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_하드고어와 좀비, 공격본능의 배출구

2013.04.11 발행

하드고어와 좀비, 공격본능의 배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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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1959)를 기점으로 기존의 흡혈귀들은 특정 소수에서 무분별한 ‘전염’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삽입함으로서 집단성을 띄게 되고 폭력성으로 무장하였다. 이것은 곧 조지 로메로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본격적으로 ‘좀비’를 등장시켰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 돌아온다는 것, 집단으로 움직이며 잔인함과 폭력성을 두루 갖춘 좀비는 현재 영화,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활용되어 이제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한다기보다 오히려 가상세계에서 좀비를 ‘죽이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유희로서 소비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게임 속 ‘좀비 살해’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었다. 영화 역시 죽은 시체를 다시 죽인다는 명목 아래 부담 없이(?) 살해를 유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잔인함과 폭력성은 극에 달하였고 그 잔인함과 폭력성만 가지고 만들어진 상당수의 B급 영화를 넘어서서, 하드고어 영화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0. 사지 절단은 기본, 먹는 것은 옵션.

하드고어무비의 정석에는 케이크를 팔 등분 하듯 조각내는 신체 훼손의 욕구가 보란 듯이 실현된다. 이것이 이 둘의 공통분모이자 좀비와 분리 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드고어 무비는 ‘살해’라는 목적보다 ‘살해 방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주된 목적은 내용이 아니라 자극적인 장면일 경우가 많다.

마치 에로영화와 포르노의 차이처럼.

  이렇게 정서적으로 백해무익해 보이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하드고어 영화들은 수많은 질타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의 두터운 수요층을 가지고 있다. 그 세력이 음지에서 점차 넓혀지고 있는 가운데, 이를 단순히 ‘대리만족’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다. 조각난 신체에 대한 욕구, 육체 훼손이 정말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면, 다양한 콘텐츠에서 재생산되는 좀비에게 우리가 바라는 판타지는 무엇이 있을까.

0. 알량한 우월감

‘되살아난 시체’라는 인식에서 우리는 좀비의 살해에서 죄책감의 면죄부를 받는다. 죽어있었음으로 다시 죽이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일까? 좀비의 ‘되살아남’은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다른, ‘추하고 부패한 것’에 대한 경멸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좀비는 전 인류 어디에서도 생명존중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는 수많은 좀비를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웅이지 살인자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보호하고 대변해줄 사회가 없고 각 개체의 묶음으로서의 집단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여도 복수하러 올 공동체가 없다. 사회가 없다는 것은 이성이 없다는 것으로서 좀비는 그저 욕구만 있을 뿐인데, 우리는 게임 속에서 좀비를 죽일 때 혹은 영화 속에서 결국 주인공이 승리함을 볼 때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우월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 어떤 제재를 받지 않고 유일하게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이 허가된, 살인이 허용된 대상. 충분히 살해할 수 있는, 살해해도 되는 대상. 그것 자체가 우리가 좀비에게 요구하는 판타지일 것이다.

0. 태초부터 살인 행위는 ‘필요’했었다.

본래 공격본능이 본능이라는 말답게 진정한 ‘인간성’이라면 일찍이 프로이트가 <문명속의 불만>에서 말하였듯이 본능을 억압하고 감추어야 하는 문명인들, 즉 도덕과 이성으로 인해 본능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현대사회의 인류 전체는 히스테리에 걸려있다는 진단이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공격 본능이 외부 세계로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배출구가 필요하다. 대중매체가 욕망의 거울이라면 하드고어 무비는 공격본능의 무한 상상력을 영상으로 돌려내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3- 시체들의 날>, 조지로메로, 1985년 작.

0. 그러니 그대,

 죽어 마땅하다.

우리가 하드고어를 일반적인 취향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안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본능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 역시 오랜 세월 단련된 훈육의 결과로서 공든 탑이 무너질까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체훼손의 파괴본능이 다시 우리 눈에 들어 올 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본성이 이성과 도덕으로 만들어놓은 인간성의 탑에 부딪힐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불안을 일으키는 경험으로는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인데,

혹시 ‘별 볼일 없는 자기 자신과 마주했을 때’,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어두움’이 이성의 표면을 깨고 드러날 때,

또는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 너무나 막강할 때’

가 아니었는지?

나아가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으로 언젠간 늙고 썩어 없어질 육체의 비영원성에 대한 불안과,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 그리고 비이성에 대한 경멸로서 지식의 욕구가 무너졌을 때의 불안이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3- 시체들의 날>, 조지로메로, 1985년 작

좀비는 인간에게 가장 불안한 형태,

즉 죽어있고, 추악하며, 욕구와 본능 밖에 없는 모습으로

인간이 느끼는 모든 ‘불안의 형상화’이다.

이러한 불안을 내쫓는 방법으로는 역시, 좀비를 가장 ‘본능적인’ 방법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다. 이 얄팍한 우월감에 젖은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