. 그리고 민중미술운동의 자장안에서 진행되는 7인의 사무라이전과 같은 예술행동과 신생공간들의 작가들, 그들과 그들의 팬들이 열광한 《2015 굿즈》와 같은 사업들이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그리고 제도권 안과 바깥의 꿈틀거리는 대안적인 흐름들이 지속적으로 합수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로 생각이 옮겨간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를 길게 메모를 한 것이고. 그런데…. 과거는 만날 수 있지만 현재는 만나기 힘들다가 현재까지의 내 생각이다. 현재는 지금 당장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도 바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