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3 발행
19세기 말은 문학과 미술, 예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퇴폐와 탐미주의로 가득했다. 새천년이 도래한다는 것은 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과 허무함, 그리고 두려움을 수반했다. 때문에 당시의 세기말적인 분위기는 어떠한 목적도 도덕도 파기된 형태의 ‘예술을 위한 예술’, 즉 탐미주의가 절정을 이루는데 공헌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살로메>(1891)가 완성되었다.
본래 성서에 등장하는 살로메 신화는,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가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의붓 형제인 유다의 왕 헤롯과 결혼을 하면서 시작한다. 이를 크게 비난했던 세례자 요한에게 복수하고자 헤로디아는 살로메를 사주하여 결국 요한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헤롯 왕의 생일 날 살로메는 춤을 추고, 이에 매료된 헤롯 왕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속 여주인공 살로메는 관능적인 사랑과 집착으로, 요한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마치 18세기의 평론가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이 ‘예술이 순수한 미학의 길을 따른다면 곧 그것은 자극적이고, 소름 끼치는, 기묘한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이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랑은 본래 잔혹함을 동반한다.
그녀의 사랑을 거부했던 요한은 결국 목이 잘려 살로메의 품에 안기고, 잘린 요한의 목에 입 맞추는 장면은 여전히 탐미주의의 극치로 팜프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페라는 그런 살로메의 모습에 모멸감을 느낀 헤롯왕이 살로메를 처단하면서 비극적인 막을 내린다.
1905년 12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를 오페라화한 작품을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다. 원작의 탐미주의와 관음적인 시선, 집요한 욕망은 슈트라우스의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R.슈트라우스는 이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니체의 동명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교향곡으로 인해 그의 천재성은 익히 인정받고 있었다. 최초의 ‘철학의 음악화’라 불리는 이 작품은 니체의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한, 한편의 서사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OST로 R.슈트라우스의 바로 이 곡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역시 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동일한 주제의 작품 <살로메>(1905)를 완성하였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듯 보인다. 마치 아폴리네르의 시의 한 행의 잔혹하지만 익살스러운 톤을 그대로 형상화 하고 있는 듯.
“울지 말아요, 어릿광대여. 이 머리를 당신의 지팡이 대신 들고 춤을 추어요. … (중략)
… 내가 다리 각반을 떨어뜨릴 때까지”
피카소의 <살로메>는 가냘픈 다리를 높게 올려 춤추는 살로메와 쟁반 위에 올려진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뒤로 헤롯왕이 보인다. 힘없이 흔들리는 듯한 선은 데카당스적이면서 동시에 섬세함과 서정성이 가득하며, 이는 피카소가 청색시대에서 장밋빛시대로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때문에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초기 청년기 시절의 중요한 시절을 점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카당스와 퇴폐미,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탐미주의는 슐레겔이 언급한 예술에 대한 고뇌는 살로메 이야기를 통해 되살아나는 듯 보인다. 그것은 문학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무용과 연극, 오페라뿐 아니라 피카소 이전부터, 귀스타브 모로와 티치아노, 오딜롱 르동, 에드바르드 뭉크,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예술가들을 거쳐 영화의 영역까지, 예술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팜프파탈의 원형으로서 많은 모티프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