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_‘겨울왕국’은 어떻게 전 세계를 사로잡았는가

2017년 2월 11일 발행

정지우 (분노사회, 청춘인문학 저자)

안타까운 마녀와 철없는 공주의 이야기

2013년 11월 19일 미국에서 처음 개봉된 월트 디즈니의 <겨울왕국Frozen>은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며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2014년 1월에 개봉하여,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어른들의 마음도 울리면서 온 세계가 <겨울왕국>에 사로잡힌 겨울을 보냈다.

<겨울왕국>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캐릭터나 스토리는 전혀 다르다. 일일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두 작품은 별개의 양상을 보이는데,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여왕’의 차이다. <눈의 여왕>에서 여왕은 전형적인 ‘마녀’로서 비인간적 성품을 가진 악역으로 등장한다. 수많은 동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마녀 악역’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겨울왕국>은 그러한 동화 속의 마녀가 어떻게 마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적 동화 속 마녀를 미워하고 무서워한 경험은 있지만, 마녀가 어떻게 마녀가 되었는지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겨울왕국>의 주인공인 ‘엘사’는 온 세상을 얼리는 마녀가 된다. 그러나 관객은 한 순간도 그 마녀를 미워할 수 없다.

영화는 이후 마녀이자 여왕이 되는 ‘엘사’와 그녀의 동생 ‘안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엘사는 모든 것을 얼리는 마법(혹은 저주)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릴 때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안나와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엘사가 성장하면서 마법이 점점 강해지게 되고, 안나가 위험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이후 엘사는 마법을 감추고 자기 방에서 ‘문을 닫고’ 숨어 지내게 된다. 또한 안나를 보호하기 위해 안나에게서 엘사의 마법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두 자매는 서로 격리된 채로 청소년기를 보낸다.

영화는 엘사와 안나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그들이 서로 분리된 채 지낼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기, 그리고 이후 그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과정까지를 매우 빠른 속도로 보여준다. 엘사가 자기 내면을 억누르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이나, 안나가 엘사를 그리워하며 함께하고 싶어하는 마음 등은 모두 ‘뮤지컬’로 표현된다. 음악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매체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은 이 영화의 구성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결국 부모가 사고로 죽고, 엘사가 성인이 되자 대관식이 열린다. 엘사를 여왕으로 임명하는 이 대관식 날, 엘사는 오랫동안 숨어왔던 생활을 접고 처음으로 성의 ‘문을 연다.’ ‘문’은 이 영화에서 핵심적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영화의 초반부에서 안나가 ‘사랑은 열린 문(love is an open door)’이라고 하여 끊임없이 문을 열기를 노래한다면, 엘사는 ‘문을 닫고(slam the door)’ 자기만의 세계로 나아간다.

문제는 안나가 한스 왕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난다. 이후 밝혀지지만, 한스는 사실 엘사와 안나의 아렌델 왕국을 차지하게 위해 전략적으로 안나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러나 철없는 안나 공주는 한스 왕자와 첫 사랑에 빠지고, 만난 그 날 엘사에게 가서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 부린다. 엘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하게 되고, 둘의 다툼 도중 안나가 엘사의 마법을 봉인한 장갑을 벗기게 된다. 결국 엘사는 마법을 조절하지 못한 채 위협적인 얼음 마법을 사용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마녀라는 사실을 들켜버린다. 그러자 엘사는 높은 북쪽의 산으로 달아나게 되고, 안나는 그녀를 찾아 뒤를 쫓는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악역 역할을 맡은 한스를 비롯해, 안나와 엘사, 그리고 이후 안나와 사랑하게 되는 크리스토퍼까지 사실상 부모를 상실한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한스는 왕가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이고, 크리스토퍼는 처음부터 고아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모두 상처 받았으며 결핍된 존재이고 사랑이 필요하다. 한스가 그러한 상태를 자기 욕심과 야심으로 극복하고자 악역이 되었다면, 엘사는 그 상처를 감추고 자기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다 마녀가 된다. 반면 안나는 끊임없이 ‘문을 열어(opening door)’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고자 함으로써, 서로를 이어준다.

이처럼 <겨울왕국>에는 외적인 갈등이나 구성보다도, 내면적인 갈등과 상처 등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더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 동화나 만화는 선악의 대립이나 외적으로 일어난 사건, 갈등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반면, <겨울왕국>은 이처럼 내면적인 과정이 이야기로 외화(外化)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미묘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재밌고 극적인 이야기를 본 게 아니라, 안나와 엘사의 마음 전체에 흠뻑 담겼다 나온 기분을 받는다. <겨울왕국>에서 마녀와 공주는 더 이상 미움과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나도 마녀가 되고 싶다

대관식 날, 사람들로부터 달아난 엘사가 혼자 눈 덮인 산을 오르는 장면은 <겨울왕국>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때 부르는 노래가 ‘let it go’이다. 이 장면에서 엘사는 웅장한 설산들을 배경으로 고독과 자유를 노래하는데,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엘사는 이제껏 자기 자신을 감추고, 느끼지 않고,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며(conceal, don’t feel, don’t let them know) 착한 소녀가 되고자 했던(be the good girl) 날들을 되돌아본다. 이제 모든 걸 망쳐버렸고, 더 이상 착한 소녀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절망과 도피의 순간에, 그녀는 자유를 경험한다.

엘사는 더 이상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릴 때부터 억눌러오기만 했던 자기 안의 힘(마법)을 이제 마음껏 분출할 수 있다. 그녀는 한계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규칙도 없다(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는 걸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롭다(I’m free)’라고 외친다. 이제 홀로 선 이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치솟아 오르고(My soul is spiraling), 세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의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힘과 자유와 고독’에 사로잡혀 마녀는 완성된다. 엘사는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고(slam the door), 얼음 성을 쌓아올려 온 세계를 얼려버린다.

마녀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을 이토록 희열에 가득 차서, 관객의 공감을 끌어당기며 노래한 영화는 모르면 몰라도 <겨울왕국>이 처음일 것이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힘의 극한을 느끼고 분출하는 기분, 순수한 해방과 자유의 느낌, 그렇게 문을 닫고 자기 안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리는 창조의 순간(It’s time to see what I can do to test the limits and break through)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상태다.

원자화된 개인들, 낭만주의로부터 탄생한 이 현대의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열정을 원한다. 순수하고 무한한 자유는 모든 ‘원자’의 꿈이다. 어린 아이들은 솟아오르는 얼음 계단과 얼음 성에 열광하지만, 어른들은 그녀가 누리는 힘의 기분에 빠져든다. 실상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타인들의 시선, 비교, 잣대에 시달리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가? 그 속에서 나의 잠재성, 열정, 꿈이라는 것은 발휘되거나 실현되어보지도 못한 채 짓눌리며 고개 숙인 채 살아간다. 이제 엘사는 상처받고 저주받은 아이에서, 최고의 재능과 운을 타고난 대상으로 찬양된다.

이처럼 <겨울왕국>은 유럽 중세의 환상 동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인의 마음을 적중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는 엘사의 동생, 안나 캐릭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안나의 행동이나 성격은 중세 공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발랄하고 철부지인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대관식 날, 안나가 파티에 들떠서 노래 부르는 장면이나, 첫사랑에 빠져 결혼하겠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은 우리들의 스무 살 때와 다르지 않다. 과거의 순수하고 착하기만 했던 백설공주와, 왈가닥에 겁 없는 안나 공주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리고 현대의 아이들과 어른들은 후자를 더 사랑하고, 후자에 더 깊이 공감한다.

다른 캐릭터들 역시 비슷한 구도를 보인다. 원래 공주를 구해야 할 왕자가 <겨울왕국>에서는 안나를 속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야심가로 묘사된다. 그런데 한스 왕자가 그런 야심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스에게는 여러 형들이 있고, 자신은 막내로 태어나서 사실상 다른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면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에 따른 욕망과 야심은 우리 현대인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우리는 한스를 미워하면서도 그를 이해한다.

안나와 이후 로맨스를 이루게 되는 크리스토퍼도 결코 운명적이고 멋진 남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에 안나와 크리스토퍼가 티격태격하는 과정은 옛 동화의 우아한 로맨스 보다는, 『오만과 편견』 이후의 하이틴 로맨스적 구도를 더 닮아 있다. 크리스토퍼는 안나를 구해주기 보다는, 경제적 이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안나가 심장에 저주를 입자 트롤에게 데려가거나, 마지막에 안나를 구하기 위해 눈보라로 뛰어드는 모습 등은 커져가는 사랑을 보여주지만, 최종적으로 크리스토퍼가 안나를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진 않는다.

다시, <겨울왕국>의 성공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미묘한 결합이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해리포터 시리즈>나 <슈렉>의 성공과도 맞물린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중세 마법적 세계관을 현대 세계 및 인물과 결합시킴으로써, 마치 우리 삶과 세상에 마법을 실제로 끼얹히는 것 같은 ‘묘한 환상’을 선사했다. <슈렉>은 노골적으로 과거 전통적 동화들의 구도를 뒤집어엎고 현대적 유머를 선사함으로써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겨울왕국> 역시 안데르센의 오래된 동화 속에 우리 현대인의 욕망과 삶과 사랑을 집어넣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환상’을 통해 들여다보게 하는 알레고리를 성사시켰다.

“누구도 혼자이길 원하진 않아.”

<겨울왕국>은 상처받은 두 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들이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멀어지며, 각자의 길을 찾아가다가 다시 사랑으로 결합되는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가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인 데 반해, 이 영화는 자매간의 우애 즉 형제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진실한 사랑은 멋진 왕자와의 로맨스도 아니고, 호감을 느끼게 된 남자와의 애정도 아닌 서로의 깊은 상처를 매만지고 복원하는 ‘혈육의 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형제애’가 또다시 현대인의 마음을 적중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현대의 개인들은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어느 날 만나게 된 운명적인 상대가 구원을 선사해준다는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에 이미 질렸을지도 모른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성적 욕망이라는 에로스에 기반을 둔 애정은 결코 영원하지도 운명적이지도 않다. 높은 이혼율, 가정불화, 권태기와 불륜이라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더 강하고 진정한 ‘우애’를 찾고 있다.

우애는 현대 사회가 내버린 공동체의 유대를 향한 오랜 회귀의 꿈이다. 고독한 우리네 삶에서, 그래도 가장 강력하고 영원성에 가까운 감정을 찾고자 했을 때, 그 감정은 혈육에게서 발견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그리고 <겨울왕국>에서처럼 부모를 잃고 자매 둘만 남은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형제애는 그 어떤 애정보다도 강력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는 혼자 엘사에게 가려는 안나를 말리면서 ‘엘사는 혼자 있기를 원할 거다’라고 말하지만, 이에 안나는 대답한다. “누구도 혼자 있길 원하진 않아(Nobody wants to be alone).”

<겨울왕국>의 결말이 자매간 소통과 사랑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또한 주된 스토리가 엘사를 찾아 떠나는 안나의 모험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이 영화는 가족애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남녀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안나와 한스 왕자의 사랑은 배반으로 이어지지만, 안나는 크리스토퍼라는 새로운 연인과의 로맨스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전통적 동화에서 보여 왔던 식의 운명적이고 우아한 로맨스는 아니다. 이미 이 영화는 그러한 로맨스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있다. 크리스토퍼가 안나를 자신의 트롤 친구들에게 소개해줄 때, 트롤들이 부르던 노래(‘Fixer Upper’)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랑관을 잘 보여준다.

트롤들은 상대에 대한 환상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의 단점과 결핍, 부족한 점을 아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쳐야 할 부분들이 있다(Everyone’s a bit of a fixer-upper). 사랑은 바로 그 문제를 교정해주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멋진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지 결핍과 문제가 있는 존재가 서로의 문제가 고쳐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다. 트롤들은 ‘작위적’으로 상대를 고치려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 모든 걸 되돌려줄 것이다.

이런 사랑관은 동화의 사랑 보다는 더 세부적 현실을 다룬 소설에 어울리는 사랑관이다. 동화는 순수하게 표백된 세계나 캐릭터를 보여주지만, 근대 이후의 리얼리즘 소설은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길 지향해 왔다. 환상적인 세계관 속에서 귀여운 캐릭터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사실 <겨울왕국>은 더 리얼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국 <겨울왕국>이 말하는 사랑은 가족애와 이성애를 모두 포함하고, 그러한 애정을 형성하는 더 깊은 ‘사랑’이다. 그 진실한 사랑은 트롤들의 노래처럼 ‘최고의 결실(True love brings out their best!)’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사랑이 사라진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수많은 대중음악과 대중영화에서 로맨스를 속삭이지만, 이처럼 진지한 사랑, 모든 걸 바꾸는 위대한 사랑이 어느덧 사라져버린 시대에서 <겨울왕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와 연결이 모두 이루어진 세계

아마 <겨울왕국>을 보고 나면, 누구나 조금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은 엘사가 설산을 오르며 부른 ‘let it go’에 열광했다가, 얼마 안 가 자신을 자책하는 엘사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온 세상을 얼려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은 자유로울 수도 없고(I can’t free) 저주를 조절할 수 없다(I can’t control the curse)며 괴로워한다. 관객은 이 시점에서, 극대화된 자유가 매우 매력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파괴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끔 강요당한다.

안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안나가 부르던 ‘love is an open door’을 들으면서 첫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고, 그녀와 한스 왕자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러나 결국 한스 왕자가 안나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처음의 ‘응원해주고 싶던 마음’을 관객 스스로 버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의 황홀한 기분이 사실은 거짓된 환상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관객은 ‘let it go’와 ‘love is an open door’에 열광하면서도, 그 열광을 온전히 승인할 수 없다. 결국 자유에는 절제가 필요하며, 사랑의 열림(연결)에도 조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동화의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진실이다.

이처럼 <겨울왕국>은 동화적 세계관이 아닌 리얼리즘적 세계관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자유와 연결을 원한다는 현대인의 역설적인 욕망은 이 영화에서 완벽한 알레고리로 형성되고 있다. 영화는 ‘문을 닫고’ 고독한 자유를 열망하는 엘사와, ‘문을 열어’ 이어지고자 하는 안나의 욕망을 축으로 삼고 있다. 자유와 연결, 현대인은 그 두 가지 욕망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현대인은 각자 자기만의 꿈과 신화를 찾아서 열정을 불태우며 ‘높은 곳’으로 상승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우애를 나누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모두 현대의 주요한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제한되지 않은 자유는 사회를 극심한 경쟁 구도로 몰아가면서, 현대사회를 약육강식의 모델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한 지나친 연결은 특히 각종 SNS 관계망의 확장을 통해 나타나는데, 이러한 휘발적이고 피상적인 온라인 관계망이 오히려 진정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현대인은 극대화된 자유 속에서 고독해지며, 피상적인 연결 속에서 왜소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반영하듯, <겨울왕국>에서 엘사는 자유를 조절하고 절제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렇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보다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안나 역시 무조건적으로 타인과 세상에 ‘열리고자’ 했던 욕망을 조절하여 ‘선택적 사랑’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 두 가지 모두에는 각자 실패의 경험이 있었다. 엘사는 자기 자유로 안나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혔고, 안나는 한스로부터 사랑의 배신을 당했다. <겨울왕국>의 성공은 기나긴 결핍과 단절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사랑의 실패를 경유해, 결국 자유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결말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진정한 자유는 사랑을 통해 가능하고, 진실한 사랑 역시 자유를 통해 가능하다는 진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겨울왕국>이 기존의 동화와 유사한 결말에 이르면서도, 혁신적으로 달라진 지점은 이처럼 그 과정이 보여준 ‘역설’에 있다. 엘사와 안나는 각자 자유와 연결이라는 테마를 품에 지니고, 그것들이 가진 문제와 가능성을 몸소 겪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만났을 때, 이 세계가 완성된다. 이처럼 역설적인 세계를 체현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 동화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할 만하며, 앞으로 ‘새로운 동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실의 역설적 과정을 반영하면서 동화적으로 완결되는 <겨울왕국>의 묘미 덕분에 우리는 그 세계에 흠뻑 빠져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동화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예술 장르는 시대와 상호작용하며 늘 새로워진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며, 그들을 위한 이야기도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 <겨울왕국>은 픽사와 결합한 이후 디즈니가 기존의 정서를 완전히 탈바꿈하여 새롭게 탄생시킨 첫 ‘성공작’이라 불린다. 늘 새로운 동화를 꿈꿔왔던 픽사와 전통적 동화를 재창조하고 했던 디즈니가 만나, 드디어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전통과 현대의 결합뿐만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각종 예술 장르간의 상호 융합 속에서 더 큰 호응을 얻었다. <겨울왕국>의 ost는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 음악 차트를 휩쓸면서 음악적으로도 큰 성취를 거두었다. 영화 내에서 그려지는 귀여운 캐릭터들과 웅장한 배경,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앵글의 기법이나 마법 효과의 자연스러운 연출 등은 모두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었다. 뛰어난 음악, 미술, 그래픽 등은 현대적 이야기와 전통적 세계관에 성공적으로 결합하면서 <겨울왕국>을 종합 예술로 완성시켰다.

이처럼 많은 요소들이 <겨울왕국>의 성공을 이해하게 하지만, <겨울왕국>이 완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초반부의 너무 급속했던 이야기 진행은 ‘뮤직비디오’적인 연출 덕분에 어느 정도 무마되긴 했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영화 내내 이어져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와 캐릭터, 반전을 담느라 전개의 완성도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디즈니의 시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동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는 갈수록 좁혀지고 있다. 아이들은 일찍이 인터넷을 체험하면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어른들 역시 각종 판타지 콘텐츠의 성행에서부터 키덜트(Kidult)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과거 아이들의 영역이라 불러왔던 것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에 따라, 동화는 아이들의 순수한 심성을 보존하던 굳건한 영역에서 서서히 ‘아이와 어른’의 경계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동화의 변화는 어쩌면 새로운 시대성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제 어디에서도 오직 과거의 것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굳건함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모든 것은 용해되어 서로의 영역을 상호침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동화는 어린아이와 어른이 함께 만드는 세상, 그들이 함께 누리게 될 ‘용해된 세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의 현실주의는 아이의 이상주의에 녹아들고, 아이의 순수함은 어른의 냉소주의에 녹아든다. 그렇게 새로운 동화는 더 조화로운 세계를 찾아나가고 있다.

* 이 글은 아동문학사상 2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