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 DOPA의 두 번째 프로젝트《쿵,쾅,펑》리뷰

2014.03.26 발행

창신동 지역에서 망령처럼 존재하는 폐가의 망실된 기억들을 직접 경험하고 채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콜렉티브 도파(DOPA)가 근 일 년 만에 《쿵,쾅,펑》(2014)이라는 프로젝트로 다시 돌아왔다. 도파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폐가라는 비정형적의 현장에서 벌어졌다면 이번 두 번째 프로젝트는 전시장이라는 정형적인 공간에서 펼쳐진다. 따라서 우리는 도파가 첫 번째 프로젝트를 통해서 채집한 결과물들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방법론으로 재편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장기반 프로젝트가 전시장에서 재편될 때 취하는 일반적인 방법론은 결과물들을 맥락별로 분류 하고 나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도파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채집한 결과물들을 오락적인 매체들과 접목하여 유기적으로 재편하는 방법론 취함으로써, 여타의 현장기반 프로젝트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도파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나열식 방법론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 프로젝트를 통해서 채집한 결과물들에 대한 성급한 봉합보다는, 각 결과물들의 유기적인 재편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번 프로젝트의 가능성은 폐가를 떠돌던 망실된 기억들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대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망실된 기억들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대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쿵,쾅,펑》의 주제물인 창신동의 폐가는 세월을 거치면서 누적된 고유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폐가가 일본인이 건축한 집이었으며, 집 주인의 자살, 주택 소유권의 분할, 주택 관리인의 실성했었다는 일련의 기억들은 이 폐가가 다른 무엇으로 대체 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꼭 도파의 주제물이 된 폐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을 부대끼며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건축물들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기억들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건축물들은 인간의 삶을 아로새겨낸 외부기억장치들과 같다. 물론 건축물이 고유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적 불가침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건축물의 노후화에 따른 철거나 재건축은 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이 근시안적인 개발이익이나 사적 이해관계의 차원에서만 고려된다면 결국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삶의 토양은 망신창이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삶이 아로새겨진 하나의 건축물이 순리대로 사라지기 위해서는 그 건축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고유한 감각을 통해서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외부기억장치를 포맷하기에 앞서서 파일들을 PC로 다시 옮기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공적 대상의 상실에 대한 감각적인 수렴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경제적 논리 같은 결론적인 차원의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대면하는 모든 공적인 것들에 대한 상실은 안타까운 일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가항력적인 상실을 평생 동안 마주해야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실을 순리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은 결론적인 차원 보다는 각자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에서 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감각적인 차원이 고유성을 내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건을 통해서 느끼는 감각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예를 들면 내가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을 때 느끼는 고통이 다른 사람이 신경치료를 받았을 때 느낀 고통과 닮을 수는 있어도 같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각자의 고유한 감각을 통해서 수렴된 상실은 허무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이 온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이 충만할 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토양은 풍요로워진다. 때문에 우리가 공적 대상의 상실을 감각적인 차원으로 수렴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물론 우리가 다양한 사건과 마주함에 있어서 결론적인 차원의 해결을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삶의 토양을 풍요롭게 만드는 각 개인들의 고유한 감각을 놓쳐버린다면 결국 결론적인 차원의 해결점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결론적인 차원의 문제들도 결국은 삶의 토양 위에서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사용해야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도파는 폐가에서 채집한 결과물들을 유기적으로 재편함으로써 망실 된 폐가의 기억을 각자의 고유한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창신동의 위치한 낯선 폐가와 온전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도파가 《쿵,쾅,펑》에서 취하고 있는 방법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게임이라는 형식을 적극 활용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쿵,쾅,펑》 주제물인 폐가를 부담 없이 즐겁게 대면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신경체계를 자극하는 오락적인 요소들이 프로젝트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쿵,쾅,펑》프로젝트가 게임이라는 형식을 활용 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낙천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취감 보다는 좌절감을 더 많이 준다.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무수히 많이 죽어야 하고 무수히 많이 부활해야 한다. 또한 게임을 클리어 한다고 할지라도 그 끝에는 허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게임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끝에도 죽음이라는 허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오늘날을 기대감소의 시대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첨예한 문제들을 봉합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시대도 막을 내린지 오래다.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철저하게 절망을 향해서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절망을 외면한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절망을 순수하게 긍정함으로써 행복한 삶이라는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마치 게임을 클리어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필자는 앞서 도파가 폐가에서 채집한 결과물들을 서둘러 봉합하기 보다는 유기적으로 재편함으로써 드러나는 가능성, 즉 감각의 장을 만드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도파가 단독적으로 창신동 지역에서 망령이 된 폐가를 봉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건을 봉합하기 보다는 감각적인 차원을 통해서 사건을 삶의 토양 위로 끊임없이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파가 이번 《쿵,쾅,펑》프로젝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즐거운 놀이들은 어두운 절망 속에서 길을 밝히는 반딧불의 비행 궤적과 닮아 있다. 우리는 《쿵,쾅,펑》에서 점멸하는 빛의 잔영들을 통해서 망령처럼 떠돌던 창신동의 한 폐가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폐가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척박한 삶의 토양과 닮아 있다. 비록 이 마주함이 절망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을 지라도 도파의 손길을 통해서 드러난 이상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런 지점에서 필자는 도파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 홍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