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김동균 개인전 [천사-환상세계] 연작 [2]

2014.12.07 발행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
‘부정한 생활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4

김동균 개인전[천사-환상세계] 연작 / [2]

천사_뿔달린 소녀_기사_성자_마녀_기계발의 집사_고양이검사_거미벌레_동물들_괴물들

 참여작가: 김동균
장소: 아카이브 봄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93-1 나락실빌딩 4층)
전시일정: 2014. 12. 15 (월) – 2015. 1. 15 (목)
개막: 2014. 12. 15 (월) 오후 5시
관람시간: 화~일 오후 12시 –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무, 종종 운영시간 이후로도 열려있습니다.)
입장료: 1,000 원
주최: 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후원: 크리틱-칼, 김이박, 권기예, 우정다방, 홍준선
문의: 010-4199-1354 (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홍태림), 02-747-5679 (아카이브 봄 사무실)

안녕하세요. 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홍태림입니다. 2014년 ‘부정한 생활사 : 삶을 바라보는 로우판타지’의 네 번째 기획은 김동균의 개인전 [천사-환상세계] 연작 / [2] 입니다. 김동균의 작품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자족적인 실현욕구에 기인한 것입니다. 김동균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자족적인 실현욕구가 어떻게 타자와 유효하게 공유될 수 있는지도 함께 모색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앞서 서술된 자신의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2010년부터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가 김동균의 개인적인 성향, 천사-환상세계가 내포하는 환상의 맥락, 천사-환상세계와 감상자의 관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찰해본 것입니다.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이 앞으로 언급될 세 가지 범주가 어떻게 상호참조 되는지 고려해 보신다면, 김동균의 천사-환상세계 연작과 한결 가깝게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작가 개인의 성향에 대해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김동균의 개인적인 성향은 그의 완벽성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김동균의 완벽성에 대해서 논하려는 이유는, 그의 완벽성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가로지르는 맥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작가의 개인적인 성향이 작가의 작업과 연속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김동균의 완벽성은 그가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위해서 만든 소논문과 작업일지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동균의 소논문에는 그가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와 방법론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소논문이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위한 거시적인 설계도라면, 작업일지는 미시적인 설계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설계도는 만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만화가가 설정집을 제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김동균의 소논문과 작업일지는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지점을 보다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계획서들은 본인의 완벽성이 파생시킨 독립적인 결과물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김동균은 작품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완벽성을 드러냅니다. 예들 들어, 그는 평소에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계획된 일과표를 만들어서 자신의 하루를 일과표에 최대한 밀어 넣습니다. 여기서 제가 밀어 넣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일과표가 초등학생의 생활계획표처럼 개괄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세세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동균이 만드는 다양한 계획서들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치밀함에 대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생활과 작업을 규율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김동균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규율은 사회적으로 부과된 것이 아니므로 내부지향적인 규율입니다. 그리고 그의 완벽성은 이 내부지향적인 규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김동균의 완벽성은 배타적인 완벽성이라기보다 내부지향적인 완벽성에 가깝습니다. 그가 배타적인 완벽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의 규율에 부합하지 않는 타인을 교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지내온 김동균은 오히려 타인의 의견을 수렴해 자신의 규율을 수정할 여지를 가진 사람에 가까웠죠. 따라서 그의 완벽성은 내부지향성을 근간으로 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작업이 내포하는 환상의 정체에 대해

환상세계의 구축은 그것이 하나의 세계로 당당히 존립하기 위해서 실감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천사-환상세계 연작이 실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김동균의 환상에 기인한 도상들이 체계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축적은 천사, 성자, 기사, 거미벌레, 괴물, 뿔 달린 소녀 등의 범주를 통해서 전개됩니다. 환상세계를 구성하는 각 범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시장에서 김동균의 소논문을 진열하는 방식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환상의 세계가 어떠한 맥락으로 구성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환상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환상이고, 두 번째는 삶을 고양시키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환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각자의 고유한 삶입니다. 삶을 외면하는 환상은 삶의 밖에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배타적인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를 통해서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거나 훼손합니다. 이러한 예는 길거리에서 확성기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종교관에서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상-현실-실재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상은 꿈, 도덕, 신, 종교 같은 것들, 현실은, 돈, 정치, 과학, 사회, 일상 같은 것들, 실재는 자연, 약육강식, 죽음에 대한 불안, 허무함, 목적 없음 같은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현실과 현실의 그림자로 남아있는 실재, 현실의 주변을 위성처럼 맴도는 이상이 서로 뒤얽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라는 점에서 상호위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삶을 고양시키는 환상은 이상-현실-실재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동균이 추구하는 환상은 이 두 가지 맥락 중에 어느 것에 가까울까요? 그의 환상세계는 그가 자라면서 경험한 다양한 매체와 대상에서 영향을 받은 욕구가 형상화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동균이 천사-환상세계 연작에서 표현하는 인물들의 신체는 우리가 기성잡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델들의 신체로부터 재구성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작업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의상, 사물, 미지의 생물체 역시 그가 자라오면서 접해온 매체와 대상이 직조되어 도상으로 구체화 된 것이죠. 그래서 김동균이 건설하는 환상세계로 수렴되는 도상들은 기묘하고 낯설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적인 공유가 가능한 것은 김동균에게 축적된 경험과 우리의 경험이 삶이라는 범주 안에서 일부 교집합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환상세계가 현실과 이상 외의 실재를 담아내고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천사-환상세계 연작이 실재의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렴풋이 감지되지만, 그것이 정말 실재를 아우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환상세계가 더 많은 진전을 이루었을 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동균의 작업은 자칫 그가 현실에서 발췌한 아름다움을 주관적인 이상에 따라서 재배열하는 맥락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저의 경우 우리의 삶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 이상-현실-실재를 아우르는 예술에 좀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이상-현실-실재를 아우를 수 있는 예술에 더 의미를 두는 것은 그러한 예술이 이상과 현실을 가로질러 그림자로 남아 있는 실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술을 통해 실재를 환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 상태로 은폐되는 실재가 현실과 맞닿지 못하고 예술이라는 내부회로 안에만 맴돈다면 예술은 현실에 비해 좀 더 실재적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합하면, 김동균이 추구하는 환상은 이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서 이상과 현실, 실재가 상호보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삶을 고양시키는 환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김동균의 완벽성이 내부지향성을 중심으로 외부와 소통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환상세계가 실재를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 해서 삶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환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도대체 그는 왜 환상세계를 만들어야 했을까? 삶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자연, 약육강식, 죽음에 대한 불안, 허무함, 목적 없음 같은 실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온전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도 거추장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김동균의 환상세계가, 이상-현실-실재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는 온전한 삶을 모면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돌 그룹, 영화, TV, SNS, 애국심도 일종의 환상세계이며 온전한 삶에 대한 집단적인 방어기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재가 포함된 온전한 삶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김동균의 환상세계는 이 필연적인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서 구축된 그만의 임시거처가 아닐까요?

3. 작업과 감상자의 관계에 대해

김동균의 소논문을 살펴보면 그가 작품 활동을 통한 개인적인 실현욕구의 충족뿐만이 아니라 타자, 사회에 대해서 유효한 감동과 감응을 공유하고자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구체화한 부분이 바로 ‘왕따가 보았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그림’을 주제로 다루는 목차입니다. 그는 소논문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예시로 들며, 어떤 이미지를 다루든지 간에 이미지는 외부의 감상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가능성을 가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김동균은 자신의 작업에서 수렴되는 도상들이 비록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감상자에게 위로와 안도감을 부여할 가능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하는 ‘왕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왕따는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질서체계 안에서 구조적으로 재생산 되는 희생양입니다. 집단 안의 개인들이 정체성과 동질성을 공유하기 위해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때의 구조적 잔여물이지요. 예를 들어, 왕따를 만들어 내는 구조는 나치즘이 유대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통해서 독일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결집한 것과 유사합니다. 김동균은 소논문에서 배제된 이가 본인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이 고난과 번민을 잠시나마 잊고 덜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지향점은 최근 우리 사이에서 유행한 힐링문화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힐링문화를 통해 위로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그 문화가 우리를 기존의 구조 속에서 재배치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로를 받았을 때 기존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결함을 반복해서 망각하게 됩니다. 이 지향점은 역설적으로 배제된 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위로받음이 존재에 유효성을 부여할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천사-환상세계 연작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주된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꺼리’를 만드는 일이자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견주어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동균의 천사-환상세계 연작은 자족적인 열망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열망(passion)과 욕망(desire)은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강렬히 원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지점이 있지만, 강렬히 원하는 대상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구분됩니다. 열망은 강렬하게 원하는 대상이 그것을 갈구한 자의 내면에서 완결되기에 자족적입니다. 이와 반대로 욕망은 나 이외의 대상과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를 통해서 작동합니다. 사회를 통해서 욕망이 획일화되는 요즘 같은 현실에 개인이 자족적인 열망을 경험한다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개인들의 욕망이 획일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거꾸로 자족적인 열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저는 자족적인 열망을 보전하는 것 자체가 투쟁인 오늘날의 현실에서 김동균의 천사-환상세계 연작이 굳이 감상자와의 상호작용을 상투적으로 지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가 가진 특유의 내부지향적 완벽성과 자족적인 열망이 심화된다면 자연스러운 감상자와의 상호작용이 성립할 것입니다. 김동균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열망의 세계를 되뇌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현실이 여전히 ‘열망할 수 있는 곳’임을 확인함으로써 능동적인 안도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동균의 천사-환상세계 연작이 하나의 세계로써 실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리라 보여집니다. 실감 있는 가상의 세계를 개인이 구축해 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홀로 성을 쌓아 올리는 것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김동균의 고독하고 힘겨운 여정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엄숙하고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김동균의 천사-환상세계가 유효한 것은, 그가 작품 활동을 통해 현실에서 강요받는 억압을 넘어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소논문에 인용된 랭보의 “자신의 꿈에 왕관을 씌움으로써”라는 문장은 이를 적절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자신의 꿈에 왕관을 씌운다는 랭보의 표현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꿈에 왕관을 씌울 수 있을까요?

글 / 홍태림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편집 / 윤율리 (퍼블리싱팀 디렉터)

* 아래는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에 대한 설명입니다.

부정한 생활사 :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negative-undetermined history of the life : low fantasy that sees the life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의 제목은 ‘부정한 생활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입니다. 이번 주제기획에서 ‘부정한’은 어떤 가치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뜻의 부정否定과 특별한 가치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부정不定이 중첩된 단어입니다. 부정한 생활사는 주어진 질서체계의 경계선에서 틈새를 만드는 주체들의 삶의 운영방식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번 연간기획에서는 이와 같은 경계선에서 삶을 운영해나가는 몇 명의 시각예술 창작자들을 초대하고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번 연간기획은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삶의 운영방식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하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라는 부제를 설정했습니다. 삶은 생존과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의미를 지향하지만, 생존은 죽음을 배제하고 무의미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을 선택하는 순간에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주제기획에 초대된 시각예술 창작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러한 초-현실의 경계선에서 틈새를 만들거나, 탈주하는 부정 不定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초-현실 속에서 생존보다는 삶을 고민하는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활동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덧씌워진 생존의 굴레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현실의 포기한 부정 否定한 무엇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본 연간기획은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활동이 초-현실과 대면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로써 로우 판타지 Low Fantasy―마법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하이 판타지에 비해서 적으며, 현재 우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는 맥락을 내포한다고 가정하고, 이들의 활동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활동들을 헤아려보면서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초-현실인지 ‘판단중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