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_은밀한 시간속 아름다운 교감

2013.06.12 발행

 지하계단을 내려가면 마주하게 되는 시멘트로 둘러싸인 회색 벽, 그 안에 유독 더 하얗게 표백된 느낌의 백열등으로 무장한 그의 빨래방이 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일상과는 단절된 듯 한 이곳에서 작가와 관객의 일대일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것도 아주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오인환의 이 빨래방에 들어선 관객은 작가가 직접 세탁을 해주는 동안 그 고립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탁을 맡긴 옷은 꼭 본인이 들어올 때 입고 온 옷 중에 하나여야 하며, 무엇을 벗어 줄 것인지는 관객의 자유이다. 그리고 작가가 보는 앞에서 벗어줘야만 한다.(모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팬티까지 벗어준 사람도 있다더라.)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대장을 받은 ‘대한민국 성인 남성’만이 출입할 수 있다. 그는 참여자를 오직 ‘성인 남성’만으로 축소함으로서 ‘빨래’라는 행위가 암묵적으로 지니고 있는 ‘여성의 노동’이라는 가부장적 의식의 비판 문제에서 유연하게 벗어나 게이로 살고 있는 본인의 성정체성과 대한민국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호모포비아적 선입견에 대한 반문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세탁기가 움직이는 동안 하얗게 표백된, 그 좁은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밀폐된 공간과 성인 남성, (세탁을 위해 필수적인)탈의. 불온한 상상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삼박자이지만 행위의 증거물로 남아있는 사진들은 너무나 청결해서 결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빨래방의 백열등만큼이나 사무적이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추측도 할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추측이 가능한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작가와 참여자가 나눈 것은 오직 세탁만을 위한 ‘옷’ 뿐이었을까.

오인환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 》전시광경,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2002
이 작업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관객의 탈의가 필수적이며

옷은 방어수단이자 일종의 주도권으로 변용된다.

자신의 물건을 누군가에 내맡긴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크고 작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 접점에서 참여자의 불안함과 긴장되는 시간이 발생한다. <유실물 보관소>나 <우정의 물건들>과 같이 오인환의 작업은 항상 관객 참여적인 퍼포먼스로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관계로 영역을 확장한다. 대량생산된 공업품이자 개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이 물건들이 타인인 작가의 손에 의해 더러움을 씻겨내고 가지런히 정돈되어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이 사물을 통해 작가와 본래 주인 사이의 교차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옷을 ‘주도권’이라 했을 때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지배-피지배식의 위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음’으로서 보다 친근한 관계 형성의 매개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저 이곳의 이름이 ‘아름다운’ 빨래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퍼포먼스의 형식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관객을 작업의 일부로 치환시켜버리는 작가들의 전시들은 몹시 불쾌하다. 때때로 이들의 하느님 놀이에 놀아나는 듯 한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인환의 작업은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성격마저 마치 재료의 성질처럼 ‘이용’하려는 퍼포먼스가 아닌, 조심스럽게 사람과 사람간의 얽혀있는 매듭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관객을 ‘필요’로 하는 퍼포먼스이다.

그것도 너무 착하기만해서 지겨운 모습이 아닌 퍽 도도하고 새침한 형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