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_진격의 거인과 원피스를 통해 본 현대 한국 사회

2017년 5월 12일 발행

정지우(『분노사회』,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저자)

한때 <진격의 거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우익적 발언이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이에 기존의 많은 시청자들이 분노를 느끼고, 평론가들은 나서서 이 작품이 우익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사야마가 비공개 트위터 계정(@migiteorerno)에 “일본 통치 덕에 인구와 수명도 2배로 늘어난 조선인들인데, 민족정화를 당한 유대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고 쓴 글이 확산되면서 일어났다. 그 이전 2010년에도 그는 일본 군국주의 시절의 조선주차군 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를 존경한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격의~’라는 유행어도 생겨날 만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당시 사건으로 인해 ‘알고 보니 극우 작품’이라는 식으로 전면 재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은 이 작품을 통해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 이념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일까? 그래서 이제야 이 작품의 정체를 깨닫고, 군국주의 이념에 열광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걸까?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한국 시청자들이 <진격의 거인>에서 매력을 느낀 것은 군국주의적 이념, 세계관, 인물 때문이 아니었다. 작가와 작품을 떼어놓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고전적인 논쟁을 들고 나오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은 ‘우익적 성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그러한 해석은 사후적인 끼워 맞추기에 불과하다. 마치,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사후 그가 동성연애자였던 것이 밝혀지자, 그의 작품 전체를 동성연애 소설로만 재해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애초에 사람들이 <진격의 거인>에 그토록 흥미와 매력을 느꼈던 것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 특유의 ‘한계상황’ 때문이었다. 인류 대부분이 멸망하고,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협소한 지역에서 바깥의 거인들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진 채 살아가는 ‘환경’이 어딘지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남은 인류는 오직 이 좁은 공간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전부이고, 아무런 지적 능력도 없는 거인들은 계속해서 진격하며 인간의 영토를 잠식해온다. 거인들에게는 이유도, 목적도, 의도도 없고 그저 사람들을 잡아먹은 다음에는 모두 토해버린다. 그들에게는 심지어 ‘살고자’ 하는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거되어 있는 듯하다. 거인들은 그저 인간을 죽이는 맹목적 행동만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충격적이다. 그 이전에도 좀비나 외계인이 인간을 침공한 작품은 많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적어도 목적이 있었다. 인간을 먹이로 삼아 자신들의 종족을 번성케 한다든가, 인간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이 땅에서 살고자 한다든가 등 그들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인들은 먹지도 않고, 번식도 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욕에 넘치지도 않는다. 그저 신이 내린 벌처럼 ‘광기어린 상태로’ 혹은 ‘발달장애 같은 상태로’ 인간을 죽이는 데에만 열중할 뿐이다.
인간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한계상황으로 내몰린다. 이는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인간은 세상의 원리를 생각하거나, 자기가 처한 운명을 이해하거나, 원인과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 그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만 할 뿐이다. 극도로 좁은 영토 안에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거인들은 계속해서 침공해 들어온다. 남은 것은 그저 맹목적인 생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명제 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어딘지 가슴 한 가운데를 후벼 파고 들어오는 것처럼 충격을 주었다. IMF와 금융위기의 고통을 모두가 경험한 이후로,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와 불안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로 치달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경쟁은 날로 극심해지고 삶은 살아남기 위한 전쟁터가 되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한, 박탈당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일말의 안위를 향한 열망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경쟁, 비교, 전투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이란 마치 <진격의 거인>의 벽 속에 살아남은 인류처럼, 오직 자기의 생존에 매달리는 일밖에 없어 보인다.

<진격의 거인> 이전에,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도 한 애니메이션 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원피스>는 <진격의 거인>과는 거의 정반대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작가의 태도도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우익적인 성향의 이사야마와 달리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발언하거나 과거 일본을 ‘약탈하던 왜구’라고 표현하는 등 비교적 이념에서 자유로운 발언들을 해왔다. 한 때는 욱일승천기를 만화에 그려 넣어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그 사실만 가지고 우익적 성향의 작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원피스>는 매우 자유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세계관을 담은 작품이다. <원피스>의 세계는 거의 무한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모험의 세계다. ‘대해적의 시대’라고 불리는 원피스의 세계에서, 수많은 해적들은 각자만의 개성을 가진 채 바다로 나선다. 이 해적들 중에서는 악당도 있고, 그저 순수하게 모험을 즐기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는 정의로운 해적도 있다. 특히, 주인공 루피가 선장인 ‘밀짚모자 해적단’의 멤버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꾸며 한 배를 타고 있다. 루피는 해적왕이 되는 게 목표이고, 조로는 세계 최고의 검사가 되는 것, 상디는 최고의 요리사가 되는 것, 나미는 최고의 항해사가 되는 것, 그 외 훌륭한 의사, 저격수, 고고학자, 가수가 되는 것 등 멤버들은 각기 다른 꿈을 향해 한 배에 올라 ‘위대한 항로’라는 바다를 모험한다.

<진격의 거인>이 현대 사회의 개인이 처한 한계상황을 그려냈다면, <원피스>는 현대의 또 다른 가능성인 ‘자기만의 꿈’을 긍정하며 부정적인 현실을 지워버린다. <원피스>의 세계에는 동료들 간의 진심어린 우정, 서로의 꿈을 북돋아주고 인정해주는 다원성,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희망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원피스>의 꿈에 대한 공감에서 <진격의 거인>의 한계상황에 대한 공감으로 크게 전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꿈과 희망을 말하기는 어려워졌고, 대신 각박한 사회 현실을 말하는 것이 더 큰 공감을 얻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대립적으로만 볼 경우 중요한 사실을 놓칠 수 있다. 분명 두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은 뚜렷하게 대비되지만, 그 속의 인물은 오히려 닮은 점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에렌은 누구보다도 거인들을 모두 죽이고 토벌하는 데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가지고 있다. 근래 평론가들은 이런 에렌이야 말로 군국주의의 ‘우익적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 해석에 따르면, 에렌은 세상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진 루피와는 반대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에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 끝없이 펼쳐진 자유로운 세상을 보고, 걷고, 즐기는 일이다. 이 꿈은 에렌의 친구인 아르만이 불어넣어준 꿈이다. 아르만은 바깥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는 소년이다. 작품 속에는 에렌이 거인으로 변해서 광기에 사로잡힌 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럴 때, 그를 다시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것은 저 바깥 세상에 대한 순수한 꿈이다. 아르만이 끈질기게 에렌한테 저 바깥 세상에 대한 꿈을 기억하라고, 함께 그곳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자 에렌은 깨어나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에 깔려있는 정서를 광기와 전쟁과 정복을 사랑하는 일본 극우의 신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 작품은 현대인의 가장 내밀하고 진실한 어떤 정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시종일관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 우정, 인류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강조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건 개인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꿈’이다.

그 꿈은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성공과 출세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자유로워진 세상에서, 너와 내가 서로 우애를 나누며, 저 끝없이 펼쳐진 세계의 다원성을 누리는 꿈이다. 어쩌면 <진격의 거인>의 에렌이 가장 꿈꾸는 세계는 바로 <원피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원피스>의 루피가 <진격의 거인>의 세계 속에 태어났다면, 에렌과 같았을 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의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갈등, 투쟁, 비교, 경쟁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항상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희망하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바로 그 에렌의 마음, 그리고 언젠가 루피가 되고 싶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이 두 애니메이션이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 마음을 잊지 않게 흔들어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