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희_국가폭력과 저항폭력 – 2015년 12월5일 제2차 민중집회에 부쳐

2015.12.05 발행

김환희

문제제기

2015년 12월5일 제2차 민중집회를 앞두고, 가장 뜨거운 화두는 이 집회가 “폭력집회가 될것이냐, 평화집회가 될것이냐”가 되고 있다. 집회를 다루는 언론의 대부분이 그런 내용일뿐더러, 집회를 앞두고 SNS상에서 돌고 있는 여론도 다르지 않다. 특히 시위대로 위장하고 폭력시위를 조장하는 경찰 프락치에 대한 경고의 내용들이 그러하다. 이른바 2008 촛불집회의 ‘망치남’의 경우는 이미 사법권력의 처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동권에 의해 프락치의 사례로 끊임없이 인용되며, 영원히 고통받고 있는 중이다.

평화의 꽃길을 만들겠다는 종교계, 폭력시위를 우려하는 언론, 복면시위를 엄단하겠다는 사법권력, 폭력시위 조장하는 프락치를 조심하라는 운동권 등 제2차 민중집회를 둘러싼 기류를 보고 엉뚱하게도 촛불집회의 말미가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역동성을 만들어냈음에도, 정치적인 성과는 하나도 낳지 못했던 바로 그 촛불집회 말이다.

“촛불집회에 응집된 강력한 에너지가 경찰과의 갈등상황에서 저항폭력의 분출로까지 발전할 조짐을 보이자(동시에 보수여론이 시위의 ‘폭력성’에 주안점을 둔 강력한 공격을 펼치기 시작하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등의 종교 세력은 경찰과 시민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비폭력 시위를 유도하였다. 그 시점 이후 급진적 행동성이 제거된 시위대는 거리행진 이후의 단계로 진전하지 못하고 자리 지키기 식의 지루한 장기전으로 접어들며 자연산화의 길을 걸었다.” (국가와 폭력, 2012, 김환희)

이와 관련해 고병권은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라는 책에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는 2008년 촛불시위에 참석해서 몇몇 연구자들과 길바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매우 공세적인, 말 그대로 상황을 타개해 줄 창과 같은 존재들”이 필요하며 “지금 필요한 용기는 상황을 타개해나는 행동에 있지 상황을 지키는 행동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때 곁에 있던 유명한 철학자 한 사람이 고병권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 철학자는 평화 시위의 주창자로 촛불집회의 정신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찰에게까지 젠틀하게 행동할 정도로 아주 온화한 평화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고병권에게는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고병권은 이에 이렇게 생각한다.  “경찰에 대해서는 욕설도 자제하는 사람이 왜 내게 그토록 심한 욕설을 퍼부었던 것일까. 여기가 바로 폭력에 반대하는, 그러나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내부로 행사되는 폭력이 있었던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 종종 내부공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국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할 때조차 국가를 이미 내면화한 상태로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데서 드러난다.”

1. 나는 이 글에서 시위대의 내부공안(police)으로서의 평화강박에 대해서 우려하며, 이에 저항폭력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지 따져보려 한다. 즉 다음과 같은 고병권의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폭력문제가 중심이슈가 되는 것은 시위에 매우 치명적이다. 경찰은 어쩌면 그런 것을 노리는지도 모른다. 폭력 이슈는 시위를 낚는 일종의 그물이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2. 한편 폭력이란 문제와 관련해,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깊은 고찰을 전개하고 있다. 즉 단순히 물리적 폭력의 가시화 정도를 통해서 폭력의 정당성 여부를 가릴 수 없다고 말하며, 폭력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유도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마오주의자로서의 경직성으로 인한 선천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의 글의 전개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칼 슈미트의 이분법적 정치(적과 아군) 프레임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폭력의 정당성을 도출하기 때문에 결국 편협한 결론(적대의 정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젝은 필자에게 폭력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위한 좋은 계기를 제공했으며 동시에 이와같은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어 좋은 글쓰기 스파링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이 글은 지젝에게서 느낀 영감에서 시작했으며 동시에 그와의 대결적 글쓰기를 시도한 결과물이다.

국가폭력과 저항폭력

우리는 가능한 변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국가폭력을 먼저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국가폭력과 우리가 통용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물리적 폭력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면, 국가폭력이 발생하는 시점에서 이에 저항하는 저항폭력의 정당성은 온전히 승인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먼저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발생하는 민중들의 폭력을 ‘저항폭력’으로 명명하고 이 둘을 구분해보고자 한다.
국가폭력의 사례인 동학농민운동, 광주항쟁과 용산참사가 발생한 상황에서의 공통점은 국가가 국가폭력을 본격적으로 자행하기에 앞서 그들을 폭도로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즉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유일한 주체’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지점은 국가폭력 외의 다른 모든 폭력을 불법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말에 프랑스에 방문해서 1차 민중집회에 참여한 시위대를 IS와 같은 테러리스트로 묘사했다. 국회에서는 복면시위금지법을 입안하며 이에 화답했다. 이와 같이 국가폭력의 가장 음흉하면서도 괴기한 장면은 민중 스스로가 생명을 지키고자 행사하는 저항폭력을 불법적 폭력으로 규정짓고, 응보적 차원에서의 폭력 행사임을 선포함으로써 도덕적 비판을 무마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9.11사태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모든 움직임이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며 9.11사태가 무자비한 국가 폭력 행사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테러리즘이라 불릴 때 “서로 다르게 구분되는 폭력의 값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확립된 국가들이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해 명명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테러리즘’은 국가의 폭력에 비해 비이성적이고 무자비한 극악한 범죄행위로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저항폭력에 붙은 테러리즘이라는 딱지는 “불법적인 자들의 폭력을 기술하는 이름이 되고” 국가폭력은 “정당한 국가로서의 국제적인 인정을 사칭할 수 있는 이들의 특권이 되는 것으로, 전 지구적 폭력을 개념화하는 틀”이 되어 국제적으로도 승인된다(Judith Butler. 2008.). 저항폭력에 대한 이러한 범죄적 이미지 부여는 미디어에 의해 더욱 부추겨진다. 미디어는 저항자들에게 “범죄나 스토커 이미지를 마구 퍼뜨려 ‘도덕적 공황’을 불러일으키면서 도시의 ‘경제적 폭력’을 은폐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고 정당화시킨다.”(Slavoj ?i?ek. 2011.).

한국의 미디어도 파업노동자, 시위대를 폭력성이 과다한 불법적 집단으로 묘사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폭력이 정당하지 못한지를 판별하는 것은 누가 ‘물리적 폭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즉 영화 ‘두개의 문’에서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는 철거민들의 모습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러한 가시성을 근거로 철거민을 제압하는 경찰의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가시성’이라는 기준은 많은 사람에게 ‘폭력에 대한 기준’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시위대의 경우에도 비폭력을 지향하는 사람들(평화운동가)이 강박적으로 ‘가시적 폭력’의 분출을 억제하고자 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는 한국의 촛불집회가 자연산화하기 직전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오큐파이 시위에서 “시위대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폭력이 시위자가 다른 참가자한테 경찰을 공격하지 말라고 휘두른 것이었다.”(David Graeber. 2012.)라는 형용모순적 사태를 소개하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이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만 한정된다고 착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Slavoj ?i?ek. 2011.)라는 지젝의 주장은 매우 통찰력 있게 들린다. 시스템의 주입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관적 폭력이라는 구조적 폭력은 보지 못하고, 주관적 폭력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지젝은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두개의 문’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한복판에 철거민들이 점거하고 있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위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행사되는 ‘저항폭력’은 일상적 삶의 회복, 즉 생존 권리의 탈환이라는, 본질적으로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이지 폭력투쟁과 동질의 것은 아니다. 저항폭력은 “국가폭력에 대한 인민 측의 반폭력, 바꾸어 말하면 생명력이라는 힘으로 한정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이렇게 생명력으로 분출된 저항폭력과 국가폭력의 “가장 큰 차이는 후자가 폭력조직 기구를 자기 긍정적으로, 점점 더 폭력을 격화시키는 방법 이외의 수단을 가지지 않는데 반해 전자의 폭력은 한정적이고 조건적이며 항상 비폭력으로 수렴되는 반폭력이라는 점이다.”(酒井隆史. 2007.)

따라서 국가의 폭력조직 기구로서의 특성과 구조적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을 감안하여, 국가폭력이 감행하는 이중폭력을 살펴봐야 하며, 거기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을 주관적 폭력으로 인지해 비판하면 안 된다. 또한 우리가 국가폭력에 대항해서 해야 될 일은 (과거사 청산의 궁극적 목표로도 지적했던) 폭력조직 기구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국가=폭력 기구’의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체가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다음 장에서 하고자 한다.

‘적대의 정치’와 폭력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좌파진영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사회운동으로서의 해방은 오직 국가제도 바깥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삶의 모든 측면에 많든 적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도외적 반대는 제도에 통합되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Werner Bonefeld et al. 2004). 즉 선거 등의 제도적 틀 안에서의 도구를 통하여 국가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다원주의적 대의제를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변혁방법으로 여긴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맑스주의, 아나키즘, 급진좌파, 급진우파, 급단좌파, 급단우파 등 사회구성체에 대해 여러 주장이 상존한다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극단적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원주의는 최소한에서 합의 가능한 지점으로 보인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으로 가는 것(전체주의)을 막아주는 차악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좌파의 모든 주장을 ‘대의 민주주의’ 정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정치’, ‘화석화된 급진성’, ‘투표에서 득표를 위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의회 민주주의 안의 진보정당들이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일지라도, 의회는 근본적으로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즉 다원주의와 적대의 정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의 영역에는 적과 아군의 구분밖에 없다고 하였다.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회색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배타적 구분에 근거한 ‘적대의 정치’를 옹호한다.

실제적 보편성은 서로 다른 문명들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동일한 기본적 가치들을 공유한다는 따위의 깊은 감정이 아니다. 실제적 보편성은 오히려 동의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유하는 부정의 경험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험 속에서,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혁명적 연대의 구호는 “우리의 차이점을 서로 용인하자”는 게 아니다. 혁명적 연대라는 건, 문명들 간에 이루어지는 협정이 아니라 문명들을 가로지르는 투쟁의 협정이기 때문이다(Slavoj ?i?ek. 2011.).
 
지젝은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적대의 정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서로 다름에도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차이의 정치’는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차이에도 연대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동일한 적을 가진 집단끼리의 연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변혁 수단이라고 말한다. 또한 민중과 권력(자본권력, 국가권력)의 적대의 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민중의 폭력적 저항을 신적폭력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저항에서 사회변혁의 희망을 발견한다.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십 수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보자. 빈민가의 군중들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Slavoj ?i?ek. 2011.).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운동들이 제도화되면서 그것이 품고 있던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약간의 개혁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젝의 ‘적대의 정치’는 적실성이 있다. 경제적 부의 차이가 사회 전반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국가권력이 폭력을 동원해 이 불평등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진실을 깨지 못할 때, 사회변혁은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다원주의는 이러한 급진적 사고 및 폭력성을 지양할 것처럼 다루기에, 혼란을 야기하므로 피아를 분명히 하는 ‘적대의 정치’를 진보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지젝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의 주장은 ‘지금 이 시대에 피아를 구분하는 계급적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불분명하다. 과거 맑스주의처럼 노동자와 자본가를 구분하는 계급의식을 강조하기에는, 둘 사이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해져버렸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그것보다도 오히려 노동자 내부에서의 심리적 계층격차가 더 커져버렸다. 더군다나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의 구분은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을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의 폭력을 ‘신적 폭력’, 타인의 폭력을 ‘신화적 폭력’으로 자의적으로 규정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젝도 ‘신적 폭력’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같은 행위를 두고 외부의 관찰자는 그걸 단순히 폭력이 분출되는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직접 참여한 자들에게는 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신적 성격을 보증해주는 대타자는 없으며, 그것을 신적 폭력으로 읽고 떠맡는 위험은 순전히 주체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신적 폭력은 주체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역사인 셈이다(Slavoj ?i?ek. 2011.).

따라서 이러한 ‘적대의 정치’가 품고 있는 선천적 한계인 이분법적 작위성(혹은 자기애적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차이의 정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저항폭력과 ‘차이의 정치’

지젝이 이야기하는 ‘적대의 정치’는 실은 슈미트가 고집했던 주권이라고 하는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투쟁은 중심을 어떻게 획득하는가(‘주권자는 누구인가’)를 둘러싼 것이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권은 잠재적으로 늘 적대성을 내전(상대편의 소멸)으로 격화시킬 폭력성을 감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적에 기반한 모델은 이제 포기돼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델은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의 정치’에 기반을 둔 시도가 새로운 국가폭력(전체주의)을 낳음으로써 완전히 실패하였음은 현실공산주의를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적대의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내재해 있는 ‘국민-주권-국가’의 삼위일체적 가정을 거부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권 설정에 의해 형성된 연결 고리를 거부하고 집권적 구심적인 흐름에 저항, 특이성의 발휘와 분산을 목표로 하기 위해 연합을 구성하는 복수의 경험, 비국가적인 공공권의 출현이라는 징조, 혁신적 삶의 형태를 지키기 위한 적대성”만을 그 안에 내포해야 한다. 즉 인간과 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가정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각기 흩어져 통합되지 않는 인간이나 집단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자연상태’를 단순히 혼돈으로, 충만한 공포의 공간으로 표상하는 방식을 중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연 상태를 “생산적인 일상생활의 실험이나 열려진 사람들의 조직 혹은 경험의 장으로서 긍정”해야 한다(酒井隆史. 2007.). 이와 같이 특이성 발현을 위한 연대,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건강한 공존이 가능한 정치를 ‘차이의 정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이의 정치’는 ‘적대의 정치’에 기반한 국가와의 직접적 대결방식을 지양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폭력 수단의 화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화력이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조촐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 대결은 자본에 내재하는 사회관계의 형식을 채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군대는 다른 편의 군대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기는가는 실제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혁명은 문지기의 코를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로 흐르는 문제로, 그를 하찮고 천박한 조소거리로 만드는 문제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酒井隆史. 2007.).

다카시가 혁명을 문지기와 싸워 새로운 문지기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흘러가 조소거리로 만든다는 비유는 매우 중요하다. 즉, 군사혁명을 통해 주권을 대체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권 자체를 무시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두 나가자! 한사람도 남지말자”는 구호가 등장했던 2001년 12월의 아르헨티나 ‘봉기’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통치가 사회에 분쟁과 혼란을 초래하고 대표제를 공동화시켰다. 민중들은 ‘혼돈’의 해소를 더 이상 새로운 리바이어던에게 위임하기를 거부하고 ‘무정부상태’를 오히려 대안의 자주적 질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정부상태는 종종 동의어로 오인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주권의 회복’을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질서’의 지표로 간주하는 근대적 주권 논리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차이의 정치’는 ‘신적 폭력’의 인위적 결정이라는 앞에서 이야기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본다.

민중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해체로 인해 정치가나 경영자들이 도망가거나 통치불능이 되어 주권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생산적인 실험이 전개된다. 이를 ‘혼돈’으로 단죄하며 ‘주권의 회복’을 부르짖는 군사세력에 의해 ‘치안’이 확보되고 이 과정에서 가공할 만한 폭력이 발생한다. 이는 근대적 주권에 따라 다니는 악순환을 최악의 형태로 수없이 경험했던 라틴 아메리카 (일테면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의 전복) 민중에 의한 근본적인 대안인 동시에 리바이어던에 대한 민중의 방어 투쟁이기도 하다. 비르노는 적대성이나 폭력을 이 수준에서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폭력은 이 저항권 아래에서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위해 행사되는 ‘보수적 폭력’이 된다. 그리하여 적대성, 나아가 폭력은 적이나 적의를 절대화로까지 격화시키는 거울의 관계에서 해방된다(酒井隆史. 2007.).

‘차이의 정치’에서 발현되는 이와 같은 생산적인 실험을 우리는 파리 코뮌이나 광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는 곧 국가의 실체, 가공할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르노가 이에 저항하는 폭력을 민중의 방어투쟁, 보수적 폭력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저항폭력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고, 민중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수비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폭력 개념을 통해 ‘적대의 정치’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저항권이라는 것은 소중한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기에 법제정적인 국가의 폭력이나 범죄자가 행사하는 ‘폭력을 위한 폭력’과도 구분된다. 민중의 방어투쟁, 저항폭력으로서의 ‘신적 폭력’은 적대를 절대화시키는 거울관계, 즉 ‘적대의 정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국가폭력’과 ‘저항폭력’, ‘적대의 정치’와 ‘차이의 정치’를 통해 저항(지양)해야 할, 혹은 지향해야 할 폭력과 정치를 구분해 보았다. ‘국가폭력’에 대항한 민중들의 ‘저항폭력’을 주관적 폭력의 관점에서 윤리적 심판을 내리게 되면, 혁명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즉 비폭력행동이 아닌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거둠으로써 직접행동에 있어서의 운신의 폭을 좁힐 뿐만 아니라, 공권력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폭력’으로서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대의 정치’에 기반하여 폭력을 정당화 할 경우, 선악분별에 대한 어떠한 윤리적 고려 없이 적을 향한 무분별한 파괴와 증오로 치닫기 쉽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에 기반을 둔 ‘저항 폭력’을 지향해야 한다.

문제는 정당한 폭력인 ‘저항 폭력’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폭력의 행위가 ‘전지구적 공공성(the common)을 확대 내지 보호하기 위한 저항행동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공공성의 확장은 보편적 복지의 확대, 공공장소의 증대, 공기업 및 사기업의 공익적 성격의 강화 등의 정책적 방법을 통해 추진 가능하지만, 공공성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규범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폭력의 정당성 기준으로 삼기에는 애매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사회의 공공성이 제대로 확보되는냐의 여부는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의식주의 권한, 일할 권리, 호모사케르에 처하지 않을 인권)보장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고 본다. 공공성의 확대는 만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한 공공성이 제공하는 기준은 그러한 혜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의 최약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호모사케르를 만들지 않는 사회를 창출하는 것이 공공성의 확보일 것이다. 중세 영주 시대의 불평등 신분제 사회 속에서도 그 마을에 아사자가 생기면 그 지역 영주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만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은 권력자의 중요한 책무였다.(Karl Polanyi. 2009.) 하지만 정치적 평등사회를 도래시켰다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자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챙기기를 회피하고 개인의 이익과 권력만을 무한정 추구하고 있다. 지구 한쪽 편에서는 거대한 음식물쓰레기 처리 문제로 도시가 골머리를 썪고 있는 동시에 다른 편에서는 지구인구의 4분의1이 아사에 직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을 “정지시키는 비상브레이크”를 “인류를 위하여” 전지구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Walter Benjamin. 2008.) 그런 구조적 폭력을 중지시키는 저항적 폭력에는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모든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 생명을 적극적으로 탐식하는 이 사회의 지극히 작은자(농민, 비정규직, 세월호유가족, 쌍용차, 강정마을, 밀양, 콜트콜텍, 가만히 있게된 학생들)를 위해 함께 싸우는 저항폭력은 신적폭력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가복음 25:45)


참 고 문 헌

1. 국내문헌
김동춘. 2008. “민주화와 과거청산 제도화의 딜레마 – 정부주도의 과거청산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가?”≪민주주의 연구소 총서≫.
김동춘. 2011a. “서평: 이제 ‘국가 범죄’를 학문적 논의의 장에 올리자.”≪경제와사회≫ 제90호.
김동춘. 2011b.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돌아보며.”≪황해문화≫ 제72호.
이진경. 2012. “프레카리아트, 거리의 계급” ≪프레시안≫
고병권.2012.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 그린비.

조희연. 2002. “민주주의 이행과 과거청산”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조희연 편. 함께읽는 책.
조희연. 2012. ≪민주주의 좌파, 철수와 원순을 논하다.≫ 한울아카데미.

2. 외국문헌
David Graeber. 2012.“Concerning the Violent Peace-Police” ≪N+1≫.
Giorgio Agamben. 2008. ≪호모사케르≫. 박진우 역. 새물결.
Goerges Sorel. 2007. ≪폭력에 대한 성찰≫이용재 역. 나남.
Judith Butler. 2008. ≪불확실한 삶 :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역. 경성대학교출판부.
Karl Polanyi.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길.
Michel Foucault. 2004. ≪성의 역사3 : 자기 배려≫. 이혜숙, 이영목 공역. 나남.
Paul Schumaker. 2010.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조효제 역. 후마니타스.
Slavoj ?i?ek.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3인역. 난장이.
Walter Benjamin. 2008. ≪폭력비판을 위하여≫. 최성만 역. 길
Werner Bonefeld et al. 2004 ≪무엇을 할것인가≫조정환 역. 갈무리
酒井隆史. 2007. ≪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김은주 역. 산눈.

3. 영화
노동자의 눈. 2001. ≪아르헨티나의 봉기, 혁명은 시작되다 (Argentinazo y” Comienza la revolucio’n) ≫.
김일란, 홍지유. 2011. ≪두개의 문≫.

※ 진보평론 53호에 ‘국가와 폭력’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을 편집, 수정하여 크리틱-칼에 올리는 것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