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_삶의 정수에 다다르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2017년 7월 28일 발행

정지우 (분노사회, 청춘인문학 저자)

청춘 시절의 외부에 관하여
서울에서 보낸 청춘 시절 내내, 나는 늘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쌓이다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곧장 고향으로 가는 기차표나 버스티켓을 끊었다. 고향에 도착해서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해안선 드라이브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한참이나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곤 했다. 부모님은 지루해하며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거나, 신문을 읽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대단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유별난 상상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은은하게 빛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늘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언제인가부터는 좀처럼 갖지 못했던 그런 시간들이 청춘에는 산재해 있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모여 시간표를 짜기 보다는 듣고 싶은 과목들만을 골라 들었다. 내가 좋아하던 과목들은 주로 인기 없는 오후 끝자락의 수업들이었다. 그 중 문학의 고전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한 명과 강의를 들었다. 가을 학기였고, 수업이 끝나면 하늘은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대였기에, 친구와 나는 늘 신문지를 들고 학교 광장의 풀밭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면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그저 한참동안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의 모양, 하늘의 빛깔, 그 사이에 돌아다니는 벌레들의 날갯짓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여름날 아침이면 나는 자주 호수 한가운데로 보트를 저어가서는 그 안에 길게 누워 몽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고는 산들바람이 부는 대로 배가 떠가도록 맡겨놓으면 몇 시간이고 후에 배가 기슭에 닿는 바람에 몽상에서 깨어나곤 했는데, 그제야 나는 일어서서 운명의 여신들이 나를 어떤 물가로 밀어 보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 시절은 게으름 부리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이던 때였다.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보내기 위하여 오전 나절에 몰래 빠져나오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양지바른 시간과 여름의 날들을 풍부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아끼지 않고 썼다.
소로우의 <월든>을 완독한 건 서른을 넘기고서였다. 소로우가 이 책을 쓴 나이가 대략 지금의 나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욱 와 닿았다. 나는 어느 가을, 해 뜨는 바다를 보러 제멋대로 기차에 올라 타 동해에서 밤을 새고는, 오래토록 수평선을 바라보던 순간을 생각했다. 학교 뒷산에 올라 몇 점 보이지도 않는 별을 한참 올려다보던 새벽들도 떠올랐다. 소로우의 말 대로였다. 그 시절, 나는 분명 이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월든>을 완독하진 못했지만, 책의 서두는 읽어둔 터였다. 그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인투 더 와일드>의 주인공 크리스 매캔들리스가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 책이 바로 <월든>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현금을 불태운 채 혈혈단신으로 서부로 떠난 영화 속 청년의 이야기는 청춘을 보내는 동안 내 머리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1) 다만, 그 시절에는 부지런히 소설들을 읽어 젖히기에도 바빴던 터라, 만만치 않은 두께로 시골에서의 감회를 이야기하는 이 책을 오래 읽어내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로 대변될 수 있는 먼 땅, 이곳이 아닌 외부의 세계, 고요하고 아늑한 어떤 장소에 대한 열망은 분명 청춘 내내 나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이 땅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품은 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아름다운 카페가 곳곳에 널려 있고, 무수한 만남들이 예견되어 있으며, 화려한 삶의 가능성을 품은 이 도시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동시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바다가 있는 어느 고장으로 떠나 오랫동안 여행을 하거나, 언제까지고 머무를 것이라는 욕망 역시 놓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정말로 그런 먼 땅의 고즈넉한 삶을 살아낸 기분이 든다. 그저 이따금씩 찾아간 바다와 자연이었지만, 매일같이 그 땅들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게 추억 속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실제였건 상상이었건 얼마나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호숫가에 집을 짓고 2년 정도 살았다는 <월든>의 이야기는 언뜻 들으면 그리 대단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 정도쯤이야 흔히 있는 일이라며, 우리는 더 역동적이고 화려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이를테면, 백 일간 인도 전역을 떠돈 사람의 이야기라든지, 회사를 관두고 트럭을 개조해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의 여정이라든지, 무일푼으로 남미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을 한 사람의 여행 따위가 그렇다. 그러나 소로우의 여정은 단순히 외적으로 복잡다단한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야깃거리를 위해서, 삶의 막연한 이미지를 위해 떠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에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2)

그가 떠난 것은 내면의 절실함, 삶의 진실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현실의 온갖 거추장스러운 의무들을 모두 걷어낸 상태에서, 완전히 순수한 삶의 핵심에 도달하여 삶의 진실을 느껴보고 알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가장 소박한 상태에서, 오로지 삶만이 남은 상태에서 이 생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 과거로부터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관계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갖가지 이름들을 벗어던진 상태로 ‘지금 여기’의 삶에 있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동기가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내부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체험이 인류사에 족적을 남기게 된 이유다. 그의 기록은 단순히 호숫가에서의 삶에 대한 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자기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랬을 때 주변의 모든 것은 어떻게 보이고 감각되는지, 나아가 어떠한 생각으로 명료하게 삶을 응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 역시 내 청춘을 지배했던 상상의 삶에 관해 조금은 옹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완전히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채, 골방에 갇혀 지냈던 몽상의 나날들은 그 자체로 소로우의 추구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주 내 방을 섬으로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휴학을 하고, 기존의 관계들과 멀어지면서, 나는 철저히 나를 허공과 같은 상태로 몰아넣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 자취방의 조각난 창문으로 들어오던 달빛과 오후의 햇살과 내 손에 쥐어진 책과 노트에만 의지해 삶을 만나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른이 넘어 읽어낸 이 고전이 내겐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나는 언제인가 그와 같은 호숫가에 살았던 것만 같다.

나는 나의 집이 실제로 그와 같이 우주의 멀리 떨어진, 그러면서도 항상 새롭고 더럽혀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플레이아데스 성좌, 히아데스 성좌, 알데바란 성이나 견우성 가까이에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면 나는 실제로 그런 곳에 살고 있었다. 내가 버려두고 온 생활로부터 그 별들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도 멀고도 작은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오직 달이 뜨지 않는 밤에나 그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내가 자리 잡고 앉은 곳은 우주의 그러한 곳이었다.3)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
<월든>의 대부분은 호숫가에서 경험한 다양한 일들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 집을 짓기 시작하는 과정부터 호숫가를 산책하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는 일들이 투명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전에 소로우는 자신이 왜 이러한 삶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그는 책의 초반부에서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내일의 아홉 바늘 수고를 막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舞蹈)병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4)

비록 이백여 년 전의 세태를 담고 있는 글이지만, 그의 지적은 우리 시대의 삶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가 볼 때,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미래에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우리를 과도하게 노동으로 몰아넣으면서, 우리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현재에 온전하게 머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공허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채우는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이다. (…) 그가 하루 종일 움츠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보라. 불멸이나 신성은커녕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즉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진 평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여론, 즉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에 의한 자체 평가에 비교하면 대단한 폭군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곧 그의 생애를 결정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윌버포스는 서인도제도의 노예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신의 세계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킬 그와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5)

그는 이어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현재의 통상적인 생활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사실은 스스로 정신없이 일과 의무에 쫓기며 살기를 선호했다.6) 그렇기에 그는 우리가 스스로의 노예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다소 냉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점은 그것이 결코 다른 ‘대중’이나 ‘타인’의 평가 혹은 강요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를 구속시키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다.
만약 소로우의 말대로 우리 현대인들이 스스로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정말로 없었느냐’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그랬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타인들과 같은 종류의 기준을 공유하면서, 그들이 이루는 평판에 함께 도달하고자 애쓰지 않는 대신, 과감하게 이 현실 전체를 ‘중단’시킬 기회는 언제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귀농이나 이민을 시도한다든지, 중산층의 가정을 이루기를 포기하고 꿈을 좇는다든지,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든지 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방향의 삶을 ‘선호’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특히,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내 삶의 방향을 이끌고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얻는 안정감을 선호하고, 그들로부터 박탈된 상태의 소외감을 결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이미 타자들로부터 영향 받은 선택이다. 그렇기에 선택은 소로우가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긴 하지만, 동시에 ‘타인들에 의한’ 선택이기도 하다.

나는 신문에서도 기억해둘 만한 뉴스를 읽은 적이 없다. (…) 신문에 실린 소식은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원칙만 알면 되지 무수한 실례와 응용을 구태여 들을 필요가 무엇인가? 철학자에게 소위 뉴스라는 것은 모두 가십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편집하거나 읽는 사람은 차나 마시고 있는 늙은 부인네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가십에 걸신들린 사람이 적지 않게 있는 것 같다. (…) 그런데 이 해외 뉴스라는 것은 펜만큼 기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12개월 전이나 또는 12년 전에 꽤 정확하게 작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한다.7)

소로우는 같은 맥락에서, 뉴스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가한다. 사람들은 뉴스가 만들어내는 현실을 자기 자신의 현실이라 믿으면서, 끊임없이 뉴스를 찾고 갈망하며 사로잡혀 살아간다. 특히, 뉴스는 각자의 무수한 삶들이 ‘단 하나의 현실’에 속해 있다고 믿게 한다. 최신의 경향이나 유행과 같은 말들은 취향의 획일화와 욕망의 일반화를 가정하면서 동시에 부추긴다. 뉴스는 우리가 모두 같은 위기(이를테면, 국가적인 경제위기)나 기대(이를테면,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에 속해 있다고 믿게 하며, 동일한 체념과 좌절, 희망을 느끼도록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몰아세우며 동질화한다. 이처럼 뉴스에 사로잡혀 똑같은 가십거리를 공유하고, 똑같은 현실에 속해 있다고 믿으며,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소로우는 ‘뉴스에 걸신들린’ 사람이라고 폄하한다.

사람들은 눈을 감아버리거나 졸거나 또는 허식적인 것에 속아 넘어가기로 동의함으로써 자신들의 인습적인 일상생활을 확립시킨다. 아직도 이 일상생활은 순전한 허구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이제 막 소꿉놀이나 하면서 인생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어른들보다 인생의 참다운 법칙들과 관계들을 더 명확하게 분간해낸다. 어른들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지도 못하면서 경험에 의해서, 바꾸어 말하면 실패에 의해서 자기들이 아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8)

현대적 삶에 대한 소로우의 비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현대인은 스스로 진실한 삶을 선택하지 않은 채 휩쓸리고 획일화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질화된 삶, 즉 ‘인습적인 생활’이 가치 있거나 진실한 삶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항상 굶어 죽을 것을 걱정하며 일에 쫓기고, 늘 뉴스에 사로잡혀 허구의 현실에 휘둘리고, 서로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며 가십거리를 공유하는 삶이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로우가 볼 때, 그런 삶은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망각한 삶이며, 스스로를 존경하지 않는 삶이고, 생의 진실로부터는 한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삶이다.
소로우의 비판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데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일상적인 행복보다는 고통과 피로를 더 많이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천 년 전부터 생의 본질을 ‘고통’이라고 이야기해온 현인들의 말마따나, 우리 인생 자체가 원래 고통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 사회가 유난히 불합리하여 우리를 늘 행복보다는 고통 쪽으로 몰고 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소로우는 그 모든 고통과 피로가 우리 스스로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명석한 이성과 의지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처럼 이 현실을 거부하고 ‘다르게 살라’는 것이다.
그의 비판이 비록 정당한 데는 있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인의 주체적 의지’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의 논리에는 보다 섬세하고 보편적인 권리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일반적인 삶을 행복하게 향유할 권리가 있다. 반드시 특별하고 개척적이며 주체적인 의지가 충만한 삶을 모두가 살아낼 수는 없고,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대다수가 선택하는 일반적인 삶,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사랑하며, 가정을 꾸리고, 노후를 맞이하는 삶 역시 그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기에 때때로 개인의 의지 보다는 불합리한 사회가 문제시되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주변의 타인들과 같은 취향을 공유하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기뻐하고, 함께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하는 삶,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인생 안에도 각기 다른 절실함과 열망, 사랑과 회한, 기쁨과 슬픔이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월든>의 안쪽뿐만 아니라 바깥쪽에도 삶은 있다. 어떤 면에서 <월든>의 안쪽에 있는 삶이 더 가치 있고 진실하며 심오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월든>의 바깥쪽에 있는 삶이 반드시 무가치하며 거짓으로만 점철된 삶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며 고유의 생을 살고 있다.
나 역시 한 때는 소로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현대적 삶을 비판하며, 특별하고 진실한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사람들의 삶은 비판의 여지보다는 이해의 여지가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우리가 보다 인간의 삶에 대해, 사람들이 수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며 ‘선호’하게 된 일련의 삶들에 대해 관대하기를 바란다. 소로우의 시도와 성찰은 진심으로 존경할 만하고, 언제든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힘이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접할 때면, 그가 비판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자기 삶의 진실을 좇기 위하여, 반드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간소화 한 이후의 삶
타인들에 대한 소로우의 비판이 지나친 면은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증언하는 삶의 진실성을 훼손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 즉 <월든> 안쪽에서의 삶을 선택하면서 그 바깥의 삶을 ‘허구’라고 규정한다. 이는 적어도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진실이다. 소로우에게는 다른 이들처럼 일반적인 직장에 속해서, 매일 뉴스를 확인하고, 가정과 사회의 의무에 쫓겨 사는 삶은 공허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삶의 핵심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노동을 통해 그들에게 헌신하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맛보며 마모되어가는 일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소로우에게는 그러한 일 전체를 부정한 곳에 삶의 정수가 있었다.
소로우는 오직 삶만을 가장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간소화하고 또 간소화하라’고 말한다.9)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하다. 사회생활을 위해 옷을 차려입고자 한다면, 각종 디테일들이 따라 붙는다. 상하의의 색깔과 종류, 브랜드뿐만 아니라, 가방, 시계, 벨트,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 네일아트나 화장의 기법, 헤어스타일, 안경과 신발의 종류 등 우리는 온갖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거기에 더해, 인생에서 요구되는 것들은 거의 끝이 없다. 아파트의 평수와 브랜드, 학군, 자동차의 등급, 매 주말과 휴가 때마다 가야 할 각종 핫플레이스들, 그 외에도 미래를 고려한 투자와 보험, 대출 등 우리의 인생은 무수한 세부들로 채워져 있다. 이 모든 것들에 하나씩 신경쓰다보면, 어느덧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들은 지나가버린 뒤이다.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생각하는 삶은 단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 가지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10)

소로우가 말하는 ‘단 한 종류의 삶’이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고 있는 일반적인 삶을 가리킨다. 응당 해야만 된다고 말해지는 각종 권유와 의무로 뒤덮여 있는 삶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온갖 미디어에서 추천하는 유행이나 투자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손해보고 뒤처진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리 삶은 그처럼 미디어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현실’을 좇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소로우는 이 흐름을 끊어내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 뉴스 대신 고전을 읽었고, 주변의 어른이나 교수 대신 과거 철학자의 말에 기대고자 했다.

대부분의 사치품들과 이른바 생활 편의품들 중의 많은 것들은 꼭 필요한 물건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 향상에도 방해가 되고 있다. 사치품과 편의품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더 간소하고 결핍된 생활을 해왔다. (…) ‘자발적인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11)

소로우가 살고 싶었던 삶은 아마도 ‘철학적인 삶’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인생의 덜 중요한 것들에 써야하는 관심들을 거두어 들여, 오직 삶의 진실을 이해하고 밝히는 데만 집중하고자 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가 오두막 안에 앉아 그저 하루 종일 사색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고도의 성실성을 발휘한다. 집을 짓는 것부터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하며 살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호수 주변을 다니며 자연을 관찰하고,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며, 글을 쓴다.
우리가 현대적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것들을 스스로 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것을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벌고자 하고, 그를 위해 오랜 세월 공부하고 일을 배운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 자체에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통해 돈을 얻어 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서이다. 소로우는 ‘필요한 것’을 극도로 간소화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내고, 나머지 시간은 진리를 찾기 위한 관찰과 사색의 시간을 보낸다.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깨끗지 못한 사람은 열이면 열 게으른 사람이며, 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며, 해가 떠 있는데도 누워 있는 사람이며, 피곤하지도 않은데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다.12)

소로우가 원했던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성실성이었다. 그는 도시의 삶에 지쳐 휴식이나 여유를 위해 호숫가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고 생각하며 사회로 진입해서 일을 하고 현실과 부대낀다. 그러나 소로우는 반대로, 삶의 가장 핵심에 뛰어든다고 생각하며 호숫가의 간소한 삶으로 향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미루고 싶지 않아 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네 삶은 무한히 ‘미루는’ 삶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마주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언제인가 그럴 여유나 여력이 있기를 한없이 기다리기만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13)

소로우의 절실함은 현실에 대한 걱정이나 자신에 대한 불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고, 고요하면서도 자신에 가득 차있다. 그는 자기 외부에서 자기를 몰아세우는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고, 오로지 자기 내부에서 북받쳐 오르는 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절실함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당장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라는 말 그대로, 당장 호숫가로 떠나서 자기 내면의 삶에 충실했다.
나는 소로우의 글에서 묻어나는 만큼의 용기와 당참, 씩씩함으로 청춘을 살아내지는 못했다. 그는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독감 때문에 조금이라도 위축된 적이 없었다.”14)고 말하고 있다. 이는 확실히 나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져있는 태도이자 마음의 힘이다. 그렇게 보면, 실제로 그는 자신의 기질 혹은 자질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냈다. 온전한 홀로 있음을 통해 삶을 마주하고, 탄광을 뚫고 들어가듯 삶을 개척해나갔다.
반면, 내가 보낸 청춘은 보다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대학생 시절 순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행을 하기 위해 2년여 간의 휴학을 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인생 과정에서 크게 벗어날 정도의 기행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후에는 대학원에 적을 두고서라도, 나를 현실에 붙잡아줄 여지를 두려고 했으니 애초부터 ‘개척자’이지는 못했던 셈이다. 대신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삶에 변주를 주고자 했고, 소로우처럼 완전한 ‘바깥’으로 나가기보다는 경계에 머물면서 다른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나는 소로우에게 반감을 느끼기보다는 깊이 공감하는 점이 큰데, 그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내면에 대한 진실과 충실성을 고집스럽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와 같은 것을 지향해왔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그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하며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15) 누군가는 자기 내면의 진실을 좇기 위해, 투철하게 ‘일반적인’ 생활양식에 몰두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학위 과정에 충실하거나 등단과 같은 제도에 깊이 소속되면서 말이다. 반면, 소로우처럼 그러한 제도를 처음부터 등진 채 살아갈 수도 있으며, 둘 사이의 경계에서 삶을 조율하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그리고 순순히 우리의 착상에 응답해준다. 우리가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우리의 길은 우리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구상을 하면서 보내도록 하자. (…) 하루를 자연처럼 의도적으로 보내보자. 그리하여 호두 껍데기나 모기 날개 따위가 선로 위에 떨어진다고 해서 그때마다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든 또는 거르든 차분하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자. 손님이 오든 또는 가든, 종이 울리든, 아이들이 울든, 단호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하자. 왜 우리가 무너져 내려 물결에 떠내려가야 하는가?16)

각자의 삶에는 고유한 속도와 시간, 방식이 있다. 우리는 서둘러 남들이 사는 방식대로, 남들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한다. 소로우에 의하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단호하게 마음의 평정을 지키면서 우리 앞에 있는 하루를 응시하고, 내 삶에 적합한 ‘새로운 구상’을 끊임없이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의도적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시작하고,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앞세워 의도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번의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내가 먹었던 마음이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과 걱정들이 거머리처럼 나를 옭아매고 끌고 가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면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도 당장 논문에 몰두해야 하는 건 아닌지, 취업을 알아보아야 하는 건 아닌지, 그 밖의 다른 일들을 도모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들이 만약 자기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들과 닮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내게 충실한 일이 나의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들이 사는 삶을 따라 휩쓸려 가는 것이라면, 그들의 삶을 굳이 신경 쓰며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17)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소로우는 일방적으로 시골과 숲에서의 생활만을 찬양하며 평생 자연 곁에서 살기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숲 생활은 자기 내면을 따라 나서는 여정에서 거쳐 가는 하나의 일시적인 장소였을 따름이다. 그는 처음 숲으로 향했던 것과 같은 열망으로 숲에서 떠났다. 그는 생태주의적 삶이라는 특정한 생활양식을 따라가고자 했던 게 아니라 자기 삶을 따라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단지 그 삶의 요청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월든>을 완독하고 났을 때, 나는 아주 믿을 수 있고 존경할 만한 친구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소로우 같은 존재가 이 땅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딘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진실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분명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혹여나 내가 이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월든 호숫가의 그는 언제든지 이쪽으로 오라고 인사를 건넬 것만 같다. 여기 우주와 자연의 한 가운데 삶의 진실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런 상상의 보루에 기대어, 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나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을 더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1)  영화 <인투 더 와일드>에 관해서는 여행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던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3부에서 상세히 다룬 적이 있다.
2) 헨 리 데이브드 소로, 강승영 역, 『월든』, (은행나무, 2011), 138~139쪽
3) 같은 책, 135쪽
4) 같은 책, 143쪽
5) 같은 책, 22~23쪽
6) 같은 책, 23쪽
7) 같은 책, 145쪽
8) 같은 책, 147쪽
9) 같은 책, 141쪽
10) 같은 책, 40쪽
11) 같은 책, 32~33쪽
12) 같은 책, 331쪽
13) 같은 책, 86쪽
14) 같은 책, 200쪽
15) 같은 책, 110~111쪽
16) 같은 책, 149쪽
17) 같은 책, 4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