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크레용팝은 일베돌도 아니고 파업돌도 아니다

 2014.09.07 발행

최근 크레용팝이 9월 3일에 열린 금융노조 파업현장에서 공연한 것이 작은 논란이 되었다. 평소 크레용팝을 좋아하던 필자도 크레용팝이 왜 파업현장에서 공연을 했는지 궁금해서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봤다. 크레용팝의 이번 공연이 논란이 된 이유는 크레용팝 기획사가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를 이용하여 노이즈마케팅을 했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의혹은 순식간에 퍼졌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크레용팝을 일베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크레용팝이 일베돌이라는 논란이 불거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크레용팝 멤버가 일베 유저들이 사용하는 관용어인 ‘노무노무’와 ‘쩔뚜기’를 사용한 것이고, 두 번째는 크레용팝의 소속사 사장이 시장조사와 홍보를 위해서 접속하던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중에 일베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레용팝의 일베돌 논란 이후에 해당 소속사가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공식사과문을 살펴보면 일베와 관련된 크레용팝의 의혹이 일베돌이라는 낙인으로 곧장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크레용팝에 대하여 일베돌이라는 주홍 글씨를 거두지 않고 있다. 크레용팝의 정체성을 일베와 관련지어 예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왜 일베돌이라는 의혹을 떠안고 있는지에 대한 정황도 정확히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 이다. 심지어 크레용팝이 인터넷에서 일베와 연관 검색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일베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크레용팝이 9월 3일에 서울 목동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집회에서 공연하는 모습.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일베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일베 유저라고 낙인찍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모든 관계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고자 하는 간편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이러한 심리는 열강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에 6.25전쟁과 반공교육을 경험한 역사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과 불안정한 정전상태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분단 트라우마라’는 무의식을 각인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된 남한의 반공이념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와 정치적으로 보호되는 존재를 구별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우리에게 반공이념과 관련된 문제는 생존이 걸린 긴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문제의 맥락을 살펴보고 상호이해를 하는 과정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들을 선악의 논리를 통해서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상호이해를 할 수 있는 과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수평으로 내달리는 두 직선과 같아서 문제의 해결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도 ‘분단 트라우마’에 기인한 현상은 크레용팝의 일베돌 논란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에서 딸이 왜 죽었는지 밝히기 위해서 장기간 단식농성을 한 김영오 씨가 이혼을 했고 금속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에 빨갱이라고 단정하는 하는 사람들의 심리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기 위해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유저에게 소금을 뿌린 사람, 추석을 맞아 서울역에서 수사권, 기소권 보장하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홍보물을 나누어 주던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서 욕설에 뱉은 시민이 그러하다.

우리가 일베를 단순히 악마적인 집단이라고만 치부한다면 이 시대에 일베가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분석과 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이는 독감에 걸린 환자를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종교시설로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베가 지금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내밀한 분석이 없다면 일베가 사라진다고 해도 또 다른 일베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일베는 어떤 의미를 가진 집단일까.  일베는 극우, 반좌파도 다른 정치적 이념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주장이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개인과 공동의 삶을 파괴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다른 정치적 이념들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마련한 ‘일베회원을 위한 식사장소’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러 온 일간베스트 회원과(오른쪽) 7일째 단식 중인 장영승 씨(왼쪽)가 나란히 앉아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영승 씨는 폭식투쟁을 하러 온 일간베스트 회원을 다그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따라서 일베의 방향성이 개인과 공동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베와 상호이해의 과정을 거쳐서 더디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일베와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도 견지해야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가 폭식투쟁을 하겠다는 일베와 자대련 회원들에게 “광장은 여러분들의 것이기도 하다.”, “식탁도 마련하겠다.”, “그 식탁에서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들의 행사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기를 요청한다.”고 공식입장을 밝힌 것은 집단 간의 대립구도 유지가 아닌 문제의 해결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적절한 대응이었다.

다시 크레용팝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크레용팝은 아이돌이다. 아이돌(Idol)의 어원 중에는 실체는 없고 심상만 있다는 의미를 가진 에이돌론(Eidol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에이돌론 이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아이돌이라는 것은 과정보다 결과에,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쳐있기 마련이다. 이는 아이돌 그룹의 근본적인 한계인 동시에 시장에서 생존하기 적합한 이점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아이돌은 정치적 이념이라는 내용을 담아낼 내적 공간이 없다. 아이돌이라는 것은 의미를 내포한 내용을 만들어 내는 창작이라기보다는 이윤창출이라는 결과와 목표를 위한 상품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이돌이라는 상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아이돌 그룹의 가사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이돌에게 열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을 벗어난 환상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청소년의 경우에는 성인으로서 경험하는 현실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돌이 제시하는 환상의 세계를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기 쉽다. 아이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환상의 세계는 결국 시장과 맞닿아 있다. 아이돌이 주로 사랑에 관련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시장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사랑에 대한 노래가 시장가치와 연결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너무나도 통속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품의 가치란 시장에 나오자마자 실패할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아이돌 산업도 다른 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아이돌 기획사들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내달리게 된다. 근래의 한국 아이돌 걸 그룹들이 어떻게 하면 더 선정적으로 벗어볼 수 있을까를 경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한국의 아이돌 시장에서 크레용팝은 극단적인 도색성과 상반되는 포지셔닝을 통해서 개발된 새로운 상품이다. 크레용팝은 극단적인 도색성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남루함을 천진함으로 전유하는 형식을 개척했다. 한마디로 크레용팝의 포지셔닝은 환상보다는 현실에 방점을 찍고있다. 그러나 크레용팝이 현실과 맞닿은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고 해서 현실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크레용팝은 현실의 내용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기획되었을 뿐이다. 현재 한국의 오버그라운드에서 내용을 담아내는 아이돌은 없다. 따라서 크레용팝의 콘셉트가 환상이 아닌 현실에 무게추를 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콘셉트의 일환일 뿐이다.

만약 크레용팝이 정말로 일베를 이용해서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장논리에 기인한 것이지 크레용팝이 일베의 내용을 내면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크레용팝이 일베라는 내용을 내면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크레용팝이라는 아이돌 상품이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협소하게 만드는 자충수일 뿐이다. 실제로 크레용팝은 일베와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제 우리는 크레용팝이 얼마 전에 열렸던 금융노조 총파업에서 왜 공연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크레용팝에게 총파업이라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연을 통해서 산출되는 경제적 가치가 중요할 뿐이다. 크레용팝 소속사는 현장에 도착해서야 축제가 아니라 파업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축제가 아닌 파업이라는 것이 크레용팝에게 중대한 문제였다면 파업에 관련된 정보를 고지해주지 않은 행사 기획업체에게 항의하고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크레용팝은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을 소화해냈다. 또한 크레용팝이 부른 노래와 퍼포먼스는 총파업이라는 형식과도 꽤 잘 어울렸다. 금융노조는 이번 총파업에 크레용팝을 부른 것이 단순히 조합원들의 참여 독려를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금융노조도 크레용팝에게 총파업이라는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크레용팝이라는 아이돌이 어떤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크레용팝도 다른 아이돌 그룹과 마찬가지로 시장가치를 목표에 두고 기획된 상품에 불과하다. 이런 크레용팝에게 일베와 총파업이라는 내용이 내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특히, 우리가 크레용팝의 정체성을 일베와 관련지어 일베돌로 낙인찍는 것은 모든 것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편리하게 예단하고자 하는 심리가 바탕이 된 것이다. 크레용팝은 아이돌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크레용팝은 일베돌도 아니고 파업돌도 아니다. 단지 아이돌 그룹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