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나영_동시대의 시대정신을 위하여: 강신대X홍태림 대담 리뷰

2017년 7월 30일 발행

벌써 대담을 한지 며칠이 지났고 곧 이 대담이 기억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일단은 거칠게 짧은 글로 이들의 대담을 갈음한다. 이 글은 7월 8일에 오뉴월 이주헌에서 있었던 강신대와 홍태림의 대담을 기반으로 한다. 대담 중에 홍태림은 강신대를 ‘파국러’로 조심스레 부르기도 했다. 이번 대담으로 작가 강신대가 어떻게 이해되고 그의 작업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있는지 알게 됐다. 강신대는 <#DMZ>(2015)[1]와 <0416 실시간>(2016-2017)[2]을 ‘해시태그 시리즈’라고 부른다. 그 중 <0416 실시간>의 최초 리서치를 도왔던 나는 청중과 강신대의 작업 속 협업자, 그 사이에 있는 애매한 공간에 나를 위치시키고 대담에 참여했다. 강신대와 작업을 하면서 혹시나 했던 우려가 대담에서 역시나가 되었던 순간이 있었다. 이 글은 협업자와 청중이라는 이중적인 위치에서 대담에 참여하며 떠올랐던 것들을 말하고 그곳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강신대의 작업에 대한 몇 가지를 정리하는 글이 될 것이다.

대담에서 홍태림이 강신대를 ‘파국러’라고 불렀듯이 지금까지 강신대의 작업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파국’에 대한 묘사이다. 2016년 여름에 합정지구에서 있었던 «컬랩스»라는 전시에서 강신대는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2016)[3]라는 작업을 내놓았다. 이 작업은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슬럼’이라고 부르는 곳을 리서치해 나온 이미지들을 병치하고 혼합하여 만든 영상으로 15초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다. 15초 뒤에 재생되는 아까와 같은 사운드와 영상은 관객을 멍하게 붙잡아 두려는 것만 같다. 반복되는 영상과 그 앞에 ‘놓여진’ 관객으로 우리가 파국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어떤 식으로 소비하고 ‘대처’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찌보면 강신대의 작업은 파국에 대해 작가 스스로 윤리적인 젠체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래서 이제 다 망한다는 건가, 하는 의문까지도 들게 한다. 그러나 강신대의 작업을 보기 위해선 최근 파국적인 재난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상상에서만 존재하던 붕괴와 침몰을 라이브로, 스펙타클한 드라마나 영화처럼 ‘시청’할 수 있었던 911테러, 동일본대지진, 세월호 참사와 같은 테러나 재난 이후 화이트 큐브 안에서는 파국을 재현해 모든 것을 일일이 기억해야 한다는 듯 광적으로 그것을 서사로 풀어내려 했다. 강신대가 <0416 실시간>을 전시했던 «사월의 동행»(경기도미술관, 2016) 과 가장 최근의 전시인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통의동 보안여관, 2017) 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은 촛불 이후 새로운 것을 꿈꾸는 한국사회에 대한 예술적인 성찰을 해냈다. 그러나 내가 그 전시에서 본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만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새로움이란 없다고 말하는 <0416 실시간>과 모든 작업들을 둘러보고 난 후 지하 맨 끝에서 유령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던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 – 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 Ver.)>(2016)[4]였다.

포스터 디자인: 이건정, 위의 포스터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프로그램 정보를 볼 수 있는 오뉴월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해시태그 시리즈’에서 강신대가 키워드를 모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이미지를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풀어냈던 것은 파국의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다른 작업들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재난과 파국을 떠올릴 때면 박살 나버린 도시, 불에 타고 있는 건물, 울고 있는 아이들,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국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파국에 관한 이미지는 되려 잘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0416 실시간>의 최초 리서치를 할 때 포털사이트에 파국에 관해 검색하면 해괴망측하고 맥락에도 없는 이미지가 툭 튀어 나오고 때로는 일본 그라비아 모델의 이미지가 파국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키워드 안에 숨어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상하지 못한 포털사이트 속의 이미지는 파국적인 현상에 관해 검색되고 생산된 것이다. 강신대는 이러한 이미지를 어떠한 연결고리도 만들지 않은 채 필터링 하지 않고 ‘해시태그 시리즈’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것이 강신대의 ‘해시태그 시리즈’의 핵심일 수 있다.  참사나 붕괴, 테러와 같은 현상을 기억할 때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강신대는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이미지를 화면에 올리고 그의 작업 앞에 있는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강신대의 이러한 작업은 최근 있었던 파국적 현상에 대한 서사적인 접근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강신대는 파국에 관련된 키워드를 서치했을 때 그 어떤 것도 관련없이 나오는 이미지, 하다못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행복한 여행을 기록한 이미지까지도 키워드 아래에 두고 거름망 없이 화면에 보여주면서 서사적인 구축을 끊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대의 작업 전반에 쓰이고 있는 리서치는 우리 또는 작가가 위치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리서치로 찾아낸 구체적 상황이 그야말로 적나라한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때 이 도구는 위험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강신대에게 리서치는 중요할 것이다.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사회 또는 작업 전반에 대한 파악을 리서치의 결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담에서 어느 청중은 강신대에게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크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강신대가 추상적인 주제를 위해 구체적이고 세밀한 리서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부르고 있던 인터내셔널가를 재해석할 때 만들어 낸 본격 ‘시대정신’ 밴드라는 수식어에 있을 것이다. ‘시대정신’, 그가 말하고 있는 동시대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IMF라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적인 통제를 받고 난 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정의되지 못하는 시간에서 살고 있다. 과거에는 분명 ‘518민주항쟁’이나 ‘6월항쟁’, ’87년노동자대투쟁’이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대로 부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더 이상 정치적 사건으로 시대를 구분할 수 없다. 얼마 전 크게 유행한 드라마 시리즈인 <응답하라 1997>부터 <응답하라 1988>까지와 연대기적 근-시대를 섞어내는, 80-90년대의 영상이나 사운드를 믹싱한 ‘베이퍼웨이브(vaporwave)’가 유행하는 것이 그것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retrospective(회고하는)’ 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레트로(retro) 상품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현재의 우리는 유행하고 있는 상품문화로 가까운 거리의 과거를 아련히 회고한다. 80-90년대의 문화를 재현하거나 차용하기 위해 그 당시에는 ‘힙’했을 법한 사운드와 이미지 또는 그 문화자체를 믹싱하여 뒤틀거나 편집하는 베이퍼웨이브는 사라진 현재성을 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과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계기’로 부르고 있는 ‘시간’과 현재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확실한 차이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라고 부르는 동(同)시대(contemporary)라는 시간성에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도 아닌 그 어떤 시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강신대는 시대정신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인용하며 ‘컨템포러리’라는 이름의 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 있는 시대정신은, 대담에서 강신대가 한 말을 빌리자면 “자연화 되지 않아야 할 시간이 자연화 되어버린” 지금 여기 이 시대의 정신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동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며 강신대의 작업이 된 컨템포러리의 시대정신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담에서 홍태림은 최근에 있었던 촛불집회가 어떤 의미였냐며 (사실 짓궂게도 이번에 있었던 촛불집회가 진보적인 것이었냐, 보수적인 것이었냐는 질문을 하였지만) 강신대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강신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피했다. 응답없음으로 응답을 대신한 강신대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촛불집회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말한 듯이 보였다.

나는 강신대가 생각하는 시대정신은 촛불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탄핵이라는 성과를 이뤄낸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신대가 촛불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이었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인 시간은 일종의 ‘계기’로써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우리가 유지하고 있던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기와 물 심지어 ‘국민’ 이라는 이름 아래 의무적이었던 의료보험까지, 우리 삶의 보편을 지원하고 보조하던 기관이 ‘정부’라는 이름에서 새로운 이름의 기업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뭔지 모를 찝찝함을 느끼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바삐 가던 길을 멈춰 민영화를 반대하는 서명을 하곤한다. 그럼에도 정부의 역할을 대신할 자리를 기업이 메우는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어느새 ‘포스코(POSCO)’라는 사기업이 되었고 과거에 하나의 정부 부처였던 곳들이 각각의 기업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 살고 있는 각각의 개인인 우리는 포터블한 기계의 부속품인냥 ‘스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스펙’을 쌓아 올리지만 역설적이게도 쌓아놓은 ‘스펙’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시장과 기업에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가 상상했던 자유와는 달리 우린 다시 일정한 관계로 구속된다. 강신대는 그저 ‘촛불집회’라는 단적인 현상보다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지금 여기’의 촛불집회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스펙’이 한 사람의 개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곳에서 각각의 개인을 하나로 호명할 계기를 만들어내려 했다. 아마 강신대는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진 사회, 그 바깥에 있는 새로운 촛불을 떠올렸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 있던 대담에서 홍태림과 강신대가 ‘정치’에 관해 논하며 생겼던 괴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서로 전제하고 있는 시간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담에서 홍태림은 자신을 ‘땜질러’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는 민중미술의 빈 공간을 채우고 ‘땜질’하는 것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이 사회를, 어느 책에서 인용하여 ‘분노사회’라고 칭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성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서 강신대와 홍태림이 말하는 ‘정치’에 괴리가 있음을 알았다. 강신대의 시간성은 일렬로 나열된 시간을 변화가 추동될 수 있는 계기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자연처럼 어느덧 일상이 된 시간을 다시 역사라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기 위한 강신대와 일렬로 나열된 시간 속에서 민중미술의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는 홍태림의 ‘시간성’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말하고 있는 ‘정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대담 중 홍태림이 촛불집회에 대한 강신대의 의견과 그의 작업적 정치성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들의 대화가 같은 언어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였다. 이들의 동상이몽은 연대기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교차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강신대는 ‘정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은 정치적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애매하다. <0416 실시간>에서 그는 적어도 한국사회의 모든 현상들을 망라한 키워드를 나열하고 자신의 작업으로 불러들였다. «사월의 동행»에서 영상작업과 함께 비치되어 있던 <0416 실시간> 핸드아웃(키워드)에서는 ‘보험광고’, ‘banality of evil’, ‘태풍 너구리’, 뿐만 아니라 ‘일밍아웃’이라는 키워드까지 있었다. 강신대는 자신의 현실정치적 위치(이를 테면 ‘당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설정하려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강신대는 ‘동시대’라는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재가 뒤섞여 어떤 것도 위치시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현상을 각각의 개인이 알면서도 모르게 생산해내고 있음을 밝히려 한다. 그리고 그 재난은 일상적인 행동과 함께 계속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작업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치적이지 않기에 정치적일 것이다.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리서치를 통해 하나의 키워드로 객관적이고 추상적으로 묶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신대가 ‘정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분류되고 있는 것은 강신대의 작업적인 실패를 말한다.

그러나 강신대의 가장 최근 작인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 – 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 Ver.)> 를 보면 이 실패는 사실 강신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전략인 듯 보인다. 작가의 작업 의도와 해석의 괴리를 강신대는 자신의 ‘코스프레’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업의 의도와 관객의 해석을 평행선에 위치시키고 자신의 작업이 관객에게 읽히고 소비되는 가능성, 그 사이를 노린다. 그렇기에 관객의 해석이 작업의도에 반(反)해 그것을 소비하든 작가의 의도를 작업에서 읽어내든 강신대의 작업은 ‘코스프레’를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도 비판적인 도구로써 작용한다. 강신대는 동시대라는 시간성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한 형식을 만들고 그 안에 동시대적 요소를 포함한 채 작업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 – 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 Ver.)>의 뮤직비디오와 음원이 작가의 유투브와 사운드클라우드를 비롯한 SNS에 배포되었을 때 한국에서 민중가요도 이렇게 ‘힙’할 수 있다며 강신대 작가의 팬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인터내셔널가를 재해석해 동시대의 어두운 표상을 말하고자 한 뮤직비디오임에도 ‘팬이 된’ 관객의 반응으로 코스프레의 효과를 반증했다. 강신대는 코스프레를 통해 ‘당신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로 퉁쳐지는 ‘정치적인’ 맥락과 상품의 순환주기가 시간성이 되어 더 이상 정의되지 않(못하)는 ‘미래’를 정의하기 위한 ‘정치적인’ 맥락 사이의 외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강신대는 이번 대담에서 자신이 작업하는 이유를 ‘인류애’라는 한 단어로 정의 했다. 새로 산 휴대폰의 할부가 끝나는 날, 언젠가 들었던 적금이 만기 되는 날, 대학을 가느라 은행에게 진 빚을 청산하는 날과 매번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유행이 오늘날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인 상황에서 그가 말하는 ‘인류애’는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를 재정립하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파국이라고 정의되고 분노와 애도만이 정답이 된 현실에서 강신대의 인류애는 우리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미래, 그 너머를 볼 수 있을 계기를 만들어 낼 원동력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가 대담에서 말했던 ‘인류애’는 ‘지금 여기’에 대한 비판적인 단어이다. 그리고 그는 이 단어를 통해 래디컬한 제안을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혐오, 애도, 분노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윤리적인 결과와 말들이 정답이 되고 있다. 아마 강신대는 물을 것 같다. 이것이 어떤 것도 위치시킬 수 없는 ‘지금 여기’를 말할 수 있는 적절한 것들이냐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가 대담에서 말했던 인류애는 우리의 ‘지금 여기’를 만들고 흡수하여 느낄 수조차 없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낯설게 보기 위한 그의 작업적 전제이다.
강신대는 동시대라는 시간성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위한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5년 주기의 인기투표 같은 선거를 기다리고 여전히 ‘스펙’을 쌓고 90년대의 패션이 다시 유행하는 잡지를 펄럭이면서 이 다음의 유행을 기대한다. 강신대는 그 어떤 의미도 사라진 일상적인 행동에서 실천의 계기를 뽑아내려 한다.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를 이용하고 새빨간 연막탄이 뿌옇게 퍼져 애석하게까지 들리는 인터내셔널가로 보여주듯 강신대는 끈질기게 동시대라는 시간성의 서사를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인간의 행동과 납작해진 시간이 시대정신이 된 동시대를 흔들어 깨우려 하는 강신대의 실천이다. 강신대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가 망해버렸다고 하는 현재에서 찾는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모든 시대는 다가올 시대를 꿈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면서 깨어나기를 조급히 기다리며 다가올 자신의 종말을 시대 내부에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퀴퀴한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동시대라는 시간에서 꿈꾸어야 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아마 강신대가 우리에게 지금까지 던졌던 질문일 것이다.

강신대와 홍태림은 대담에서 역사적 시간과 연대기적 시간의 교차를 보이며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기호가 되어버려 무의미해진 시간을 되살리기 위한 강신대와 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민중미술의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홍태림, 각자의 작업들은 결국 ‘미래’를 향해 있음은 틀림없다. 홍태림은 민중미술의 틈새를 ‘땜질’하며 시간 속에서 흩어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 놓으려 하며 강신대는 ‘동시대’라는 흐리멍덩한 시간을 살고 있음을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상기시킨다. 이들은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담은 그렇기에 중요했다. 강신대, 뿐만 아니라 홍태림 또한 우리가 어떤 곳에서 그리고 어떤 시간에서 살고 있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억을 충격이라고 말했다. 있어서는 안될 일, 해야하지만 하지 못한 일, 상상 그 너머에 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우리는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어떠한 사건이 기억되게 된다. 이들이 대담에서 논하고 지금까지 행해왔던 것들은 바로 이러한 기억을 위한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기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강신대와 홍태림이 함께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것이다. 좋았던 과거가 아니라 나쁜 현재에서부터 시작하자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이들의 대담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1]강신대, <#DMZ>, 2015, 사회적으로 생산된 이미지, 실시간 이미지 수집 알고리즘, 가변크기
테크니션: 김상훈
[2]강신대, <0416 실시간>, 2016-2017, 사회적으로 생산된 이미지, 실시간 이미지 수집 알고리즘, 가변크기
테크니션: 김상훈 / 도움주신 분들: 심이나영, 최지현
[3]강신대,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2016,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9분 55초
사운드: 해미 클레민세비츠 Rémi Klemensiewicz / 영상 디자인: 원준경
[4] 강신대,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 – 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 Ver.)>, 2016, 사운드, 싱글 채널 비디오, 3분 50초
음악 프로듀싱: 하즈 / 보컬: 펄펄
영상 디자인: 원준경 / 영상 촬영: 원준경, 최명성 / 출연: 백장미 / 촬영 스텝: 김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