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4일 발행

기획연재 [방언들] 세 번째
송진희
http://queersnail.wix.com/wwwwwww

인트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선 안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다시 볼 때 밑줄에만 눈이 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모두 밑줄을 그어버리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수선한 밑줄은 원래의 글을 가립니다. 반복된 밑줄은 종이까지도 훼손합니다. 어느날 그 책을 집어들고 게검스럽게 밑줄을 그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밑줄이라는게 마치 나만 알아챈 것 같은 만족감을 동반하기 마련인지라 곧장 명명하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 작가를 oo으로 부르면 어떨까?’ 누군가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것은 물론 일종의 애정이지만, 그 애정은 모종의 나르시즘이 되곤 합니다. 명명하는 것은 대상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임에도, 명명하려드는 주체의 욕망에 더 복무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때 작가는 기다려 주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달라고 떼 쓰던 때가 지났음에도 저는 아직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작가가 구사하는 친숙하면서도 급진적인 언어가 어떤 연유로 타자들에게 깊게 안착 될 수 있는지, 작가가 미술이라는 파편으로 세계를 끌어올 때 어떻게 누락없는 확장이 가능한지, 이미지와 속도의 스펙터클 속에서 어떻게 고유한 빠르기를 지켜낼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말입니다. 저는 이제 일전에 게검스레 그었던 밑줄을 지워나가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1. 매체가 스타일이 될 때
작년 한 전시를 기획하며 운송업체에게 리스트를 넘겼는데 막상 탑차에 싣고 보니 이삿짐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각양 각색의 가정용 의자, 작은 스피커, 박터뜨리기에 사용하는 박 등 언뜻 보면 잡다하고 개연성 없는 물품들이었습니다. 현대미술 살림살이랄까요. 그만큼 현대미술이 다루는 매체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그럼에도 매체가 작가 카테고라이징의 주요 도구로만 작용하는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꽤 ‘효율적’으로 미술 장 안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성질에 천착해 발생하는 상황이 아닐까요? 우리가 대화를 할 때 기표와 기의를 분절시킨 상태로 말하지 않듯 매체 역시 물성과 사유를 동시에 함의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매체에 대한 작가의 선택은 고정적이기 어려울뿐더러 작가 고유의 정신성도 드러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현대인에게 있어 친숙한 매체 중 하나인 비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비디오는 촬영시 사용한 기기의 종류, 촬영 방식, 편집 기술에 따라 결과물의 편차가 매우 큰 편입니다. 접근이 용이한만큼 그 밀도에 대한 관대함이 때때로 지나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술관에서는 유독 비슷한 정도의 매끈한 질감을 가진 영상 작품들을 접하게 되곤하는데, 영화나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유려한 화질(HD, Full HD, Quad HD)의 비디오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론 시각경험의 차원에서 보다 안정감 있는 인식을 유도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관람자의 눈이 그만큼 HD 화질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수한 질감을 떠나 스타일의 유무 차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들어 HD가 선사하는 굴곡없는 질감이 널리 쓰일수록 비디오 작품들 각각의 감성이 평이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작품의 퀄리티라는 것이 화질의 높낮이로 규정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물론 화면의 질감은 중요합니다. 그 높이의 화질이 작가의 스타일을 반영한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스타일 없는 기술은 결국 기술로만 귀결될 뿐이며 이는 매체의 정신성을 누락시키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8mm영상으로 시작해 카메라와 친숙한 작업을 주로 해왔던 송진희 작가에게 일각을 앞다투는 기술의 인식론적 전복력은 다소 무력해 보입니다. 작가에게 있어 카메라의 사양은 물성과 정신성 모두를 내포합니다. 또한 프레임은 구도라기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 태도는 작가가 설정한 다음의 촬영 기록 매뉴얼을 통해 연마됩니다.

생활을 기록하는 매뉴얼 <생활 기록 조항>
연출하지 않을 것
재촬영 하지 않을 것
간단한 장비를 사용 할 것
색감을 보정하지 않을 것
구도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 것
생활 속의 거리를 우선시 할 것
지금 여기를 시공간의 배경으로 할 것
송진희, <생활의 가능성(들)>

사용한 기기나 촬영방식, 편집에 대한 작가 나름의 규칙은 매체를 그저 사용하는 것이 아닌 물성과 정신성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효과를 지닙니다. 작가는 카메라 뿐만이 아니라 로드뷰를 통해 비가시영역의 존재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로드뷰에 찍힌 사람들을 죽여가며 게임머니를 획득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설정의 게임상황을 제작하기도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현존하는 길의 모습을 보여주며 정보를 제공하는데에 목적이 있던 로드뷰의 실용성은 사회의 단면, 무감하게 몰락해버린 인간성에 대한 사유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매체에 대한 송진희 작가의 태도적 접근은 최근 작업에서 더욱 확장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두괄식으로 먼저 말해두자면, ‘비가시적인 매체’가 더 적극적으로 고안되었고 그것은 바로 ‘관람자의 자리’입니다. <시위>와 <완월동편지>의 경우는 작가의 ‘시선’이나 ‘견해’와 같은 다소 갑작스런 목소리같은 것이 없습니다. <시위>의 경우 네 명의 목소리가 각자의 이야기로 이 세계와 투쟁중이라는 말을 건네는 작품입니다. 관람객은 이 목소리들 사이에 앉아 그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완월동편지>는 완월동에 관련해 불특정다수와 주고받은 편지를 관람객이 읽어볼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이미지나 대상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 재편집해 셀렉팅하는 아카이브 형태와는 다른 모양을 가집니다. 또한 구조적으로 흡사한 양태를 선취하여 보여주는 다수의 작업들이 가진 재현 범벅의 한계 역시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관람객의 ‘자리’는 작품을 볼 수 있도록 미술관 측에서 마련한 불편한 의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 작가의 텍스트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고 다시 말을 이어가겠습니다.

“오히려 내 몫이었던 작품을 해방시켜 다른 이들과 함께 그 의미를 나누는 상상을 해보자는 제안과 같다. 나의 소유로 가치 매김 되는 작품의 자리에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는 것이다. (중략) 누군가와 공유하고 나눌 수 있을 때, 스스로의 예술적 가치를 작품에서 찾으려는 피로와 정신적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피폐해지는 일들이 예방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나의 소유화라는 허명으로 잠들었던 여러 작업들을 다시 사용하고, 활용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로 재배치 해보는 실험을 감행해보고자 한다.” -송진희, <경매更每>

우리는 애초에 적극적인 성향의 관람객과 소극적인 성향의 관람객이 있다고 쉬이 전제하곤 합니다. 이런 닫힌 명제를 숨긴채 ‘해석은 관람객의 몫’을 언급하며 개입과 참여를 갈구하는 것은 거칠게 말해 인정욕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송진희 작가는 스스로의 언성은 낮추되 타인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애초에 어떤 성향을 지닌 관람객이든 의도치 않게 적극적인 관람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송진희 작가의 언어가 타인에게 안착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는 작가 고유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저자성의 권위를 내려놓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때문일까요? 매체의 문제는 사실상 세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의 주체가 세계와 접촉하는 물질화된 형상이자 그 기저에 쌓인 내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결국 매체가 태도가 될 수 있을 때, ‘관람자의 자리’와 같은 ‘비물질적 매체’까지로도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같이보기 : <언니야 집에가자> <road view> <road kill ? where is my friend’s house> <생활의 가능성(들)> <시위> <완월동 편지>
송진희, road kill ? where is my friend’s house, single channel video, 5min 2sec, 2013

2.생태계로서의 미술계
송진희 작가의 창작활동은 1996년 중학생 때 찍은 8mm 영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혹자에겐 버성기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방언의 징후가 나타난지 올해로 20년이 지난 셈입니다. 그 후 작가는 독립적으로 영화, 사진, 잡지, 인문학공동체 등을 아우르며 활동해왔습니다. 2011년 한 대안공간에서의 단체전은 송진희에게 ‘작가’라는 통용되는 호칭이 따르는 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앞서 짧게 정리된 송진희 작가의 이력은 작가성에 대한 본질적이면서도 현장적인 질문들을 끌어올립니다. 예술중고교, 미술대학이라는 ‘단계’ 없이 그저 ‘해오던 것들’을 통해 공인된 작가가 되는 일은 여전히 드뭅니다. 장인-도제 방식의 교육이 당연하고, 마치 통과의례인양 여기는 미술계에서 이 ‘어쩔 수 없는 작가성’은 그래서 귀해보이기도 합니다.

이따금 미대생들로부터 들어온 ‘어떻게 해야 작가가 될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은 그래서 의뭉스럽게 느껴집니다. 이 질문은 자기만족에 늘 도달하기 어려워 반문과 숙고를 거듭하는 작가가 ‘난 작가가 아니다’라고 자평할 때 쓰이는 물음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작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성취욕, 미술계의 진입장벽에 대한 토로, 기성의 시혜와 권위에 언제든 감사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위의 질문에 ‘명쾌한’ 응답을 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절차와 입지로서의 작가성이 아닌, 내용과 태도로서의 작가성에 우리는 얼만큼 응답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했던 이력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자립, 미술의 장의 이해관계로 부터의 자립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동료’라는 수평적인 관계망이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기미가 될 수 있다”던 작가의 생각과 이어집니다. 선후배 문화, ‘선생님’ 문화, ‘형님’ 문화 등의 권위문화로부터 멀어졌을 때 ‘동료’의 발견에 대한 의미는 생경해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작가가 쓴 텍스트 <4박 5일 입성기>와 <작업을 방해하는 것들>에는 보다 면밀하게 미술계의 불편함들이 녹아있습니다. 이 불편함은 어쩌면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크게 눈치채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묵과해온 이들에게 더부룩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또 다른 텍스트 <아직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에게>가 그러하듯 위의 두 텍스트 역시 동료에 대한 살핌의 차원에서 소중합니다. 권력의 재배치, 힘에 의한 서열같은 것이 일종의 관습적 피라미드라면 작가에게 있어 동료란 생태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2011년 한 대안공간 단체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미술의 장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시스템 바깥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사진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미술 장의 분위기가 생소했다. 그 이유는 대안이라고 하지만 대학의 선후배 구조가 그대로 바깥에서 노출되어 다소 위계적인 분위기와 누군가는 소외되는 모습들, 전시를 마치고 작업에 대해서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보다 공격적인 비평이나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들, 이와 같은 미술-예술의 환경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중략) 여러 고민들 속에서 지금의 예술 현장에서 작업과 실험들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작가활동에 대한 고민은 아니다.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이 딛게 될 예술환경에 희망을 감지하기가 여전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작가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개인의 명성과 작가성에 대해 집중을 줄이는 일이다.”- 송진희, <아직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에게>
같이보기 : <4박 5일 입성기> <작업을 방해하는 것들> <p904+> <아직 도착하지 않은-미래의 작가들에게> <동계훈련>
송진희, 경매更每, single channel video, 14min 44sec, 2014

3. 세계와 접속
지금 이 시대는 관계의 물화라던가, 미디어화된 인간이라는 말을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송진희 작가에게 있어 그가 접촉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대체로 구축된 세계, 미세한 균열조차 내기 어려운 세계, 나와는 다른 속도로 들이밀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반면 작가는 그가 오랜기간 낮고 질박하게 구축해 놓은 세계를 부단히 꾸려갑니다. 작가의 모임이력이 이를 방증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동성애자집단 달팽이>, <연구모임 아프꼼>, <생활예술모임 곳간>, <동료 예술가 네트워크 p904+>, <동계훈련>. 이 다채로운 모임이력이 ‘그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비루한 노릇일 것입니다. 여러 모임들을 해오면서 작가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지 상상해봅니다. 사회성의 모델(니꼴라 부리요)을 발견하거나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틈(마르크스)을 마주치는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폭력성을 연이어 마주할 때마다 이를 타개할 전략과 태도를 연마하게 되는 전투에 가깝지는 않았을까요?

일전에 작가가 주도하는 모임에 잠시 참여해본 적이 있습니다. 모임은 집단이라는 형태가 갖는 특유의 내부와 외부 구별짓기가 없었습니다. 대화는 고루 분배되었고 모두 입과 귀, 둘 다를 가진 인간들만 모여있는 듯 했습니다. 인간관계에 흔하게 펼쳐져 있는 스펙터클의 소비자이자 스펙터클의 생산자들간에 맺는 계약 관계와는 완연히 달랐던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 유형의 관계가 생산 가능할까요? 저는 언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언어는 작가 고유의 방언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공유재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언어는 고스란히 <일상서>와 같은 영상작업, <생활의 보따리를 푸는 예술>과 같은 작가의 텍스트를 통해 발현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예술 매체의 기본적인 틀을 활용해서 메시지(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작가의 전형적인 형식이고 예술의 방식이라면, 생활과 삶을 가꾸는 노동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즐거움, 나눔, 증여는 삶의 형식을 온몸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한 작업들이 다른 삶을 꿈꾸고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이며, 예술이야말로 다른 삶을 제안하는 것이기에 점점 축소되고 마모되는 생활의 현장을 가꾸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든지 보따리를 풀어서 나눌 수 있는 예술, 그 속에 만남과 사귐, 증여와 응원이 숨 쉬고 있다.”-송진희, <생활의 보따리는 푸는 예술>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언어가 작가의 스타일이 담긴 고유한 방언이라면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방언이 스타일의 구축과 매커니즘의 생성으로 불릴 수 있는 곳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 매커니즘의 지향이 상생일 경우에는 전적으로 타인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새롭게 재정의 되거나, 비로소 성립가능해진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미 주체, 타자, 관계를 내포한 상생convivial의 단어, 이를테면 ‘사귐의 노동’, ‘기꺼이’, ‘응원’, ‘증여’, ‘돌봄’, ‘만남’, ‘우정’과 같은 말들이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본위(나쓰메 소세키)적 언어인 것입니다. 이러한 방언들은 환대와 공유의 방언에 가깝습니다. 이는 다시 작품이 존립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확장으로 이어지며, 타자에게 공유되어 쓰임이 생길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의 사회성에 대한 태도로 연결됩니다. 비로소 방언은 권장되고, 세계는 더 튼튼한 지반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같이보기 : <누군가를 위한 식탁>, <생활의 보따리를 푸는 예술>, <생활예술모임 곳간>, <일상서>, <경매更每>

아웃트로
텍스트로만 보던 것을 작품으로 마주했을 때의 기쁨이라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이 즐거움을 지식의 실례를 발견했다는 자위적인 차원으로 귀속시킨다면, 이는 예술작품을 기존의 텍스트에 헌사하는 형용사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에 그치게 됩니다. ‘작품 보기’가 ‘명제 증명하기’로 귀결된다면 시각예술이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부러 이론의 쓰임을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대신 작가의 작품을 마주할 때 함께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텍스트 목록을 글 말미에 첨부합니다. 저는 이따금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들 때, 송진희 작가의 작업들을 좋아하는 영화 다시보듯 보곤합니다. 송진희 작가의 작업이 작업실과 전시장에서만 완결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미술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마주한 독자님들도 저마다의 ‘자리’를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인용없는 참고문헌
고병권외 5명,『코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권용선,『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린비, 2009.
김영민,『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김장언,『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현실문화, 2012.
나쓰메 소세키,『나의 개인주의 외』, 김정훈 옮김, 책세상, 2004.
니꼴라 부리요,『관계의 미학』, 현지연 옮김, 미진사, 2011.
마크 A. 치담 외 2명,『미술사의 현대적 시각들:해체주의에서 퀴어이론까지』, 조선령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7.
미셸 푸코, <저자란 무엇인가?>, 1969.
사사키 아타루,『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 모음, 2012.
서동욱,『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문학과 지성사, 2014.
수전 손택,『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이후, 2002.
심보선,『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선언』, 황현산 옮김, 미메시스, 2012.
우치다 타츠루,『스승은 있다』, 박동섭 옮김, 민들레, 2012.
제니퍼 도일, <퀴어벽지>, 2006.
파블로 엘게라,『사회 참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고기탁 옮김, 열린책들, 2013.
W.G.제발트,『현기증, 감정들』,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2014.
자크 랑시에르,『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ㅤ
자크 랑시에르,『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4.
연재소식: 지난 <방언, 그리고 필담>에 이어 세 번째 글을 올립니다. <방언들>은 표준화, 규범화, 제도화된 언어를 지양하고 저마다의 방언을 구축하고 있는 작가와 그들의 작업을 주체화, 퀴어화, 관계화의 맥락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비평을 지향합니다. 다음 연재는 또 다른 방언을 구사하는 작가와 함께 진행될 예정입니다. 최근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의원님’들 때문에 뉴스를 보는 재미가 생겼는데,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발언 지속 대신 법안 통과로 끝나버렸군요. 무릇 발화란 소리내는 행위 그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지속하는 데에도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지상의 발화들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로 이번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