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close relation 리뷰: 대중과 예술이라는 고차방정식

2016년 10월 2일 발행

먼저 《close relation》의 홍보물을 살펴보자. 홍보물에 실린 짧은 글에는 이 전시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길 원하는 예술과 예술적 취향을 통해 새로움 또는 다름을 찾고 싶어 하는 대중의 관계를 다루는 전시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close relation》의 초점은 대중 중에서도 예술에 관심이 있는 대중에게 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홍보물에는 대중과 예술에 관심을 두는 대중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 불명확함은 애초에 《close relation》이 대중과 예술에 관심을 두는 대중을 구분하는 것에 그다지 명확한 입장을 세울 필요성을 못 느껴서일까. 어쨌든 이러한 불명확함은 《close relation》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대를 넓히는데 긍정적인 요소일 수 없다.

대중에게 예술은 여가생활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해결했거나 굳이 해결할 필요 없는 이들의 선택적 영역이다. 당장 비바람을 막을 집도 없고 한 끼 식사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사람이 예술에 눈을 돌릴 겨를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014년에 서울시가 15세 이상 4만 7,000여 명을 대상으로 만든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서울시민의 휴일 여가는 TV 시청이 44.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서 문화예술 관람은 6.8%에 그쳤다. 6.8%에 해당하는 문화예술 관람 안에서 장르별 관람률을 따지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63.2%로 가장 높다. 그러나 전시회 관람과 박물관 관람은 각각 9.3%와 11.1%에 그쳤다.1) 물론 홍대에 위치한 상상마당은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의 관객이 오가는 곳이라 유동인구가 적은 곳에 위치한 전시장에 비해서 관람률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T.O.P(최승현) 같은 연예인이 상상마당 전시장에서 인증 사진이라도 한 번 찍지 않는 한 《close relation》이 기대할 수 있는 관객의 범위는 문화예술을 관람하는 6.8% 안에서 약 10%를 차지하는 영역을 획기적으로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가 대중의 범주를 명확히 한정하지 않은 것은 기획진이 주어진 상황을 너무 낙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확실한 토대 위에서 나름의 답안지를 작성한 각 작가는 어떤 상황일까. 각 작가의 작품은 이번 전시의 맥락을 떠나서 본다면 그 자체로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예술과 대중의 관계를 다루는 전시 안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4명의 작가는 상호작용하며 전시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마치 부스전처럼 각자의 작품을 주어진 자리에 진열하는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자인 일상의 실천

이번 전시에서 각 작가가 작품을 통해 대중과 예술의 관계에 접근하는 강도는 저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정문경, 이우성 작가의 작품은 대중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한 작품이기보다는 그들이 평소에 해왔던 작품을 이번 전시에 부여된 맥락 위에 돛단배처럼 띄워놓은 상황에 가깝다. 정문경 작가의 <부유하는 의자>에 내포된 의미는 관객과 순환관계를 만들기보다는 단방향으로 발신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이런 점에서 <부유하는 의자>는 관객의 가시적, 비가시적 수신이 필수인 작품이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자족성을 가진 작품이다. 이우성의 작품은 정문경 작가의 작품에 비해서 관객과 대면할 수 있는 접점이 조금 더 넓다. 1980년대 걸개그림을 알 정도로 미술에 익숙한 관객이 아니라면 이우성이 틀이나 액자도 없이 천위에 수성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야외에 설치하고 다니는 과정은 관객에게 낯섦과 소탈한 느낌을 동시에 줄 것이다. 관객에게 있어서 이우성이 보여주는 소탈한 형식은 작품에 대한 친숙함으로 이어지기에 좋은 요소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 대한 소감을 묻는 상상마당의 설문지를 살펴보면 이우성의 작품이 가장 언급이 많이 되어있다. 이우성이 천에 그린 그림들은 일상적인 것부터 초현실적인 해학과 기괴함을 두루 포괄한다. 이우성이 그림이 내포한 이런 요소들은 세대와 사회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나마 이러한 지점이 예술과 대중의 관계라는 전시주제와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 홍보물에 실린 이우성 작가의 짧은 작품설명은 대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 회화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룬다. 물론 작품설명 마지막 줄에 대중이 언급되지만 전시의 취지 때문에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런 점은 결국 이우성의 출품작이 애초에 이번 전시와 화학적으로 반응할 여지가 많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이우성의 작품은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여지가 많다. 그러나 친숙함 이상의 의미를 끌어낼 기획 차원이 보조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우성의 그림들은 대중과 예술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관객과 함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정문경, 이우성에 비해서 김가람, 노기훈의 작품은 관객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대한 태도가 상대적으로 분명하다. 먼저 전시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김가람의 <#셀스타>를 살펴보자. 관객은 <#셀스타>에 진열된 화장품으로 화장한 후 해시태그(hash tags)2) #셀스타, #상상마당전시, #에뛰드하우스를 달아 자신의 사진을 인스타그램(Instagram)에 올리고 운이 좋으면 상품도 받을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셀스타를 검색하면 무려 160만 장이 넘는 사진들이 나온다. #셀스타를 즐기는 대중은 싸이월드 시절 허세 셀피(Selfie)를 즐기던 장근석의 후예라도 된 듯이 각자 자신이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각도와 자세, 조명, 필터를 사용해 웹상에 자신을 전시하고 기록한다. 이런 점에서 김가람의 <#셀스타>는 《close relation》의 출품작 중에 관객과 자연스러운 순환관계를 만들 여지가 가장 많은 작품이다. <#셀스타>에 대한 관객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대중이 즐기는 셀피 문화의 동력이 나르시시즘에 기반을 둔 것인지 아니면 자기애에 기반을 둔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셀피를 화면으로 훔쳐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셀스타, #상상마당전시, #에뛰드하우스 해시태그와 <#셀스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관객의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활성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노기훈의 <레시피>는 음식 사진과 조리법이 적힌 부분이 마치 웹 사이트 구조처럼 세로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레시피>에서 3천만 개의 어마어마한 음식 사진, 동영상이 등록된 해시태그 #먹스타그램 같은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대중이 웹상에 전시하는 음식 사진 중에서도 특히 비싸고 특별해 보이는 음식을 찍은 사진들은 마치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의 욕구 단계설 1단계에 해당하는 음식을 3단계 사회적 욕구와 4단계 자기존중의 욕구 단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끌어오는 경우와도 연결 지어 볼 수 있겠다. 어쩌면 먹고사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음식으로 상위 욕구단계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진과 영상으로 웹을 떠도는 무수한 음식 사진은 아무리 음식과 문화가 관련이 깊다고 하더라도 분명 과도하게 의미의 거품이 낀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의미의 거품이 가득 낀 음식 사진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나 음식 사진에 왜 그토록 의미의 거품이 끼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 정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레시피>는 #먹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는 사진들을 경유하여 의미의 거품을 덜어낸 음식을 제시한 묘한 사진이다. 이런 묘함은 관객이 <레시피>에 친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이들이 작품 안으로 몇 발자국 더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제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객 설문지에서 <레시피>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이 입구의 문을 선뜻 열어보는 관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앞선 이우성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으로 만약 이 전시가 <레시피>를 기획력3)으로 적절히 보조할 수 있다면 대중 단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술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몇 명의 관객은 <레시피>가 품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4)

이처럼 4명의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강도로 대중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답안을 적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각 작품이 전시가 지향하는 방향을 향해서 어우러지는 측면은 역시나 부족했다. 물론 이 전시가 대중을 어느 범주까지 한정해서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합의를 한 이후에 개막했더라도 여전히 성공적인 전시로 거듭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대중과 예술의 관계를 다루는 전시를 기획할 때 대중의 범주를 한정하는 문제 외에도 논의해야 할 측면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들 들어 대중과 예술의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서 오늘날 대중이 사회 전반에 걸쳐 파괴력을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한 점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최근 불거진 장동민 하차 사건, 웹툰 예스컷 운동, 시사인 절독 같은 사건들을 보면서 대중이 자유를 추구하는 한국사회 안에서 심판자로 군림한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미술은 대중에게 외면받는 영역이기에 대중의 군림에서 안전한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이 대중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대중의 비위를 맞출지 아니면 대중의 무차별적인 다수결에 휩쓸리지 않고 미술만의 가치 기준들5)을 밀고 나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close relation》은 이런 종류의 쟁점과 고민을 너무 우회했다. 사실 이번 전시는 개막하기 전에 약 3개월간 작가와 광고 전문가, 미술비평가 등이 모여 대중과 예술을 주제로 장시간의 워크숍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이번 전시의 후도록에 이 워크숍에 대한 자료가 일부 삽입될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후도록이 전시에서 미진했던 점들을 일부라도 보충할지도 모른다. 물론 후도록이 만들어지고 몇 가지 부대 행사가 열린다고 이 전시의 목표가 완수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는 어디까지나 대중과 예술이라는 험한 산을 오르내리기 위한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상상마당의 고민은 《close relation》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다방 프로젝트나 다른 기획 꼭지를 통해서 반드시 지속돼야 한다.


1) 통계로 본 서울시민 여가-문화생활, 2014, e-서울통계 96호, pp.5-6
2) 해시태그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서 특정 단어와 관련된 게시물을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에 단어를 붙여 쓴 것이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상상마당을 검색하면 이 해시태그를 사용한 공개 게시물들을 볼 수 있다.
3) 이 원고를 마무리하기 며칠 전 상상마당 측으로부터 이번 전시와 관련한 부대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준비 중인 부대 행사는 심야식당 콘셉트로 요리도 하고 대화도 나누는 자리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부대 행사가 다양한 강도의 기획력 중 하나다.
4) 나의 경우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레시피>의 액자 21개 중 사진으로 채워진 것은 단 3개다. 그런데 이 중에서 ‘도화가 만두에 빠진 날’이라는 묘한 이름의 요리는 노숙자 생활을 오가는 어떤 사람의 한 끼 식사라는 사연을 갖고 있다. 물론 <레시피>에서 이러한 사연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레시피>를 유심히 볼수록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이 한 끼 식사를 홀로 해먹을 남루한 개인을 떠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웹에 전시되는 음식 사진은 대부분 남루함의 반대편에 있다.
5) 물론 돈과 제도에 예속된 미술이 밀고 나갈 가치 기준들이 무엇인지 의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