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철_있지만 없는 듯

2016.05.27 발행

있지만 없는 듯
– <2015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151218-160214, 부산시립미술관)

 신용철 (민주공원 큐레이터)

필자주) 아래의 글은 송진희 작가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송진희 작가는 지난해 완월동을 만나고 듣고 만진 이야기들을 여름부터 꼬박꼬박 여섯 통의 편지에 담아 보냈다. 편지글 줄마다 완월동과 완월동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한 땀 한 땀 걸려 있었다. 여섯 통의 편지 끝에 나는 답신 하나를 보내었다. 송진희 작가가 보낸 편지들, 나와 같은 이들이 보낸 답신들이 모여 <2015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전시에서 송진희 작가의 프로젝트 한 켠에 앉았다.

‘있지만 없는 듯’ 여겨지는 곳과 때를 네 편지가 불러내었어. 그래 ‘너’라고 할께. ‘당신’이라는 말은 활자로만 있고 입에서 굴러다니는 말 같진 않아. ‘당신’과 ‘너’ 사이엔 글말과 입말 사이의 거리만큼 거리가 느껴져. 너를 만났을 때 ‘너’라고 부르진 않겠지만, 편지글을 타고 있는 동안은 ‘당신’을 ‘너’라고 불러야 있지만 없던 곳과 때를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아. 그곳은 늘 소문 속에서 살고 있었어. 소년들의 귀와 귀 사이에서 살고 있었지. 귀와 귀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의 입을 찾았을 때, 그 소년은 이미 학교에 있지 않았어. 그 소년에 대한 소문이 무럭무럭 자라 우거졌어. 소문의 귀가 자라난 나무가 발가벗을 즈음에 다시 그 소년이 나타났어.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었어. 아줌마 파마를 한 머리, 검고 굵은 팔뚝, 담배를 꼬나문 그의 손은 이미 소년의 것이 아니었어.

태평양에서 고기를 잡다가 왔다고 했어. 그의 앞에서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는 나는 선원의 아들이 된 것 같았어. 참치를 잡다가 어쩌다 그물에 고등어가 잡혀 올라오면 고등어로 야구를 한다고 했어. 고등어는 늘 먹던 생선이야. 참치는 있지만 우리들 밥상엔 없는 생선이야. 고등어로 야구를 한다는 그의 검은 팔뚝이 참치의 살갗처럼 튼실해 보였어. 술집 모퉁이에서 잠깐 눈을 굴리더니 제 품에서 살짝 반짝이는 금덩이를 보여주었어. 그것을 ‘금괴’ 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 그건 무시무시한 말이야. 금괴는 밀수란 말과 붙어서 살아. 그의 품 안에서 금괴는 ‘챙’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의 눈매는 밀수범의 눈처럼 고요히 번뜩이고 있었어.

완월동에 머물고 있다고 했어. 소문의 입이었던 소년은 이제 완월동에 머무는 선원이 된 것이야. 참치배가 항구로 돌아오면 참치궤짝을 하나 짊어지고 완월동에 들어가서 며칠을 살다가 나온다고 했어. 나는 통조림 속에 있는 살조각으로만 참치를 보았기 때문인지 참치의 몸매가 무척 궁금해졌어. 그래서 참치 잡는 얘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선원이 된 소년은 고등어로 야구를 하는 얘기만 자꾸 하는 거야. 술이 너무 취해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런 것인지, 참치를 잡진 않고 진짜 고등어로 야구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

‘도화 가라오케’에 가자고 했어. 참치 잡은 얘기나 고등어로 야구를 한 얘기가 지겨워 질 즈음이었어. ‘가라오케’가 뭔지 몰랐어. 술을 마시면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곳이라고 했어. 요즘 같으면 노래방 같은 곳이지. ‘복숭아꽃 가라오케’에 가면 여자인데 남자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어. 소문의 입이 내 귀를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더군. 선원이 되어 참치를 잡다가 고등어로 야구를 하기도 하며 지금은 완월동에서 참치 한 궤짝만큼을 살고 있는 소년과 함께 택시를 타고 완월동 입구에 있는 ‘도화 가라오케’에 갔어. 그곳은 정말 술을 마시며 노래를 하는 곳이었어. 둥근 테이블 안에 있는 복숭아꽃 누나들은 손님들의 노래테잎을 틀기도 하고 탬버린을 차랑차랑 치기도 했어. 머리가 길고 담배를 멋지게 꼬나문 누나가 우리에게 왔어. 근데 목소리는 나보다도 훨씬 굵었어. 변성기 지난 지 오래된 목소리였어. ‘여자’라기 보다는 ‘여장’이었어. 검고 짙은 눈그림자(아이쉐도우), 두터운 입술을 가린 새빨간 립스틱, 반짝이 원피스를 걸친 복숭아꽃 누나들이 뱉어내는 굵은 남자목소리가 왠지 퇴폐하면서도 슬펐어. 그 느낌이 싫지 않았어.

소문의 입이었던 소년은 다시 선원이 되어 완월동 안으로 들어갔어. 선원이 되었던 소년은 그 이후로도 가끔 문득 어느 날 느닷없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나곤 했지만, 더 이상 참치 잡는 얘기나 고등어로 야구를 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어. 더 이상 금괴밀수범의 눈으로 씨익 웃으며 금덩이를 챙 하고 보여주지도 않았어. ‘도화 가라오케’에 가서 복숭아꽃 누나들을 만날 일도 없었어. 선원이 되었던 소년은 다시 먼 바다를 간다고 했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 영도를 오고가는 도선 선착장에서 나는 술을 토했어. 물밑에 고등어들이 참치처럼 보였어.

오래된 얘기야. 난 완월동 언저리에 가본 것일 뿐이야. 완월동은 ‘있지만 없는 듯 여겨지는 곳’이야.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안다고 얘기하지 않는 곳이지. 귀 속을 떠돌고 있을 뿐 제 입길을 찾지 못한 것이지.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하겠어. 귀를 담그고 들어 봐야 하겠어. 입들이 내는 소리들을 귀로 만져 봐야 하겠어. ‘있지만 없는 듯 여겨지던’ 목소리들의 다른 목소리가 들릴 거야. 손을 뻗어 입들을 길어 올려. 세상은 입들의 입길에 올라 입방아를 찧어야 해. 비로소 세상은 제 꼴을 낯설게 드러낼 거야. 이제 우린 그걸 알아차려야 해.

여름부터 받던 첫 편지가 여섯 번째 편지가 되는 동안 겨울이 되었어. 이제야 답글을 보내어서 미안해. 내 목소리를 들려줄만한 곳과 때를 마련하기 힘들었어. 이제껏 기다려줘서 고마워. 가끔 문득 때로는 느닷없이 ‘고요히 퇴폐’하길 바래!

2015년 12월 14일 새벽
신 용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