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희_진실에 대한 용기, 파르헤지아

2017년 9월 29일 발행

미셸 푸코는 프랑스의 사회학자로 최근 학술논문 인용지수(Web of Science)에서 인문학 분야 1위에 오를 정도로 현대의 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이다. 저작활동 초기에 푸코는 <감시와 처벌>과 같은 책을 통해 학교, 병원, 감옥의 구조를 분석하며 감시사회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근대적인 주체가 학교 등의 감시관리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 이후 푸코는 이러한 원형감옥과 같은 통제에서 주체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는 국가와 같은 거대권력의 통치구조를 분석했다. 그리고 <성의 역사>, <주체의 해석학>등의 저서를 통해, ‘자기배려’와 ‘자기통치’라는 새로운 주제를 탐닉한다. 이와 같은 개인윤리들이 도덕과 법, 명령이라는 강제를 통해 주체를 길들이는 권력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력한 파해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배려’와 ‘자기통치’라는 말로 요약되는 후기 푸코의 작업 중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파르헤지아’에 대한 것이다. 파르헤지아'(Parresia)는 고대 그리스어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 정도로 해석되며 그리스-로마철학의 초기부터 중요했던 개념이다. 시민들의 미움을 감수하고도 그들의 무지를 지적한 소크라테스나 제왕인 알렉산더 앞에서 “내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껴 달라”고 직언했던 디오게네스가 파레헤지아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파르헤지아스트)로 꼽힌다. 시민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한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의 심사를 거스른 말을 거듭한 끝에 그의 창 끝에 죽음을 당할 뻔한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는 파르헤지아의 실천에서 위험의 감수가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준다.

파르헤지아의 위험성은 발화자가 용기 내어 밝힌 진실이 대화 상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파르헤지아는 항상 대화 상대자에 대한 비판이나 화자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파르헤지아스트는 자신이 말을 거는 대화 상대자보다 힘이 약하다. 따라서 파르헤지아는 항상 아래로부터 생겨나 위로 향하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를 비판하는 선생이나 부모가 파르헤지아를 행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를 비판한다거나 개인이 다수의 의견에 반대되는 진실을 피력한다거나 학생이 선생을 비판하는 경우, 이런 화자들은 파르헤지아를 행한다고 말할 것이다. 파르헤지아스트는 선동가나 아첨꾼과는 반대로, 민중이 듣기 좋아하는 의견들만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듣기 거북한 진실들을 부르짖으며, 의견의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임무를 담당한다.

그렇다고 파르헤지아가 타인들을 불쾌하게 하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것, (플라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모든 것을 다 말하는 말하기’방식은 아니다. 철학적 중요성이 없는 솔직함은 파르헤지아가 아닌 아튀로스토미아(athurostomia – 문없는 입, 수다스러운 입)에 속한다. 따라서 말할 과 말하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것을 전혀 구분할 수 없고, 말할 때와 침묵해야 할 를 구분할 수 없다면, 그 말하기는 파르헤지아가 아니라 ‘아튀로스토미아’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파르헤지아를 기준없이 사용해 무지한 직설(아마테스 파르헤지아)을 행할 경우, 도시국가가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파르헤지아는 폭력과 정념만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파르헤지아는 훌륭한 교육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훈련, 마테시스(수학)와 파이데이아(인문학적 교육)가 그리스-로마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한편 파레헤지아에 대한 훈련은 이를 수행하는 각 학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스승의 파르헤지아에 엄청난 찬사를 보내면서, 제자들끼리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델을 제안한다. 제자들은 서로에게 숨김없이 자신의 진전과 반복되는 실패, 좋은 사람과 만났던 일, 좋지 않은 사람과 만났던 일 등을 털어놓는다. 스토아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꾸준히 이어지는 서신 교환이나 규칙적인 대화를 활용한 우정 관계로 변조된다. 끝으로 견유주의가 강조하는 파르헤지아는 공적인 장소에 빽빽이 모인 군중을 향한 까칠하고 도발적인 말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파르헤지아에서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가진 확신에 상처를 입히고, 사회적 합의들의 상식선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순진한 자신감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솔직히 말하기’의 다양한 실천들에는 윤리적인 태도로서 ‘자기 배려’라는 공통의 토대가 있다. 단단하면서도 변함없는 자기 통치를 하기 위해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기울여야 하는 이 근본적 관심은, 정기적으로 타자 앞에 불려 나가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 점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동가들의 아첨보다도 더 위험한 아첨,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드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아첨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거침없는 말로 우리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만약 자기 배려가 고독한 자폐의 실천이 아니라 타자와 맺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자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라면, 푸코가 보기에 이 자기 배려의 시작은, 바깥으로 표출되는 단호하고 솔직한 말의 반복 덕분이다.

사람들은 타자의 파르헤지아를 통해 남은 생애를 영위하는 방식에 대해 고심할 마음이 생기고, 나이에 구애받음 없이 배우고 자신을 양성하려는 열망과 의지를 갖게 된다. 파르헤지아의 실천에서 어려운 것은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적으로 아주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로 ‘진정한 파르헤지아스트를 어떻게 알아볼 것이냐’라는 문제이다. 이른바 우리는 에피스테메(참된 지식)와 에우노이아(우정) 그리고 파르헤지아를 모두 갖춘 다른 영혼을 찾아야 한다. 두 번째로 그런 영혼의 스승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파르헤지아가 영혼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카이로스(적기), 즉 개입에 적절한 시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파르헤지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스승(파르헤지아스트)을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파르헤지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르헤지아스트에게 보내야 한다.

파르헤지아스트를 받아들이고 그를 식별하는 것에는 큰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필라우티아(자기애)이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정한 파르헤지아스트를 구별해내는 데 흐릿한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진정한 파르헤지아스트를 식별하는 좀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자칭 파르헤지아스트, 혹은 파르헤지아스트로 간주되는 자가 하는 말과 그의 행동 방식 간의 일치 여부이다. 두 번째 기준은 파르헤지아스트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선택과 견해 그리고 사유상에서의 항구성, 연속성, 안정성, 불변성이다. 즉 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아카데미아의 스승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학교의 교사들이 파르헤지아스트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견유주의학파의 스승들은 항상 모든 삶과 품행의 판단 기준으로서 자유와 자족을 강조했다. 견유주의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규칙, 법률, 사회제도의 자의성에 반대했던 것이다. 법률과 제도에 의존하는 모든 삶에 반해 오롯이 자유롭게 되기만을 종용하는 이런 가르침을 오늘날 교사들이 수행할 수 있을까? 약 200여년간 근대학교는 새로운 생명들이 기성사회에 굴종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길들이는 역할만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각 학교에서 교사의 책무로 중시되는 생활지도는 권력(자)의 규칙에 따르기를 권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배려와 자기통치를 위한 규칙에 따르기를 권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일상에서의 권력구조(관료주의, 나이주의, 성역할주의 등등)에 맞서 싸우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파르헤지아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또한 학생들과 우정과 신뢰를 굳건히 함으로서, 서로에게 하는 쓴소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쓰디쓴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카이로스)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교실내 권력구도에서 아래에 위치한 학생들이 교사와 학교를 향해 파르헤지아의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아낌없이 북돋아야 할 것이다.

참고서적: 담론과 진실 – 미셸 푸코, 오르트망 번역,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