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배드 뉴 데이즈①_주현욱: 새천년 노스텔지아: 반쯤 녹은 마들렌 조각이 우리를 추월했을 때

2017년 11월 2일 발행

<리딩 배드 뉴 데이즈>는 아티스트 콜렉티브, 배드 뉴 데이즈의 크리틱 프로젝트로 11월 2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목요일 크리틱-칼에 게시됩니다. 6편의 글들은 소책자로 묶여 <배드 뉴 데이즈>전시에 비치될 예정입니다. 전시에 관한 자세한 일정은 해당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badnewdayz)를 통해 공지되니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천년 노스텔지아: 반쯤 녹은 마들렌 조각이 우리를 추월했을 때

글: 주현욱

1.

20세기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가? 새로운 시대를 앞둔 1999년은 말로 다 표현 못 할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가올 미래는 그 이름도 새천년이었다. 동네 노래방의 간판에서부터 국민체조의 이름과 민주당의 당명에까지 그야말로 온갖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이름. 아직 아무도 가본 적 없던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모두가 휩싸여있던 그 환희와 두려움은 9살에 불과했던 나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특히나 내겐 이 시기의 광기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99년 12월 31일, 도시괴담이 하나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97년, 98년, 99년과 같이 뒷 두 자리 수만 입력하여 시간을 계산하던 컴퓨터가 햇수를 2000년으로 넘기면서, 1900년으로 시간을 잘못 인식해 전산시스템의 마비가 일어날 것이라는 괴담이었다. 이른바 Y2K, 혹은 밀레니엄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이 버그는 당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Y2K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국가나 기업은 망할 수도 있다는 예언이 판쳤으며1) 이 바이러스로 인해 핵미사일이 오발사 되어 지구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패닉에 가까운 우려 또한 일상적이었다.2) 아버지 또한 무언가가 걱정되었는지 목욕실의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뒀다. 밀레니엄 바이러스로 인해 갑작스레 급수 시스템이 중지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마들렌이 그의 유년기와 한 짝을 이루듯이, 나에게 남한식 아파트 화장실에 흔히 설치된 직육면체의 욕조는 새천년의 광기와 짝을 이루고 있다. 물이 넘칠 듯 찰랑이는 욕조는 오늘까지만 해도 태연히 물이 나오던 수도꼭지가 내일이면 쓸모없는 고철덩이가 되는 것이 미래라는 단어의 무게라고 알려주는 듯 했었다.

물론 새천년의 세계는 그 전까지의 세계와 어떤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지긋지긋한 숙제를 해야 했고 갑작스레 날아온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지도, 외계인이 나타나 인류 탄생의 비밀을 폭로하지도 않았으며 우릴 비웃기라도 하듯,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아주 시원스럽게 나왔다. 이날 느낀 시간의 낙차는 중요한 힌트인 양 내 기억 깊숙한 곳에 흔적을 남겼다. 고작 인위적인 눈금이 한 바퀴 돌아갔다는 이유로 떨던 이때의 호들갑은 “역사적 단절”이 코앞에 있던 시대, 즉 미래가 선명하게 살아있던 때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라고는 4차 산업혁명이 안겨줄 새로운 상품들과 보험사가 점치는 당신의 노후 생활, 증권회사가 예언하는 주식 시장의 블루칩 리스트 밖에 남지 않은 21세기의 사반세기에 굉장히 낯선 질감으로 다가온다. 새천년이란 단어에 잠재되어 있던 미래는 단순한 시간적인 인과 순서로서 더 나중에 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작 숫자 하나의 변화가 세계의 인과망 자체를 재배열 시켜, 새로운 성좌를 형성해 낼 것이라는 어떤 광신적이면서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시선에 가까운 것이다. 2010년대라는 도래한 새천년의 세계에, 그렇게나 자주 들렸던 이 단어가 종적을 감춘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천년”은 우리 시대의 표준적인 기억의 서사망3)에서 망각된, 잃어버린 시간처럼 보인다.

2.

발터 벤야민은 잠재된 기억에 대해 집착스레 탐닉한다. 그는 역사유물론에 늘 따라붙는 “선형적인 진보의 역사관”이라는 오명을 타파하기 위하여, 개인의 기억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역사의 진보—더 정확히는 “중지”—를 읽으려고 한다. 한 개인의 기억 속에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가 과거의 그것과 유사한 다른 사물을 마주침으로써 번뜩 돌아오는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기억의 갑작스러운 회귀는 우리를 조직하는 기억의 서사망을 새로운 모습으로 짜내기도 한다. 이 테마의 원형을 제시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였다.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잃어버린 유년기의 시간들이 총체적으로 되살아나는 프루스트적 기억은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 고르게 조직되어있는 종류의 서사가 아니다. 그 순간은 서사에 의해 제거되어있던 기억이 마들렌과의 연쇄작용에 의해 제멋대로 소생되어, 서사에 빈 구멍을 내며 돌아오는 때이다. 이 빈 구멍은 기억을 조직적으로 운반하던 선로, 즉 서사망을 덮쳐 그것을 중지시키며 개인의 기억-서사망을 그 전까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한다.4) 이와 같은 개인적인 기억-서사망의 위치 전환은 역사적인 기억-서사망에서 역시 찾을 수 있다. 벤야민의 프로그램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기억-서사망 위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억압된 과거—르네상스에 있어서의 고대 그리스, 로베스피에르에 있어서의 고대 로마—를 유토피아로 호명하여 현재의 지배적인 서사를 폭발시키는 것이다.5)

우리들의 시대는 유토피아적 미래가 소멸한 시대라고 흔히 논해진다. 우파 헤겔주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진보하던 역사가 자유주의의 영원한 승리와 함께 종말 했다고 선언한다. 이때의 “역사”는 평이한 사건들의 다발을 의미하는 바가 아닌, 세계의 기억-서사망을 수정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뜻한다. 역사가 종말 했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모순이 지양되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갈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6) 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이에 반박할 수 있다. 후쿠야마는 제거된 줄 알았던 역사적 과거가, 이른바 마들렌 효과에 의해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그는 역사의 무의식을 모른다. 유토피아적 미래는 잠재태의 상태로 기억의 저 밑바닥에 부재하는 채로 현존하며 지금-여기의 시간으로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새천년의 기억은 미래 이후의 오늘날, 역사적 기억-서사망을 재배열 시켜 줄 힘을 가지고 있을까? 구소련이 붕괴한 그 해(1991년)에 태어난 나를 포함한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의 연대기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서사화해내지 못하는 시대에 새천년은 우리가 갖는 유일한 유토피아적 미래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오로지 드래곤볼에서 원피스로, 서태지에서 빅뱅으로, 디아블로2에서 디아블로3로… 등등의 문화적 눈금만이 시계판의 역할을 다하는 세계를 보고 있지 않는가. 후쿠야마의 말마따나 우리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위치 지어줄 어떠한 결정적인 사건도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 오늘날엔 로베스피에르가 고대 로마를 충전된 과거로 호명하여 터뜨렸던 저 유토피아적인 꿈, 예컨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일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 문화적 기억 사이에 끼어있는 “새천년”의 기억은 유별나게 매력을 발산한다. 한 집 걸러 한 집이 새천년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던 그 시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무시간적 지평 아래 깊숙이 파묻힌 이 지나간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적(!) 작업은 유토피아의 기억을 복원하는 중요한 행위가 아닐까? 예술이 하는 일이 이전까지와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예술가들의 과제는 새천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마들렌을 연구하는 일은 아닐까?

3.

그러나 21세기의 사반세기가 갖는 가장 초라한 지점은 마들렌 효과가 더 이상 개인들의 기억-서사망에 빈 구멍을 낼 수 없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마들렌 효과는 조직적으로 동원되며 총체적으로 관리된다. 당장 가까운 편의점만 들러도 형형색색의 상품들이 우리의 서사에서 배제된 기억을 일깨워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1967년에 설립된 롯데 제과는 한국 근현대사를 과자로 대신해 쓸 수 있을 정도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언젠가부터 자신들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레트로 마케팅을 주력으로 삼기 시작했다.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후레쉬민트의 3종 롯데껌이 복고 패키지로 재발매 되는가하면 2017년, 설립 50주년을 맞아 빼빼로, 빠다코코낫, 칸쵸 등의 1970~90년대의 인기 과자들을 첫 출시 당시의 모습으로 포장한 종합선물세트를 출시하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1950~90년대, ‘그때 그 시절’의 칠성사이다를 모아둔 빈티지 에디션을 집으로 사가, 그것을 차례차례 꺼내보며 비자의적 기억 속에 침잠되는 일흔 즈음의 어느 노인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어딘가 섬뜩한 세계에 표류한 게 분명하다.

억압된 기억의 기이한—혹은 기이할 정도로 안전한— 회귀는 음반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디깅digging하는 일로 변한 대중음악의 흐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신들의 운동(?)을 베이퍼웨이브라 자칭한 인터넷 밈은 주로 일본의 80년대 시티팝을 차용하는데 여기에는 해당 시대의 서브 컬쳐나 광고 영상에서 따온 짧은 푸티지가 뮤직비디오의 형태로 루프 되곤 한다. 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에 대한 향수는 시티팝과의 연쇄작용에 의해 서사 안으로 회귀한다. 영원한 현재성만을 담지한 채로, 그 어떤 역사의 연속체도 폭발할 수 없는 뇌관이 빠진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복면가왕, 무한도전-토.토.가2 등으로 과거의 음악들을 알차게 소비하고 있는 남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2016년의 말일, 오래간만에 텔레비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한 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2016 MBC 가요대제전의 테마가 “타임슬립”이었던 것이다. 터보와 S.E.S가 다시 돌아오고 방탄소년단이 김성재의 ⟨말하자면⟩을 리메이크한 이 방송은 너흰 영원히 새로운 해로 넘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잔혹하게 냉소 짓는 듯했다. 지나간 시대에 깊숙이 박혀있던 히트송들을 우연히 다시 듣는 일은 더 이상 표준적인 기억-서사망에 빈 구멍을 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들이 무한한 현재성 아래에서 자유자재로 교차되는 것이 표준적인 기억-서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프루스트가 비극적으로 뒤집혔음을 반박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프루스트가 열어 보이는 영원성은 한계를 넘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교차된 시간이다.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형태의 시간의 진행, 곧 교차된 형태의 시간의 진행이다(…) 성찰이 아니라 현재화가 프루스트가 행한 방식이다.”7)

모든 것이 이미 현재의 타임라인에 귀속되어있는 지금,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을 끊어내기 위해 저 현재의 시간 안에 잠재된 기억에 기대를 걸었던 벤야민은 역사의 복수를 당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들은 소환되는 순간부터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탄탄한 서사 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교차된 시간들 중 “미래의 기억”에 해당되는 새천년은 이를 상회할 수 있을까? 현재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광기로 충전된 저 새천년의 기억만은 기억의 식민화에 대항할 수 있는가? 실망스럽게도 우리들의 시대는 미래의 기억조차 점령이 끝난 후처럼 보인다. 레트로 퓨처리즘이라는 유행은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의 이미지들을 소비한다. 매트릭스(1999)에 나왔던 선글라스가 다시 유행하는가 하면 19세기 만국박람회의 사진집이 다시 인기를 끈다. SF는 좀비처럼 —죽은 채로—살아남았다. 다시 돌아온 스타워즈(7, 2015)와 스타 트렉(리부트, 2009),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2049, 2017)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5년이라는 미래에 도착했었던 자글자글 주름진 브라운 박사와 아랫배가 불룩 나온 마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8)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중, “시간여행자”라고 이름 붙여진 페이지가 있다. 약 18만 명의 팔로워(2017. 10. 기준)를 거느린 이곳은 까마득히 쌓여있는 과거의 아카이브 속에서 재미난 사진, 혹은 영상을 발굴하여 게시한다. 1970~80년대 포항의 풍경을 담은 기록 사진이 올라와 당시의 포항에 대한 기억에 없는 포항인들에게 흥미를 선사하는가 하면, 영심이(1990)의 숫자송이 올라와 이 만화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식이다. 여기엔 경향신문에서 발간했던 잡지, 《매거진X》의 1995년 호에 실린 제법 유명한 기사 또한 게시되어있다. 이 기사는 당시로부터 20년 후인 2015년의 여대생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SF적인 공상을 주제로 한다. 환태평양 연합대학에 다니며 온갖 미래 통신장비들을 장착한 가상의 여대생 고은비(20)씨는 1995년의 유토피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유토피아가 얼마나 키치 하게 소비될 수 있는지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는 태도에서는 낯선 과거의 약간 병맛 나는 판타지를 즐기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읽히지 않는다. 어느 날 이 페이지에 내 개인적인 기억 속에 파묻혀있는 저 Y2K 바이러스 대비용 욕조가 등장한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당장 그것이 게시된다 해도 이는 별 위화감 없는 일일 것이며 나는 새천년의 기억까지도 영원한 오늘의 세계에 포섭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이를 통해 우리는 벤야민이 새로운 역사유물론의 공식을 내세운 시대와 우리들의 시대는 분명 다른 법칙의 기억-서사망이 작동하는 세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억압된 기억이 저 악명 높은 대문자 역사의 목을 칠 때, 새로운 서사망이 구축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저주스러운 형태로 이미 실현이 되어버렸다. 칸쵸/산도/뽀또가 온갖 미시적인 기억들을 떠들어대는 소란만을 남긴 채, 잠재된 기억이 파산해 버려서 그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세계도 호출할 수 없는 형태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심지어 앞면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뒷면에는 발터 벤야민이 새겨진 동전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성급하게 벤야민을 폐기하기 전에 그의 공식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을 추출해내야 한다. 즉 복잡하게 뒤얽힌 그의 테제 속에서 역사의 상수constant와 역사의 변수variable를 구분해야 한다. 벤야민의 역사의 상수, 즉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그의 테제는 “여전히 억압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틀림없다. 자유주의의 승리를 끝으로 후쿠야마식의 유토피아가 도래한 셈이라면 다시금 돌아왔던 저 2008년의 대공황과 도무지 끊이지 않는 실업 사태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가 지속되는 한 항상적으로 유지되는 모순의 표출일 것이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터지는 무차별 테러와 이데올로기적 믿음의 끔찍한 복귀인 IS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억-서사망을 재배치시킬 어떠한 “비판적인 기억”도 존재하지 않으나 여전히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억압된 것의 회귀일 테다. 그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억압된 무언가가 변화된 자본주의에 역사의 상수로서 남아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다만 역사의 변수인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그들의 손에 볼모로 잡혔을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시대의 변수에는 어떠한 억압된 기억이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변수는 대문자 역사의 종말이라고 칭해지는 동구권의 붕괴를 기점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90년대는 그전까지와 다른 시간의 자장이 등장하는 때였다. 소위 역사의 종말과 함께 대문자 역사를 통해 지배되던 기억-서사망이 문화적인 것의 지배로 대체된 것이다. 90년대는 스스로를 서사화하기 위해 20세기 전체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친구(2001), 말죽거리 잔혹사(2004), 써니(2011), 응답하라 시리즈(2012-2016)와 같은 노스텔지어 산업의 범람은 이러한 소급 과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법칙에 의해 움직이던 과거를 90년대 이후의 기억-서사망을 통해 순탄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처리하는 인코딩 과정이다. 이것은 그전까지의 기억-서사망이 작동했던 방식과 비교해볼 때, 90년대 이후의 시대가 처한 막다른 길을 들춰내 보인다. 예컨대 80년대는 과거를 당시의 기억-서사망을 뒤흔들 “잃어버린 시간”으로 기억하려 했다. 79년에 초판이 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군부독재에 의해 짜여진 당시의 기억-서사망을 재조직하기 위해 45년, 해방의 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80년대 운동권에게 해방을 기억하는 일은 해당 시대를 그 꼴로 만든 결정적인 단서를 더듬는 일이었다.

반면 오늘날 역사적 사건들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21세기의 새로운 서사망 위에서 그것들은 기억할 수 있는 여러 사건의 다발 중 한 가지로, 혹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순탄하게 작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80년 5월의 광주를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리얼리즘적 서사에 위치시킨 택시운전사(2017)는 광주의 기억을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같은 문화적인 것으로 축소시킨다. 또한, 광주민중항쟁의 무대였던 구 전남도청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선 것은 기억-서사망의 재조정 이후, 광주가 어떻게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의 관광 산업 안에서 랜드마크로서 서사화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2017년,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의 해에 도착했다. 자본주의를 지양해야 할 역사적 단계로 상정한 1917년의 혁명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혁명적 충동: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부흥A Revolutionary Impulse: The Rise of the Russian Avant-Garde》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의 100주년을 기린다. 미술관을 불태우자는 구호를 앞세웠던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관 안에서 너무 순탄하게 기억될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100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이들은 이미 문화적 기억 안에서 스스로를 서사화할 수 있는 견고한 위치를 부여받은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역사를 망각하는 일에 공모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대문자 역사야말로 우리 시대의 억압된 기억일 것이다. 대문자 역사는 흡사 마들렌에 의해 배제된 기억들이 돌아올 가능성을 억압하는, 프루스트적인 기억의 정반대 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만연한 시간 여행자용 마들렌보다도 훨씬 더 깊숙이 프루스트적인 기억에 가깝다. 프루스트적 기억은 배제된 기억의 회귀를 통해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을 “재배치” 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마들렌이 망각에서 벗어나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에 빈구멍을 내며 도래하는 순간은, 그를 통해 다른 모든 기억들을 설명하는 서사가 창출되는―“새로운 대문자 역사”가 도래하는― 때이다. 오늘날 이 연결고리가 깨져서 마들렌만이 범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은 미시적인 사건들에 담긴 모든 의미들을 지우고 새로 쓰는 시간, 즉 대문자 역사일 것이다. 우리는 뒤집힌 벤야민이 변혁을 봉쇄하는 비극적인 세계에서 이 무기를 다시 우리의 것으로 개조해야 한다.

마들렌을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서사로, 그리고 대문자 역사를 우리 시대의 억압된 기억으로 상정하는 것은 꽤나 고된 사고의 전환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단계 더 복잡한 사유가 필요하다. 대문자 역사는 마들렌이 추동했던 유토피아적인 기억처럼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대문자 역사의 역할을 했던 기억들은 이미 21세기의 기억-서사망 아래에서 서사화가 완료되었다. 그것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은 평이한 사건에 대한 문화적 기억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이전에 작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 위로 자리를 옮기며 그 전까지의 의미가 빈 구멍이 되었다는 점일 테다. 이것은 예컨대 “한때 기억 가능했던 것이 지금은 그렇게 기억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진술과 같은, 순수한 부정태로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예술이 하는 일이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탐색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우리 시대의 기억-서사망에서 대문자 역사가 얼마나 기억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역설적인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동시대의 기억-서사망이 너무 순탄하게 처리해낸다는 점에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저 기억들―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해방, 군부독재, 5월 광주, 87년, 새천년 등―이 갈라지는 모순점까지, 서사를 횡단하는 일이다.

5.

한때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의 폭발제로 기대되던 모든 외부의 것들이 그 적들에게 사로잡힌 이 2010년대의 시간은 꿈꿀 수 있는 일말의 유토피아도 존재할 수 없을까? 어쩌면 그럴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어떤 유토피아도 직접적으로 연역할 수 없는 오늘날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이 과정을 생략하고 기억 가능한 유토피아를 더듬는 일은 매력적인 함정이다. 그것은 짐짓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에 반항하는 듯 보이나 새로 짜여진 기억-서사망과 대립적으로 공모한다. 나의 새천년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문화적 기억에 포섭되어서 즐길 수 있는 소소한 과거들 중 하나가 된 것처럼. 이러한 기억하기는 나뿐만 아닌 동시대에 행해지는 많은 급진적인 운동들이 가지는 충동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기억의 물신화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모든 기억이 지배적인 기억-서사망의 식민지가 된 세계에서, 다른 서사의 가능성은 그것의 외부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것 내부의 모순에 있을 것이다. 이를 인식하는 비판적 시각을 창안하는 것은 그러한 서사의 모순을 보기 위한 서사를 만든다는 점에서 여타 가짜 유토피아보다 더욱 급진적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기억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브레히트의 유명한 말을 빌어서 이렇게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의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었던, 좋았던 옛날에서 시작하지 말자. 나쁜 새로운 날에서 시작하자.

주현욱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고민을 원료로 작업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미술 형식을 통해 미래를 선취하려고 했던 아방가르드가 패배한 이후, 모든 형식이 곧 예술이라며 긍정하는 다원주의 시대에 그것의 형식적 적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시대 예술의 샘플링 리스트 안으로 얌전히 귀속되지 못하는 오브제들을 찾아 헤맨다. 이것은 출구 없는 지금 여기의 자본주의에서 세계의 파국을 갈망하기보다는, 돋보기를 들고 유령처럼 남아있는 억압된 것을 찾으려는 태도와 같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방가르드에 대한 철저한 배신임과 동시에 철저한 갱신이라고 감히 주장하려고 한다.

2016년 6월, ⟪안무랩: 여전히 안무다⟫에서 ⟨21세기를 위한 SF 안무⟩를 시연했으며 같은 해 12월, ⟪격변! 미지로부터 코레아⟫에서 ⟨프로즌 슬립/타임 슬립⟩을 발표했다.


1) “지금 세계는 Y2K 전쟁 (1) 뉴밀레니엄 D-100”, 《매일경제》, 1999년 9월 23일, 1면.

2) “핵미사일 오발사…원전사고… ‘현실’로 다가오는 Y2K 악몽”, 《경향신문》, 1999년 03월 04일, 8면.

3) 특정한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 가능한 것으로 처리해 줄 서사가 필요하다. 이하의 본문에선 서사의 논리 회로를 ‘기억의 서사망’, 혹은 ‘기억-서사망’이라고 칭할 것이다.

4) M.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p. 85-91.

5) W.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 최성만 옮김, 길, p. 345.

6) F.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7) W. 벤야민, “프루스트의 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9》, 최성만 옮김, 길, p. 252-253.

8) 백 투 더 퓨처(1985)의 등장인물. 백 투 더 퓨처 2에는 이들이 1985년 10월 21일로부터 30년 후인 2015년 10월 21일로 시간여행을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실제 2015년 10월 21일, 지미 키멜 라이브는 30년을 늙어버린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작중의 타임머신을 타고 쇼에 등장하는 장면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