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김선림 개인전 ‘光明未來_BRIGHT FUTURE’에 대한 짧은 메모

2015.06.13 발행

 

오늘 안국에 위치한 갤러리 이즈에서 김선림 작가의 <光明未來_BRIGHT FUTURE>를 보고 왔다. 전시장에서 나는 김선림 작가에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에 프린트하는 것이 물감을 쓰는 것보다 재료비가 덜 들어가느냐고 물어봤다. 내 질문에 김선림 작가는 컴퓨터 작업이 재료비나 노동 강도 측면에서 물감 작업과 별 차이가 없다고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나는 김선림 작가의 전시를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머릿속에 맴돌던 짧은 생각들을 휴대전화기 메모장에 적어봤다. 아래의 메모는 김선림 작가의 작품들 보고 나서 내 머릿속을 맴돌던 모호한 단상들의 스케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작품을 감상하고 내 머릿속에서 반작용적으로 튀어나온 것을 기록한 메모가 되었다. 차후에 김선림 작가와 함께 일을 도모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의 작품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되뇌어보고 싶다. 김선림 작가의 <光明未來_BRIGHT FUTURE>는 2015년 6월 15일까지 열린다.

메모_20150613_달리는 지하철 3호선에서

386세대와 X세대를 거쳐서 등장한 생물-청년세대(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 마이너스 방향의 삶을 내면화한)의 바탕에 깔린 보편적인 정서는 앞선 세대에 의해서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88만 원, 7포, 달관세대 등등) 되어왔다. 생물-청년은 앞선 세대의 다양한 호명 앞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 호명들을 명분 삼아 어긋난 현실 아래에 안주하기도 했다. 생물-청년 일부는 우리를 그렇게 납작한 존재로 쉽게 규정하지 말라고 항변했지만, 그러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넘어 세상 밖으로 유효하게 터져 나올 경로는 번번이 막혀있었다. 그래서 생물-청년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규정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혹여 생물-청년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규정할 언어를 손으로 거머쥔다 하더라도. 도대체가 그 언어로 베어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자신들을 규정할 언어에 대한 필요성을 포기한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을 야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생물-청년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갖은 구조가 어떠한 역사 속에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현재에 이르렀는지 사유하고 반성할 시간과 공간을 적절하게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생물-청년들에게는 현재가 과거와 단절된 상태로 갑자기 붕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붕괴의 맥락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더욱 큰 공포심과 체념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묵시록적 세대가 가진 마이너스 에너지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앞선 세대가 갖은 호명으로 채찍질하며 생물-청년들이 플러스적 에너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이중 억압이다. 오히려 생물-청년이 내포한 마이너스 에너지가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전복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러한 전복적 가능성만큼이나 절대 영점의 마이너스로 치달아 최소한의 인간성조차 망각한 세대가 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