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미래를 삼켜버린 좀비미학

2014.04.28 발행

4월 16일 진도군 해상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수학여행 길에 나섰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과실을 책임자들에게 문책하기에 앞서서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 부모님들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고통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구조작업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 된 제도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고, 희생자 가족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분노는 점점 커지고 있다. 세월호를 운영하는 청해진해운과 해운조합, 한국선급 그리고 정부기관인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의 이해관계와 안전불감증에 대한 문제는 철저하게 밝혀져야 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이미 다양한 매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 된 주요한 문제들은 본문에서 부연 설명할 생각은 없다. 대신 필자는 청년미술가로서 이번 세월호 참사의 배후인 기독교복음례회 지도자 겸 세모그룹 전 회장인 사진작가 유병언씨와 그의 아들인 조각가 유대근씨의 예술활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실과 닿아 있으려는 미(美)는(이하 현실-미)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유효하게 만드는 공동성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에 임하는 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다른 구성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발휘해야만 유효한 공동체로써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다른 구성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발휘하려는 사려심이 바로 공동성이다. 인간은 현실-미가 없이 공허한 양적 팽창만이 반복될수록 역설적으로 만족감이 줄어든다. 이때 인간은 히스테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히스테리는 결핍상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미가 부재한 과포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의 욕망이 한계효용에 봉착하면 자신의 히스테리를 무의식적으로 유예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타인과의 필연성이 부재한 괴상한 미(美)를 만들어낸다. 필자는 이를 좀비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데 왜 히스테리에 빠진 인간이 미적 가치를 찾게 될까. 우리는 20세기의 허무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삶 속에서 초월적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월적 가치가 있던 자리에 자본의 세례(洗禮)를 받은 인간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현재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돈과 성공, 웰빙을 절대적인 계율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과거의 종교들은 자본을 움켜잡고 생존하기 위한 장식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과거의 종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생존기계로 살다가 히스테리에 빠진 인간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을 조롱했다는 죄명으로 가파른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벌을 받은 시지프스Sisyphus처럼 우리도 허무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쟁취해 낼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우리가 허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쟁취하지 못하는 생존기계로 살다보면 스스로 자신과 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허무와의 투쟁을 피하려는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타인과의 필연성이 부재한 좀비미학 뒤로 숨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타인에 대한 물음과 얽혀 있음을 부정한 좀비미학은 현실-미처럼 공동체를 유효하게 만드는 공동성이 부재하다.

아해라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유병언의 홈페이지(ahae.com)
필자는 얼마 전에 오대양 사건으로 유명한 기독교복음례회-구원파의 교주이자 세모그룹 전 회장인 유병언씨의 사진작업을 볼 수 있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필자는 유병언의 사진들이 대상에 대한 사려심이 없이 대상을 대상화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병언이 평소에 타인들을 대하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유병언이 자신의 사진을 세모그룹 계열사에 강매하는 수법으로 몇 백억 원의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더 기가 차는 증언은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기 위해서 몇 십 억을 기부하기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병언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자신을 발명가, 박애주의자, 화가, 기업가, 시인, 조각가, 환경운동가, 태권도 유단자(7단), 디자이너라고 감히 소개하고 있다.

유병언의 아들 유대균은 유도, 합기도, 음악, 미술을 아우르는 미술가로 알려져 있다. 유대균은 2003년에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미술시대 작가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통의동 진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중앙일보는 출품작 <구도자>를 소개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현대의 무신론자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구도자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1년 주간동아를 살펴보면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한국 미술의 눈》展에 유대균씨가 정준모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추천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준모씨는 유대균의 작품 <밀레의 씨를 뿌리는 사람의 연상>에 대해서 “흙이 빚어놓은 예사롭지 않은 손맛에 눈이 확 뜨였으며 고전적 이미지를 빌려 자신의 언어를 창조해낸 작가의 장인정신을 칭찬한다”고 말했다.
유대균의 작품 <밀레의 씨를 뿌리는 사람의 연상> http://weekly.donga.com/Print?cid=67254

분명 유대균의 작품은 아버지의 사진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표현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프랑스 근대조각의 거장 오귀스트 로뎅의 조각들을 답습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사실 유대균이 다른 작가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받아서 창작활동을 한 것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유대균의 작품도 아버지의 사진작품처럼 세모그룹 계열사의 비자금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만약 이 증언들이 확증 된다면 그동안 유대균의 작품과 관계를 맺어온 각종 언론이나 미술계가 유씨 부자의 부정축재에 가담했다는 윤리적인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유대균은 자신의 작품이 세모 일가의 비자금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드보브에갈레’ 매장 모습 (debauve-et-gallais.co.kr)
그러나 유대균이 서울에 ‘드보브에갈레’(프랑스 왕실에 초콜릿을 공급하던 업체)라는 초콜릿 전문점과 카페겸 식당 ‘몽테 크리스토’를 아이원홀딩스(청해진해운의 지주회사) 대주주 김찬식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윤리적 가치관에 문제가 없는 작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대균이 19세기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몽테 크리스토’라는 상호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장편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에서 따왔을 것이다. ‘드보브에갈레’와 ‘몽테 크리스토’에는 로댕의 <영원한 봄>작품 및 각종 고시계, 골동품, 고가구, 장신구뿐만 아니라 유대균과 유병언의 작품들도 함께 진열이 되어있다. 이들이 사치문화에 돈을 쏟아 붓는 동안 청해진해운은 규제완화를 빌미로 노후 선박을 헐값에 매입하고 비정상적으로 채무를 탕감했으며, 안전 비용에 필요한 필수 비용들을 삭감하여 발생한 차익으로 재산을 늘려나갔다. 각종 불법행위로 늘린 재산은 유씨 일가의 좀비미학을 떠받치기 위해서 사용 되었다. 이들이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좀비미학을 즐기는 동안 아무런 죄가 없는 아이들은 차가운 바다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좀비는 모종의 원인으로 시체가 움직이게 된 것으로, 의식이 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를 먹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좀비의 가장 큰 문제는 좀비 바이러스가 전염된다는 것이다. 좀비에게 물어뜯기고 죽임을 당한 인간은 좀비로 되살아난다. 좀비미학도 마찬가지다. 공동성이 부재한 좀비미학은 공동체를 무차별적으로 찢어 놓는 살육의 장을 환상적인 장막으로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비미학을 마주하게 될 때 그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속물화 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좀비미학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장막의 이면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좀비미학은 진짜 좀비의 바이러스처럼 공동체 안에서 전염되면서 우리의 삶을 좀먹는다. 좀비에게 물린 친구와, 애인, 가족이 좀비로 변해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듯이 말이다. 좀비미학에 전염된 현대인들은 히스테리에 빠지거나 소시오패스가 된다. 이러한 좀비미학은 세월호 참사가 터진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인명경시에 빠진 한국은 오래전부터 자기인식과 공동성의 결핍을 저급하게 감추기 위해서 좀비미학에 전염되어 있었다. 단지 환상적인 장막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호가 침몰하고 수많은 아이들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환상의 장막이 걷어졌다. 그리고 장막의 뒤에 가려져 있던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이 외부화 되었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언론매체에서 거짓말을 한 가짜 잠수부 여성, 실종자가족들 앞에서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자신은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며 바다에 빠진 실종자를 모두 구하겠다며 소리치고 다닌 40대 남성. 실종자 유족을 ‘유족충’이라고 부르는 일간베스트 유저들. 실종자의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색 리본이 사탄의 꼬임이라는 괴담이 퍼지는 것 같은 일련의 현상들은 환상적인 장막 뒤에 항상 존재하고 있던 것들이다. 우리는 이제 환상의 장막 뒤에 숨겨져 있던 온갖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일들은 부정적인 것들에서 출발해서 긍정적인 것으로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드러난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또다시 주마간산 하듯이 지나친다면 부정적인 것들에서 출발해서 다시 부정적인 것으로 이르게 될 뿐이다. 곰팡이가 뒤덮은 벽에 새 벽지를 바르는 것은 곰팡이를 가린 것이지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돈과 성공, 웰빙이라는 절대적인 계율에서 벗어나서 자기인식의 이르는 투쟁과 공동성을 생각해야 할 때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공동성을 생산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세월호에서 숨을 거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코앞에 닥친 죽음을 처절하게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초월적 가치의 부재에 따른 허무와의 투쟁을 피하려는 인간이 될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현실과 당당하게 맞서려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좀비미학 위에 갇혀버린 우리의 삶을 현실-미라는 가치 위로 이동시켜야 한다. 생존기계가 되어 살아온 우리는 모두는 이미 수 천 개의 세월호에 타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진도에서 첫 번째 세월호가 침몰했다. 첫 번째 세월호 침몰은 단순히 배가 바다에서 침몰했고, 몇 백 명의 피해자가 생긴 사건이 아니다. 이번 참사는 미래를 품은 아이들을 철저하게 절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를 방기하는 공동체 안에서 더 이상 미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야만이다. 오늘날의 미술인들도 히스테리를 유예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좀비미학을 양산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미술인들도 자신의 고유한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하는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공동성을 내포한 현실-미를 모두와 공유 수 있는지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들과 유가족들에게 감히 미술인으로써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조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미술가인 필자도 이 지점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