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최명숙, 오제성 2인전《운동X운동》

2014.04.01  발행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
부정한 생활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1

최명숙, 오제성 2인전
운동X운동

일정: 2014. 04. 10 – 05. 10 
오프닝: 2014. 04. 10 목 오후 6시
장소: 아카이브 봄_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 80-1 나락실 빌딩 4층 (110-360)
입장료: 1,000원
후원: 김이박(현영)
문의: 02-747-5679 (아카이브 봄 사무실), 010-4199-1354 (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홍태림)  http://www.bomm.kr/

안녕하세요. 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홍태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부정한 생활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의 첫 번째 순서인 최명숙, 오제성 작가의 2인전 《운동X운동》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최명숙, 오제성 작가를 이번 주제기획 시리즈에 초대하게 된 이유는 두 작가의 활동들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휘발되고 있는 실재감들을 붙잡는 고유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두 작가의 고유한 운동이 확연하게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맞물려서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두 작가의 상이한 운동이 서로의 움직임을 공유하는 잠재적인 궤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운동X운동》은 궤적이 다른 두 작가의 고유한 운동뿐만 아니라 두 운동이 마주하게 됨으로써 드러나는 잠재된 운동도 함께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최명숙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연작을 선보입니다. 첫 번째는 그녀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펜글씨와 다양한 도상들로 표현한 <755-850>(2012~2013) 연작이고, 두 번째는 취업용 자기소개서 양식에 최명숙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허구적인 이야기를 조합해서 펜글씨로 써내려간 <자소서>(2013~2014) 연작입니다. 두 가지 연작에서 보이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허망하게 망각하고 있었던 기억들을 되뇌게 만듭니다. 왜일까요? 그래서 저는 <755-850>연작과 <자소서>연작을 기억과 망각의 차원에서 헤아려보았습니다.

망각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기억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인지되는 반면에 망각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인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기억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도, 그렇다고 망각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기억과 망각이 서로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 과정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먹는 음식들을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봅시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식도를 통해서 위, 소장, 대장으로 이동하고 최종적으로 항문을 통해서 배설 됩니다. 여기서 위, 소장, 대장 같은 소화기관들은 우리가 먹음 음식을 자양분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저는 이 과정을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기억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은 위, 소장, 대장을 거치면서 잔여물이 항문을 통해서 배설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은 음식이 소화기관에 계속 남아 있다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가 활동하기 위한 자양분을 더 이상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섭취한 음식의 잔여물을 변으로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삶을 생기 있게 만듭니다. 여기서의 변의 배설은 바로 망각의 역할과 같습니다. 70여점에 이르는 최명숙 작가의 <755-850>연작은 그녀가 유년시절 고향에서 체험했던 사건들을 다시 기억해 내는 과정입니다.

최명숙, 자소서 연작 설치광경, 촬영 홍태림 ⓒ 최명숙; 홍태림; 문화아카이브 봄

 그런데 그녀가 왜 이제야 유년시절의 사건들을 다시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저도 제 유년기를 떠올려보면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그다지 없습니다. 물론 유년기의 기억이야 오래 된 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근래의 수많은 사건들조차도 온전하게 기억해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정보들을 통해서 사건들과 마주합니다. 그런데 정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선별되어 제공된 정보들을 통해서만 사건을 마주하고 그것을 사건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고유한 삶을 서서히 상실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을 심신(心身)의 자양분으로 체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체화시킬 틈도 없이 그저 허겁지겁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몸이 소화기관이 없이 식도와 항문이 직결되어 버린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식도와 항문의 직결은 단순히 육체적인 퇴화가 아니라 정신적인 퇴화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퇴화 된 상태를 식민화 된 심신이라고 부릅니다. 식민화된 심신으로는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자양분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식민화 된 심신으로 아무리 수많은 정보를 소비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삶을 호출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명숙 작가가 <755-850>연작을 그녀의 심신을 엄습하는 식민화에 대한 방어기제로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최명숙 작가는 <755-850>연작을 통해서 유년기에 고향에서 겪었던 사건들을 하나씩 현재의 지평 속에서 되새겨 나갑니다. 때문에 <755-850>연작은 그녀가 현재의 지평 속에서 상실해 가고 있는 실재감을 구체화시키는 고유한 운동입니다. 혹자는 <755-850>연작이 그녀의 개인적인 미시사(微時史)에 한정 된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명숙 작가는 <755-850>연작을 통해서 개인적인 미시사뿐만 아니라, 동시대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사건들을 함께 다루면서 미시사 속에서 보편사(普遍史)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자소서>연작은 그녀가 이미 <755-850>연작을 통해서 상실되었던 기억들을 현재의 지평에서 온전하게 감각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건강한 운동을 위한 자양분을 충분하게 얻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755-850>연작은 그녀의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 생기적인 망각의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최명숙 작가는 <자소서>시리즈는 통해서 현재의 지평에서 휘발되어가는 실재감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근 오제성 작가는 ‘너와 나의 코온템포오러리’라는 단초를 통해서 다양한 창작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코온템포오러리’는 동시대를 뜻하는 ‘컨템포러리’를―한 때 뉴스에서 ‘커피’를 ‘코오피’라고 표기했던 것처럼―장음표기 한 것 입니다. 저는 장음표기 된 컨템포러리를 보면서 단일한 장면을 가진 동시대성이 아닌 여러 가지 장면이 함께 펼쳐진 동시대성을 떠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장음표기 된 동시대성은 양 옆으로 늘어뜨려진 단어와 같아서 문자와 문자 사이에서 균열을 발생시키고, 이 틈 사이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동시대성들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코온템포오러리’라는 단어는 단일한 동시대성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 동시대성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규정된 가치들에 따라서 동일시 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계를 가진 주체들이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동시대는 개인들의 고유성을 발현시키기 보다는 이를 억압함으로써 일정하게 재단된 개인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보편적인 개인들은 점차 자신만의 고유성을 상실하게 되고 동시에 사람들 간의 생기적인 관계망들도 함께 찢겨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이 주체로서 거듭날 수 없는 동시대성은 디스토피아(dystopia) 세계관 맞닿아있습니다. 오제성 작가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암시하는 20세기 SF소설로 아서 C. 클라크의Arthur Charles Clarke 『유년기의 끝』(1953), 조지 오웰의George Orwell 『1984』(1949), 올더스 헉슬리의Aldous Huxley 『멋진 신세계』(1932)를 저에게 추천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1984』와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상이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기계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쾌락만을 수행하며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1984』는 인간이 초대국 오세아니아의 독재자 아래에서 쌍방향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을 통한 감시와 검열 그리고 극도로 단순화 시킨 언어체계를 통해서 인간의 사유를 제한하려고 한 ‘신어’(新語)같은 것들을 통해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오제성 작가의 <멋진 신세계>(2011~) 연작과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제성 작가의 <멋진 신세계>연작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공유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이미 읽어보셨거나 앞으로 읽어보실 계획이시라면 오제성 작가의 활동들을 헤아려나가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제성 작가의 <멋진 신세계>연작은 ‘너와 나의 코온템포오러리’의 방향성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멋진 신세계>연작은 오늘날의 동시대성, 즉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재감들이 휘발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헤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연작은 훈장(勳章)이라는 개념적인 도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훈장은 사회에서 기준을 생산하는 권위자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기여한 이에게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수여하는 것입니다. 훈장의 이러한 특성상 사회적인 권위가 없는 자들이 수여하는 훈장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기준을 생산하는 권위자들이 훈장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개인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훈장이 많이 남발 될수록 그 사회는 전체주의가 내재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우리는 왜 한 번도 합의해본 적 없는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려고 하며 또한 그 기준에 목숨도 바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반대로 우리는 왜 우리가 스스로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에는 소극적으로 되는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가 기준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면 타인에게 훈장을 받거나 수여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오제성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기준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되묻기 위해서 <멋진 신세계>의 훈장이라는 개념을 다양한 매체들과의 접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win! win!>(2014)은 훈장과 체스 게임을 접목한 작품입니다. <win! win!>은 특이하게도 모든 말이 3분짜리 모래시계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3분이 지나면 모든 말이 죽어버리게 되고 그 누구도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또한 체스판과 더불어 훈장들도 함께 진열되어 있는데, 이 훈장들은 체스게임에서 이긴 승자만이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이 게임에서 훈장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너를 기념>(2014)은 <win! win!>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훈장이 프린트 된 셔츠들의 팔소매가 꿰매진 상태로 원형 진열된 것입니다. 이처럼 꿰매진 상태로 원형 진열 된 셔츠들은 원형이라는 체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때문에 이 셔츠들을 우리가 입고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상황이 연출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를 기념>은 불가항력적인 체계가 덧씌워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국적과 가족, 모태신앙 같은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불가항력적인 가치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들은 우리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거듭날 때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너를 기념>에서 원형으로 진열 된 셔츠들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무엇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벗어던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제성 작가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동시에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갈지에 대해서 자신과 우리에게 꾸준하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칫 그 무거움으로 인하여 생길지도 모르는 심신의 내파를 본능적으로 유쾌하고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운동X운동》에 참여한 두 작가의 활동이 어떠한 궤적을 가지고 운동을 하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운동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서 휘발되는 실재감들을 붙잡기 모든 활동을 뜻합니다. 최명숙 작가의 운동은 기억과 망각을 통해서 식민화 된 심신을 탈주하는 것이라면, 오제성 작가의 운동은 획일화 된 동시대성 속에서 개인들의 고유한 삶이 발현되기를 응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궤적이 다른 두 운동은 서로가 마주침으로써 고유한 교집합을 생성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일상의 세계와 생활의 세계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일상의 세계는 획일화 되고 의미 없이 반복되는 세계라면―물론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세계에서도 절망을 순수하게 긍정하고 초극하는 의지가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의미를 상실한 세계를 대변하는 맥락으로 한정해서 바라보고자 합니다―생활의 세계는 끝없이 변화하며 실재감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우리의 삶은 획일화 되고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고 실재감 충만한 생활의 세계에서 존재 합니다. 따라서 《운동X운동》는 두 작가의 운동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우리가 호출해내야 할 생활의 세계를 발견하고 간직하는 역동적인 장이 될 것입니다.

홍태림 (문화아카이브 봄 시각예술팀 큐레이터)


* 아래는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에 대한 설명입니다.

부정한 생활사 :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Negative-Undetermined History of the Life : Low Fantasy that sees the Life

2014년 공간 봄 연간기획의 제목은 ‘부정한 생활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 입니다. 이번 주제기획에서 ‘부정한’은 어떤 가치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뜻의 부정否定과 특별한 가치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부정不定이 중첩된 단어입니다. 부정한 생활사는 주어진 질서체계의 경계선에서 틈새를 만드는 주체들의 삶의 운영방식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번 연간기획에서는 이와 같은 경계선에서 삶을 운영해나가는 몇 명의 시각예술 창작자들을 초대하고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번 연간기획은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삶의 운영방식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하여 ‘삶을 바라보는 로우 판타지’라는 부제를 설정했습니다. 삶은 생존과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의미를 지향하지만, 생존은 죽음을 배제하고 무의미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을 선택하는 순간에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주제기획에 초대된 시각예술 창작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러한 초-현실의 경계선에서 틈새를 만들거나, 탈주하는 부정 不定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초-현실 속에서 생존보다는 삶을 고민하는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활동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덧씌워진 생존의 굴레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현실의 포기한 부정 否定한 무엇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본 연간기획은 시각예술 창작자들의 활동이 초-현실과 대면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로써 로우 판타지 Low Fantasy―마법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하이 판타지에 비해서 적으며, 현재 우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는 맥락을 내포한다고 가정하고, 이들의 활동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활동들을 헤아려보면서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초-현실인지 ‘판단중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