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_프랜차이즈 인생 -1

2014.11.21 발행

<프랜차이즈 인생> -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죠.”
작은 아버지 이름을 대며 찾아왔노라 하니대뜸 돌아오는 대답이었다일 년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한 작은아버지사내자식이 대학씩이나 나와서 밥벌이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극진히 차려진 제사상을 뒤엎을 기세로 불호령을 내리던 그를 온가족이 매달려 말린 게 지난 주 일이었다.내가 잘 아는 영어 학원 원장한테 말 해놓을 테니 걱정 말고 가봐천천히 기어 담을 타 넘는 구렁이처럼 능글능글 거드름 섞인 작은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은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역시 우리집안 위하는 건 자네 뿐이야고마워.” 바로 공치사가 이어졌다연신 굽실대며 작은아버지 술잔에 정종을 가득 따라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났다.
면접 보고결과까지 다 나와 봐야 알죠.” 뾰루퉁하게 대꾸하자내가 보내서 왔다하면 걱정할 일 없다며 단숨에 술잔을 들이키던 그였다.
걱정 말기는지금 분위기는 작은아버지의 말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데안경테 두 다리에 명품 로고가 크게 박힌 안경을 쓴 원장의 나이를 머릿속으로 가늠해보았다안경 너머로 보이는 완벽한 화장을 천천히 따라 내려가던 시선이 원장의 입술에서 멈췄다허기가 느껴졌다면접 날이라고 나름 긴장한데다 아침부터 부산떠는 부모님 때문에 식사를 뜨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이다한 시간 후성공적으로 면접을 마친 나를 상상해 보았다맥도날드에서 커다란 빅맥을 허겁지겁 입 속으로 밀어 넣는 나를갓 튀겨진 프렌치프라이를 케첩에 푹 찍어 입에 가져가는 나를.그래케첩은 딱 저 입술색이네라고 생각하던 그 때원장과 눈이 마주쳤다원장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 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짧게 한 모금 들이키고 입을 떼자잔 윗부분에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묻어나왔다삼십대 후반사십대 초반꽉 쪼아 올려 묶은 머리에 비싸 보이는 정장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몸매 덕분에 그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그 나이에 이렇게 큰 학원을 가지고 있다니원장은 안경테를 고쳐 쓰며앞에 놓인 내 이력서를 집어 들었다깔끔하게 정리된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남자인 내가 봐도 전문가의 손길이 팍팍 느껴졌다그 손톱위에 연한 베이지색 매니큐어가 하나하나 공들여 발라져 있었다그저 처분만 내려줍쇼하는 재판장 앞 피고인의 심정이 되어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무릎 위에 어색하게 올려져 있던 애꿎은 양 손 엄지손가락 두 개만 맥없이 노려보았다.
그래서토익 점수는 이정도고.. 토스는 몇 등급인가요?”
토스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토스 몰라요토익 스피킹 말이에요.”
.. 그거는 아직 시험을…”
옳다꾸나원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기쁨으로 차오른 그녀의 얼굴은 광산에서 금맥이라도 짚어낸 광부의 모습이었다.
우리 학원은 상위권 애들 위주라 회화도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하는데… 해외연수경험은… 없으시구나.”
이력서를 앞뒤로 훑어보던 원장의 말에 무언가 찔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그녀는 잔을 든 손으로 자기 책상을 가리켰다.
저어기 쌓여있는 서류들 보이시죠전부 다 이력서예요사람 한 명 뽑는데 왜 이렇게 많이들 보 내는지부담스럽게… 호호호온라인으로 보내온 거는 아마 더 될 거예요.”
수북이 쌓인 서류들 중에 어떤 게 이력서 뭉치라는 건지 모르겠다어쨌든 자신은 아니라는 얘기다언감생심감히 낙하산 주제에 자격증도 없이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다발끝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곳을 뜨고 싶은 마음을 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 담았다.
토스라는 것 말인데요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따오겠습…”
몇 급 따오실 수 있는데요?” 안되겠다는 듯 원장이 황급히 말을 잘랐다들고 있던 잔을 부러 잔 받침 위에 세게 내려놓는 바람에 쨍하는 소리가 원장실을 울렸다.
.. 그게..” 정신이 아찔해져왔다.
우리 선생님들 전부 네이티브나 다름없으세요거진 다 7.8등급이신 분들이 대부분이구요.”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먹네제발 좀 꺼지라는 말이다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나는 체념의 단계로 들어섰다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시험보구 성적 나오는 게 열흘이니까… 그 정도 드리면 될까요?” 원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네네.” 뻘쭘하게 대답하고는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등 뒤로 원장은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잊지 않았다꼼꼼한 년.
그럼준비 되시면 연락 주세요.”

결국난 토익스피킹 학원에 등록했다입에 떠 넣어줘도 못 삼키고 뱉냐며 노발대발 날뛰는 작은아버지와 부모님의 성화여동생 유진이의 한심한 눈빛이라는 삼중주가 빚어낸 합작품이었다절차는 간단했다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일단 토익스피킹 학원 추천을 검색한다엄청난 양의 게시글이 쏟아졌다두어 개 읽다보니 광고글 냄새가 짙게 배어왔다귀신을 속여라 감히 누굴 속여다시 검색창에 강북 토익스피킹 최다 수강생 학원’ 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입력했다학원 두 개가 반짝이는 별을 달고 나타났다수강후기들을 쭉 훑어보니 괜찮아 보였다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지 않은가특히 군에서 갓 제대한 영어 무지랭이가 한 달만에 레벨5에서 레벨8이 되었다는 후기가 마음에 꽂혔다군대에서 2년 썩느라 리셋된 머리에서 레벨8을 얻었다면 믿어도 되는 강의다역시 사람들이 몰리는 덴 이유가 있었다주저 없이 수강신청 버튼을 누른다한 달에 25만원후덜덜한 가격이었다돈 없으면 스펙도 못 쌓는 시대다. 3개월 할부로 결제했다. 250만원의 값어치로 만들어주마시작하기 전부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난 깨달음을 얻었지 않는가내겐 꿈을 위한 열정이 있으니까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나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씨푸드 뷔페라는 곳에 와 앉아있다그것도 여자와 단둘이 마주보고심지어 얼굴도 귀엽고솔직히 걔가 메신저 창에 올려놓은 셀카 사진을 보여줬더니 친구 놈들 반응은 그저 그랬다뭐 어떠랴내 눈에만 예쁘면 됐지시큰둥한 친구 놈들의 반응에 실제가 훨씬 낫다고 우겨댔다실제로 실제가 훨씬 낫다유리라는 이름도 귀여운 이 여자아이는 바로 총알 같은 질문들이 쏟아지는 토스학원이라는 전쟁터에서 만난 전우였다.
학원 개강 첫 날나의 열정을 불태우겠다며 수업 시작 한참 전에 강의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뿌듯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웬 미국인이 미리 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그리고는 세상에서 제일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Hi”를 건넸다우물쭈물 Hi에도 대답 못하고 찌질하게 기가 죽었다푹 고개를 숙이고는 눈에 들어오는 자리 아무데나 가서 앉았다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수업 시작 전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빠져들었다금발에 푸른 눈잘 다려 입은 체크셔츠에 귀여운 보우 타이슈렉처럼 불룩 튀어 나온 배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갈색 멜빵바로 그가 무시무시한 토스 강의의 일인자제임스였다.
제임스는 강의 내내 시종일관 갓난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그런데도 무시무시했다왜냐하면 무작위로 아무에게나 질문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60분의 토스강의는 이렇게 나뉜다. 20분은 오늘 배울 영어지문을 제임스가 해석해주고 천천히 발음하는 시간이다나머지 20분은 제임스가 21조로 정해준 짝과 물어보고 답하며 열심히 외우는 시간마지막 20분은 제임스의 랜덤타임아니 킬링타임인 질문시간이었다. 1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강의실에서 질문을 받은 자는 나머지 모두의 시선을 한 눈에 받는다거기서 떠듬떠듬 거리며 똑바로 대답을 못한다는 건 무지하게 쪽팔린 일이다제임스가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한국인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엄청 의식한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한 것이다군중 앞에서 창피당하고 무시당하는 걸 죽기보다 두려워한다는 걸 한국 생활 일주일 만에 캐치해냈단다무서운 놈그걸 바로 자기 강의에 차용한 제임스는따지고 보면 영민한 강사인 셈이다아무튼 제임스의 러시안 룰렛같은 질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간 20분 동안 짝 지워준 파트너와 일초도 쉬지 않고 지문을 외워야 했다그 짝이 바로 유리였다동생 유진이는 대학입학과 동시에 어학연수를 계획했다그리고는 머릿속에 허영만 가득한 된장녀라 놀려댄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방학 내내 알바한 돈과 장학금을 모아 호주로 일 년간 떠났다워킹홀리데이였나 뭐 그런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걔는 맨날 그렇게 매사가 악착같다그런 유진이완 다르게 유리는 뭔가 여유가 있어보였다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유리만의 여유로운 태도는 수업시간에도 나타났다내가 떠듬떠듬 대며 술 취한 듯 횡설수설해도 끝까지 답을 말할 때 까지 꾹 참는 저력을 보여줬다아마 유리는 나를 통해 인내심의 끝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심지어 내가 완벽한 답을 하지 못했을 때도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고쳐주는 센스도 지녔다타고난 여성스러움이라고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그 날도 여느 때처럼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전 날 친구 한 명이 제대했다는 핑계로 새벽까지 술 마신 게 화근이었다대학 시절에는 거뜬히 이겨냈을 술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술이 떡이 되가지곤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겠다며 학원에 와 앉아있었던 것이다그런 나를 제임스가 몰라볼 리가 없었을 터바로 질문 폭격이 날아오기 시작했다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워밍업으로 던지는 질문부터 쏟아졌다뭐 그 정도는 이제 익숙하게 방어할 수 있다문제는 킬링타임이었다제정신 아닌 나 때문에 유리도 앞선 20분을 엉망으로 보낸 후였다제임스는 바로 내게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쏘아붙였다너 취미는 뭐니너는 산이 좋냐강이 좋냐대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등등한국어로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제임스는 무슨 핑퐁게임이라도 하는 양 내가 답을 하자마자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강의실의 모든 시선은 내게 쏠려있었다언제나 비극적 결말은 파국으로 치닫는 법결국내 차례에서 막히고야 말았다어느 분야에 취업하고 싶냐 는 질문이었다....거리는 나를 향해 제임스는 말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여러분술 냄새 풍기면서 수업에 들어오는 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 계십니다.라는 득의양양한 미소였다그 때였다유리가 유창한 발음으로 조용히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James! we don’t study about that question yet.”
순간 강의실 안 사람들은 맞아제임스 아직 진도 안 나갔어라며 웅성댔다제임스는 당황했다그리고는 그동안 배운 게 얼만데 응용을 하지 못하냐며 앵무새 같이 외우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상황을 수습하려 들었다우리는 우리 수준을 잘 안다외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얼어 죽을 응용 같은 소리냐비난의 화살이 제임스에게로 쏠렸다전세는 역전 되었다당황한 제임스가 응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답시고 앵무새 흉내까지 내보인 게 패착이었다쯧쯧새빨개진 얼굴로 이리저리 용쓰는 제임스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어쨌든 그렇게 유리는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스카이라운지여서 그런지 한 눈에 한강이 다 들어왔다그 큰 다리와 건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었다내가 어떤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했다강의 첫 날제임스의 무시무시함을 깨달은 우리는 서로 핸드폰번호를 교환하며 의기투합했다.한 동안은 사무적인 대화들만 오고갔다숙제는 어디냐복습은 했느냐토스신청마감이 내일이다늦지 말고 해라이런 내용이 주를 이뤘다그러던 중제임스 앵무새 사건이 있은 날 밤침대에 누워 유리에게 문자를 보냈다이미 핸드폰 단체 채팅방으로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고해바친 후였다.
잘 들어갔어오늘 고마웠어잘 자
평소와 차이가 없었지만 단어와 음절 사이사이마다 나의 사심은 듬뿍 담겨 있었다일 분도 안 되어 핸드폰의 액정이 유리의 답문으로 빛났다.
오빠제임스 너무 못됐어요오빠두 푹 쉬세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단체 채팅방에 유리의 답문을 복사해 붙여 넣었다반응은 폭발적이었다전부 이건 이미 다 넘어온 게임이라고 했다그래라고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여자애가 칼같이 답문하고 이모티콘까지 썼으면 이건 백퍼센트 넘어온 거야짜식공부하러 학원 보내놨더니 여자나 만나고 말이야사귀면 바로 소개해 달라새끼쳐라아우성들이었다아직 잘 몰라나 잔다.센 척하고는 대화창을 껐다.
그 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메신저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문답을 외워야할 20분동안 킬킬대기 바빴다제임스는 이런 우리를 무시했다질문조차 하지 않았다유리와 나 둘 뿐만아니라 전체적인 수업 분위기는 처음과 다르게 흐트러져만 갔다채팅방에서는 대화를 주도하고 적극적이었지만이상하게 유리 앞에서는 괜스레 머쓱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기가 일쑤였다유리도 눈치 챈 듯했다그럴 때마다 빙그레 웃어넘기는 그녀의 배려심이 빛을 발했다종강 날도 그랬다수업이 끝난 후제임스가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꺼지라는 눈빛으로 수강생들 전부를 쳐다보았다학생들은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짐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나도 그 중 하나였다유리에게 뭔가 후일을 기약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앞섰다오빠가요라는 유리의 말에 응선약이 있어먼저 갈게라고는 황급히 교실을 떠나 버렸다선약이 있기는백수에겐 약속마저 사치인 것을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후회막급이었다나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랐다한밤중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고 마음은 후회로만 가득 찼다그 때였다.
오빠자요?-
유리의 문자였다만세 삼창을 지를 뻔한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경건한 마음으로 꾹꾹 자판을 눌렀다.
아니안자너는 뭐해?-

그렇게 문자가 이어졌고만날 약속을 했다그리고 만났다어디 가고 싶어라는 물음에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이 씨푸드 뷔페로 안내했다. 20층이 넘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지럽지도 않은지 열심히 움직이며 음식들을 자기들의 테이블로 날랐다유리는 아까부터 내내 싱글벙글 이었다예전부터 오고 싶은 곳이었다고 했다유리가 먼저 일어나 뷔페로 향했다하얀 접시를 들고는 천천히 사람들의 행렬에 몸을 실었다돌잔치나 결혼식 같은 경사스런 행사에 참석했을 때 말고 뷔페는 처음이었다아 맞다시장 끄트머리 과일가게 황씨 아저씨 아들이 사시에 합격해서 부른 출장뷔페도 있었지아무튼 얼떨결에 동그랗고 흰 접시를 들고 나도 음식 앞에 섰다유리는 벌써 저만치 앞에 가 있었다처음 보는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앞사람과 뒷사람의 템포에 맞춰서 내가 원하는 음식을 집어 올리는 것이 간단한 작업이 내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