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반장_나는 골목이다

2014.10.04 발행

여긴 금천구 시흥동예전엔 구로구였고 일명 달동네였다그리고 나는 골목이다내 나이는 거의 해방 이후부터 매겨지기 시작했다난 뇌가 없기에 기억력이 좀 짧지만,대신 의식으로 기억을 한다그리고 나름 능력도 좀 있다사람의 의식을 좀 읽는다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는 면이 없진 않지만최소한 우리동네 사람들에 한하여라면 거의 정확하다라고 자신하며우리동네 사람들의 감정을 난 감응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얼마 전엔 동네 꼬마 중 한 놈과 유독 의식이 잘 통했다그 놈의 의식이 자연에 가까워 졌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좀 세밀히 말한다면인간과 자연의 교집합그 영역에 놈의 의식이 들어갔었던 덕이지 싶다그래서 유독 녀석과 의식이 잘 통했던 게지물론 녀석은 그런 사실을 잘 못 느꼈을 터이고 말이다.

이제 그 녀석을 통해 느꼈던 감정그에 대한 이야기를 썰어 보고자 한다.

내 영역은 그 녀석의 통학로와는 좀 동떨어진 골목이어서 원래 녀석이 잘 다니지 않던 길인데언젠가부터 녀석은 내 영역을 등하교 시간에 밟고 다니기 시작했고그 시점은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초록색 대문인 집에 녀석 또래의 여자아이를 포함한 식구가 이사를 와 살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

아닌가당체 기억이…….
맞을 거다.
어느 날인가 그 여자아이 뒤를 밟으며그 녀석과 그 녀석의 친구로 보이는 다른 동네 아이가 그 여자아이의 집을 확인하고 난 뒤 소곤거렸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네가 좋아해서 지금 미행을 한 거잖아!”
무슨 소리야난 너 잘되라고 도와주는 건데!”

그랬다그 날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에게 마음을 둔 두 녀석이 같이 미행을 해놓고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전가시키려던 대화내용으로 보아선 맞을 거다그 녀석은 그 여자아이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미 그 녀석 친구에 대하여 어드벤티지로 확보해 놓은 상태그 뒤로 녀석은 종종 집안 심부름을 할 때도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일부러 자신의 직선로를 무시해가며 이 골목을 지나다녔고그 때마다 빠짐없이 그 초록대문을 기웃거렸지그리고 어느 때인가부터는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을 가곤 했는데그 여자아이가 대문을 열고 나올 때 환하게 빛나던 녀석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하지만겨우 한 번그 뒤로 그 녀석의 장난질에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그 집 엄마혹은 할머니할아버지그리고 남동생과 아버지결국 녀석의 장난질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지하지만 녀석은 나름 질겼어이번엔 그 여자아이가 피아노학원과 주산학원을 다녀오는 시간에 맞춰 그 골목을 왔다갔다’ 하는 게야.

그러다 여자 아이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나면자신의 이미지를 그 여자아이에게 새겨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지.
당당한 걸음걸이도 보여주고재기를 동원해 재기차기를 해가며 그 여자아이의 곁을 지나가는 재간을 보여도 보고센치 있는 복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가다 그 여자아이와 눈을 그윽하게 마주치는 필살기를 선보이는 와중에 계절은 봄여름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네.

그 겨울 앞에서 이미 녀석과 여자아이는 통성명을 한 상태였지.

녀석이 작전을 쓴답시고 그 여자아이와 자주 어울리는 또 다른 여자아이를 공략해서 성공했거든그러니까 녀석이 보기에 좀 만만해 보이는 그런 애와 먼저 친해진 상태였기에 그 여자애와 통성명까지 튼 것이지그런데 그래봐야 녀석은 아직 가로등 불빛과 마주하고 초록대문 넘어 흘러나오는 피아노소리를 상대로 독백이나 하는 수준그 즈음 녀석은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돌리기를 했지당시 동네 형이 신문보급소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그 빽으로 딱 한 달만 돌리게 된 거야그때는 신문배달을 시작하기는 쉬워도 그만 두기가 어려워서 다들 쉽사리 도전을 안 하는 용돈벌이종목이었어신문배달을 하다 그만 둘 때에는 반드시 다른 배달원을 본인 대신 확보해야 그만 둘 수가 있었던 거지.
안 그러면 소장이나 총무에게 두둘겨 맞던 시절이야.
어라어디까지 썰었지맞아.

그 해 겨울은 눈이 몇 날 며칠씩 무척 많이도 왔어그런데 녀석은 신문배달이 끝나면 어린 손으로 잡은 빗자루로 내 영역을 열심히 쓸었어물론 청소의 시작은 초록대문 앞이었지연탄재도 유독 초록대문 앞에만 잘게아니 곱게 가루로 내어 뿌려놓고 말이지.
그때 땀을 훔치며 상기된 표정으로 초록대문 너머를 바라보던 녀석의 표정은 행복그 자체였지그날이 그 여자아이의 생일이란 건녀석이 곱게 포장한 선물상자를 들고 내 영역을 왔다리갔다리‘ 하며 프로포즈의 멘트를 중얼거리는 통에 알게 되었지.

생일 축하해내 마음을 담았어.”

하지만 그 선물은 결국 또 다른 여자아이의 품으로 들어갔지그 여자아이와 자주 어울리는 또 다른 여자아이라고 할 때의 그 또 다른 여자아이 말이야녀석은 그날 행복해 보이는 그 여자아이의 표정과 그 여자아이가 한 아름 안고도 남는 크기의 선물을 보았으며녀석의 눈에 가증스럽고 의시대기 좋아하는 녀석의 친구그러니까 다른 동네에 사는 놈을 같이 보게 된 것이지그 뒤로 보이는 또 다른 여자아이에게 녀석은 자신의 선물을 준 거야녀석의 친구가 준 것으로 보이는 선물에 훨씬 못 미치는 자신의 선물이 부끄러웠고그 여자아이의 행복한 표정과 잘 어울리는 녀석의 친구에게 분노를 느낀 것이지그 뒤로 녀석이 세상에 적응해 나가며 잃어가는 순수함 때문인지 난 녀석의 의식을 점점 읽을 수가 없게 되었고자연히 멀어졌다물론 녀석은 일부러 더 이상 이 영역으로 지나가지 않았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