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국_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들

2016년 9월 29일 발행

“모든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말을 갖고 있다. 분명히 목소리는 고통과 쾌감을 표시하는 수단이다. 또한, 목소리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주어져 있다. 다른 동물들의 본성은 고통과 쾌감의 감정을 소유하고 서로 이러한 감정을 표시하는 데까지만 미친다. 하지만 말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명시하고, 따라서 정당한 것(le juste)과 부당한 것(l’injuste)을 명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른 동물들과 관련해 볼 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인간만이 좋음과 나쁨, 정당함과 부당함의 감정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의 공유가 바로 가족과 국가를 만든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1권,  1253a 9-18.

“당신은 말을 가지셨습니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명시하는 말. 인간은 모두 말을 가졌는가? 너도 그 말을 가지고 있는가? 불행히도 태어날 때부터 말의 소유자는 정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유인 남성’일 뿐이었다. 그들만이 로고스의 소유자이며, 정치적 인간이었다. 여성은, 어린이는, 노예는, 외국인은 말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말을 충만히 소유한 자가 내뱉는 ‘발화 수반 행위문’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귀가 열려 있을 뿐이었다. 말이 명시한다(manifeste)면 목소리는 표시한다(indique). 말을 충만히 소유한 자는 판단하고 기준을 세우고 체계를 만들어간다. 목소리만 가진 그들은 고통과 쾌감의 응어리를 표시하며 존재감만 드러낸다. 그들은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역사 속에서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정주(定住)의 역사가 쌓아 올린 신화의 뒷받침에 힘입어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도 없이 영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들은 여전히 ‘여성’이며, ‘노예’이며, ‘외국인’이며, ‘어린이’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권리를 억압당하는 여자, 자본주의 시스템의 희생 제물이 된 노동자(노예), 내전의 폭력과 신자유주의 폭풍 속에서 난파선을 타고 떠도는 난민(약소국 외국인), 그들 모두는 결과적으로 미성숙한 사회적 어린이. 에티엔 드 라 보에티의 그 유명한 ‘자발적 복종’이 늘 그들에게 강요된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칭찬하지만, 악동은 꾸짖고 혐오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칭찬하는가! 누가 악동을 꾸짖는가!

1963년 마르셀 뒤샹이 패서디나 미술관에서 (평소 가장 좋아하던 게임) 체스를 두고 있다. 이겼는지 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왜 여성은 벗고 체스를 둬야 하는가.

여성 품평회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도) 여성은 완전히 가려야하고, 완전히 벗어야한다. 얼굴과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려야하고(이슬람교도 여성의 차도르), 만인을 위해서 부끄러움 없이 벗어야한다(미인대회, 걸그룹 아이돌). 매일 미디어의 기상캐스터는 딱 달라붙는 옷으로 자신의 몸매를 가리며 보여 줘야하고, 뉴스의 여성 앵커는 옆의 나이 든 남성 앵커보다 젊어야하며, 걸그룹 아이돌은 하이힐을 신고도 운동선수처럼 춤을 춰야한다.
그녀의 가슴은 찬양의 대상이며, 엉덩이와 허리는 섹시함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몸은 마치 상품인 듯 화려한 포장지로 가려있어야 한다. 여성은 현재도 여전히 물적 재화인 것이다. 매일 매번 그녀는 품평회의 대상이 되고 그녀가 모르는 사이 무언의 점수는 매겨진다. 그 품평회의 낮은 점수는 여성 혐오로 직결된다. 여성의 재화적 속성이 변질되면 여성 혐오는 일어난다. 품평회에서 늙음, 비만, 못생긴 얼굴은 재화적 속성의 변질이다. 하지만 젊고, 균형 있는 신체에, 예쁜 얼굴을 가졌다고 다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똑똑하고, 행동력이 있으면 낮은 가치로 매겨진다. 고정된 사회적 신화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가치를 매긴다. 그 사회적 신화들은 너무나 촘촘하고 엄격하며, 그 기준은 부당하다. 그리고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죄목이 내려지고 혐오라는 형을 치러야한다. 늙어서, 못생겨서, 옷 못 입어서,  뚱뚱해서, 똑똑해서, 말 잘해서, 고학력이어서, 너무 나대서…… ‘여성’, 여성이기에 혐오한다.

쿠엔틴 마세이스, <추한 공작부인 (The Ugly Duchess)>, 1525-1530, 나무 위에 유채, 64 x 45.5 cm.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가 말을 할 때 열리는 피의 잔치

적어도 정주한 이후부터 인간사회에서는 남성적 속성이 여성적 속성보다 늘 높은 가치를 부여받았다. 이것은 이상한 젠더의 경주이다. 이 경주의 규칙대로라면 여성 주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우승권 안에 진입하기 어렵다. 여성은 어느 순간 이 경주의 규칙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규칙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 대신에 세례받지 못한 말을 시작했다. 로고스이며 정치적인 그 말. 그로 인해 20세기 초만 해도 여성이 투표권 없는 것을 당연시했던 흐름이 21세기에 들어서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여성의 참정권이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1948년 제정 헌법에서 여성 참정권을 제도적으로 부여했다.) 여권 신장의 변화 속도는 굉장하여 이제 정치적으로 평등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2015년 캐나다의 새 내각에서는 남성 15명, 여성 15명으로 사상 처음 남녀동수의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말을 충만히 소유한 자들이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의 말을 가만둘 리가 없다. 그들은 사회의 신화들을 폐기하려는 여성의 말을 단죄하고 억압하려한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터져 나오는 여성의 말을 막기 위해 여성 혐오라는 이름의 피의 잔치가 진행 중이다. 한국 여성에게는 언제든 유죄로 채울 수 있는 혐오의 수갑들, ‘김치녀’, ‘된장녀’, ‘개똥녀’, ‘루저녀’, ‘김여사’, ‘엘프녀’, ‘개념녀’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언제 일어날지 모를 피의 응징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현재’의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혹시 실패한 사회구조가 낳은 헬조선의 분노가 사회적 신화들에 의해 지금까지 물적 재화로 오해된 여성, 육체적 약자인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낳은 성과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이 누렸던 사회적 기득권을 빼앗아 간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 단순하게 재단할 수 없지만, 포용할만한 여유를 상실한 시대를 사는 것만은 확실하다. 말을 충만히 소유한 자가 벌이는 피의 잔치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난민, ‘혐오’스러운 ‘외계인’
외계 비행물체가 남아공화국 상공에 출몰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곳에 떠 있기만 한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 몇 개월 후 비행물체의 안을 탐사하고, 그곳에 수많은 외계인이 비행물체의 고장으로 몇 개월 동안 갇혀 병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에 인도적 차원에서 외계인들이 거주할 지역을 마련해준다. 그곳이 ‘9’라는 구역이다. 2009년 개봉한 영화 <디스트릭트 9(District 9)>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월이 흐른 후 9구역은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정부는 반강제적으로 외계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 시키는 정책을 실행한다.

혐오에 밑줄 긋고 있는 차가운 시선
<디스트릭트 9>의 내면에 흐르는 차별과 혐오는 인종의 문제, 계급의 문제, 외모의 문제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외계인들이 남아공화국에 불시착한 외계 난민임을 생각할 때, 현재의 난민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전 세계 난민은 6,530만 명(2015년 말)으로 이는 사상 최고치다(유엔난민기구의 난민 보고서). 그들 중 지난해 부유한 6개 나라(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수용한 난민은 210만 명으로 전 세계 난민의 약 8.9%에 불과하다(국제구호단체 옥스팜 보고). 특히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는 EU에 난민이 많은데, 난민이 급증하면서 유럽 각국은 그들을 ‘골치 아픈 문제’로 여기기 시작했다. 최근 영국이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중요 이유도 난민(이주민) 유입을 막기 위한 것이며,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이주민의 테러가 거듭 발생하면서 이주민, 특히 난민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하다. 헝가리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난민을 “독(毒)”이라고 표현할 정도까지 이른 것이다(2016.7.26). 시리아 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던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가 터키의 보드룸 해변 모래밭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 당시 전 세계는 울었고 유럽 국가들은 난민에게 문호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난민문제가 정치·경제 지형을 흔들자 그들은 난민에게 혐오의 시선을 내비치고 있다.

난민 혐오, 약소국의 이주민에 대한 혐오의 확장판
유럽이 난민문제로 진통을 겪는 것을 우리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거나 그들을 삿대질할 입장은 아닌 듯하다. 국내로 유입되는 난민은 국제정세의 불안으로 급증하고 있는 데 반해, 그에 대한 법적·정서적 수준은 낮아서 난민문제의 폭발 발화점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7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해 아시아의 난민정책 선도국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세계적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실행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난민이 되는 것은 일류기업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1994년 1월부터 우리나라는 난민 신청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2015년 4월까지 난민 신청자는 17,523명에 이르지만, 난민의 지위를 얻은 사람은 592명뿐이다(2016.6.20. 법무부 발표). 전체 신청자의 3.38%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난민인정률 평균이 21.8%인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난민인정률이 이렇게 낮은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부분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근현대까지 단일민족을 숭상하며 약소국의 외국인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정서가 여전히 우리 내면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난민을 단순히 ‘고국의 위험을 피해 탈출한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일반인은 난민문제가 자신의 삶과 거의 관계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소극적 의미에서 집단적 망명자를 난민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사실상 약소국의 이주민과 난민은 행동의 집단성에 차이가 있을 뿐 거시적 차원에서 내적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박해나 생활의 곤궁함을 피해 고국을 떠나온 사람을 난민으로 본다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새터민(탈북 이주민), 조선족 이주민, 결혼 이주여성, 동남아 이주민 등은 자국의 여러 어려움,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해 국내로 들어왔다는 측면에서 유사 난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들, 약소국 이주민을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이들도 자신들을 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보수적 정서는 난민이나 다문화나 심리적 거리가 유사한 듯하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약소국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상황에서 난민문제의 대폭발을 일으킬 잠재적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보수적 한국인이 난민을 대하는 태도는 약소국의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보다 더 온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민 유입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분명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복지를 가로채고, 세금을 늘린다고 비난할 것이다. 약소국 이주민에게 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난파된 뗏목에서 흔드는 구조의 손짓
난민이든 약소국 이주민이든 그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불행히도 그들은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들이다. 여성은 어떠한가? 여권 신장이 진일보했지만 여성은 여전히 말의 소유자가 아니다. 말을 충만히 소유한 자는 난민과 이주민, 여성을 미성숙한 분별력을 가진 어린이로, 순종을 미덕으로 치는 노예(노동자)로 볼 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폴리스의 유령은 현재도 우리의 주변을 떠돌며 귓속말을 속삭인다. 인간은 오직 ‘자유인 남성’일 뿐이라고. 여성, 외국인, 노예, 어린이는 로고스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을 세례받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난파선을 타고 있다. 그들은 수평선 너머로 아른거리는 구조의 희망을 향해 쉼 없이 손을 흔들고 있다. 과연 말을 충만히 가진 자가 거대한 자신의 배에 그들을 태워줄 것인가? 난파선에 탄 자들을 해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답변은 부정적이다.

메두사의 뗏목 … 그리고 구조(救助)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걸 결국 꾸며낼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멀리서 아른거렸다.
마지막으로 눈뜨는,
점점 더 커지는 힘이 향하는,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구호는
환상, 환각일 수 있었다.
구조는, 관객이 거주하는
이 세계와 동떨어진,
저 미래에 있었다. 
–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중에서

* 본 글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11호(혁신호; 2016. 9. 발행)의 “이미지와 정치”에 기고했던 글임을 밝힙니다. 이 글은 출판과정에서 편집되기 전의 기고 원글입니다. 발행된 『말과활』11호의 글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