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강신대 작가론: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가 낳은 불투명한 광경들

2017년 10월 31일 발행

강신대의 첫 작업인 <루드비코: 미적 향연의 이미지>(2014)는 911 테러, 미군, 이라크 전쟁, 북한 같은 것과 관련된 이미지와 파일명이 안락한 방이라는 콘셉트의 장소에서 동기화되는 작품이다. 누구든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이 작업을 경험한다면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 나오는 루드비코 프로그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고안한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대상자의 전신을 결박하고 폭력이나 선정적 장면이 담긴 장면을 구역질이 날 때까지 억지로 시청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뇌 프로그램을 거친 이는 정부가 규정한 나쁜 욕망을 통제받게 된다. 물론 <루드비코: 미적 향연의 이미지>(이하 루드비코)에서 이미지가 다뤄지는 방식을 살펴보면 강신대가 루드비코 프로그램에서 더 주목한 것은 정부로부터 개인의 자유의지가 통제되는 것보다는 폭력이나 선정적 이미지를 통한 피험자의 세뇌인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루드비코>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폭력, 혐오 선정성에 대한 정보들이 반강제적으로 우리의 일상을 관통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훑어보면 런던 아파트 화재 참사, 미국 버지니아주 총기 난사 혹은 국제동맹군이 시리아에서 백린탄을 사용했다는 외신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 속 루드비코 프로그램
강신대, <루드비코:미적 향연의 이미지> 설치 전경, 2014, 2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 3분 25초, 5분 28초

우리는 매일 이 같은 참혹한 현실을 휴대전화기 액정이나 모니터를 통해 보면서 곧 휘발해버릴 가벼운 분노를 느끼거나 어떤 감정도 조직하지 않은 채 무감각의 등껍질 속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강신대가 <루드비코>를 구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루드비코>는 무감각한 일상을 가속시켜 우리가 무감각의 낭떠러지에 빨리 가닿게 하는 수단 중 하나이거나 혹은 우리의 무감각한 일상과 현실이 0.1초라도 반전되는 출구의 너머일까. 작가가 영상의 몰입을 유도하면서도 이미지의 파일명을 병치시켜 몰입을 방해해 감상자가 실재를 지각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루드비코>의 지향점은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강신대가 <루드비코>를 통해서 감상자가 실재를 지각하길 바란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언어, 종교, 법, 돈 같은 것들을 통해서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실재의 지분을 높여야 한다는 것일까. 최근 강신대가 신작을 제작하며 언급한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는 우리의 현실이 실재와 1:1로 교환된다고 하더라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실재는 오히려 자기반성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루드비코>는 실재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끝없이 저항하는 실재에 대한 고민이거나 자기반성적 시간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혁명에 대한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계단을 몇 개 건너뛰어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2016)1)를 살펴보자. 이 작업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조합해서 만든 가상의 슬럼(slum)이 장엄한 음악과 함께 약 15초 단위로 반복되는 작업이다. 여기서 가상의 슬럼은 마치 목소리가 없는 물고기처럼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서조차 좀처럼 파국으로 호출되지 않는 세계의 모든 슬럼을 은유한다. 이 작업에서 특이한 점은 유튜브의 다음 동영상 자동 재생 기능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지와 파일명을 병치시켜 감상자의 몰입을 방해했던 <루드비코>의 방법론과 유사하다.2) 그러나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의 방법론은 <루드비코>보다 더 냉정한 기운이 감돈다. 그 이유는 몰입과 방해로 이어지는 반복의 간격이 단 15초뿐이기 때문이다. 15초의 간격은 몰입을 위한 시간 자체를 비웃으며 가상의 슬럼을 1분 만에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루드비코>는 병렬화된 사건과 시간이 록음악 위에 나열되며 나름의 연속성을 만들지만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아예 사면이 닫힌 이미지와 시간만을 무한반복 시키면서 가상의 슬럼을 바라보는 감상자를 작업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감상자가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서 등을 돌리는 이유는 대부분 반복되는 영상에 대한 지루함 때문일 것이다. 감상자를 작업 밖으로 밀어내는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루드비코>에서 강신대가 말한 실재의 지각을 경험하기 더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반성적 시간이 작동할 수 없음을 더 처절하게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강신대는 <루드비코>에서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로 이어지는 궤적을 통해 옅은 희망과 진한 절망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색무취한 현재의 반복뿐이라는 사실을 읊조리는 것일까.

<#dmz>(2015)3)와 <0416 실시간>(2016-2017)4)은 앞서 언급한 두 작업의 사이와 이후를 넘나들며 한국사회의 절망적인 현실을 무표정하게 드러낸다. <#dmz>와 <0416 실시간>은 실시간 이미지 수집 알고리즘(이하 알고리즘)과 키워드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포획한 인터넷 이미지를 감상자에게 무차별 발사한다. 특이하게도 강신대가 선별한 키워드에 포획된 이미지들은 백만 장 넘게 누적되다가도 일정 수준 누적되면 모두 삭제된다. 왜 그럴까. 두 작업에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누적되어 온 상흔들을 상징하는 ‘korean war’, ‘종북’, ‘국가보안법’, ‘빨갱이’, ‘천안함’, ‘세월호’, ‘촛불좀비’, ‘삼성’, ‘박근혜’ 같은 키워드들이 이미지 포획에 사용된다. 이러한 키워드들은 작가가 dmz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도출한 것들이다. 따라서 강신대의 정치적 입장은 적어도 이미지 수집 알고리즘에 입력되는 키워드를 통해서 두 작업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의 정치적 입장은 포획된 이미지가 비물질적인 공간에서 무수히 누적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휘발되다가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는 시점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강신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 알고리즘을 통해서 휘발되는 것은 정치적 견해조차 주관적 사유나 감각으로 치환하는 예술에 대한 환상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강신대의 이러한 시각은 예술작품이 표현하는 정치적 비판성이 작가주의라는 폐쇄된 시공간에서 소비되는 행태에 대한 경계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치적 비판성을 내세우는 작가와 작품 역시 현실 속에서 돈, 법, 기술, 생존, 인정에 예속된다는 점에서 강신대의 관점은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노재운_수퍼 인터페이스_디지털 출력_가변크기_2001~4

강신대는 작가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알고리즘이 사회정치적 표상을 실시간으로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강신대가 생각하는 물질화는 dmz와 세월호 참사를 사회정치적 맥락과 분리하려는 시도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5) 우리는 깜빡이는 리얼 타임 표시, 키워드, 이미지 카운트, 전송 속도에 관한 정보를 통해서 물질화되려는 dmz와 세월호 참사의 잔상을 마주한다. 이처럼 물질화와 관련하여 두 작업을 살펴보면 자연스레 이미지를 무심하게 연결하며 인터페이스화했던 노재운 작가의 초기작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과거 노재운은 자신이 채집한 북한소녀, 사막의 공항, 스타디움, 파도, 불타는 월드트레이드센터, 타워팰리스 같은 이미지들이 의미나 깊이 면에서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을 리사이즈하거나 픽셀화, 벡터화해 다양한 방식으로 출력했다. 노재운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가 현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지의 표면과 내부에서 운동이나 속도 외에 감지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6) 과거 노재운의 이러한 태도는 <#dmz>와 <0416 실시간>에서 dmz와 세월호 참사에 관한 이미지들이 수집, 휘발되는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당시 노재운은 자신이 채집, 가공, 출력한 이미지들이 감상자에게도 비판적 거리 없이 접속되기를 바라지만,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은 물질화를 시도하는 <#dmz>와 <0416 실시간>이 포획한 이미지에도 적용된다. 아무리 강신대가 두 작업에서 알고리즘을 통한 물질화를 시도했다고 하더라고 감상자에게 dmz와 세월호 참사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물질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dmz와 세월호 참사가 우리의 사회 안에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응착(凝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dmz>와 <0416 실시간>이 물질화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한국사회의 상흔을 반영하는 수많은 거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깨달음이 아니라 헤맴을 드러내는 거울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dmz>와 <0416 실시간>은 모든 출구를 닫아버리고 깔끔하게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특히 <#dmz>의 경우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절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0416 실시간>에서 절망에 맞춰졌던 초점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흔들림은 강신대가 <0416 실시간>에 입력한 키워드를 통해서 드러난다. <#dmz>에 입력된 키워드 목록은 dmz와 표면적으로 관련성이 높은 키워드로만 구성되었지만 <0416 실시간>에는 세월호 참사와 연관성이 상대적으로 먼 키워드가 다수 섞여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 해고 노동자, 보험광고, 명박산성, 감청, ktx해고승무원, 5.18 광주민주화운동, 응답하라 1988, 강정해군기지 같은 키워드가 그런 것들이다. 왜 <0416 실시간>에 입력된 키워드에서만 이런 특징이 드러나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는 곧잘 덮어왔던 국가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누적되어 온 모든 상흔이 집약된 비극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함께 국가의 부재를 다시 확인하며 무심히 흘려보내던 자기반성이 붕괴된 시간조차 역류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점에서야 도대체 국가라는 괄호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다시 고뇌하게 된다. 국가 안에서 국가의 부재를 경험하는 역설 속에서 우리의 고뇌는 <0416 실시간>이 <#dmz>처럼 깔끔하게 절망에 초점을 맞출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세월호 참사의 마침표는 절망이 아니라 애도와 희망으로 찍혀야 하기 때문이다. <0416 실시간>의 내부에서 시작된 흔들림은 절망을 향한 길에 작은 균열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균열들 사이에서 절망을 빗겨나간 이정표와 길이 강신대의 손을 거쳐서 드러난다. 물론 강신대는 흔들림과 함께 드러난 이정표와 길을 결국 애써 외면하고 절망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0416 실시간>의 감상자 대부분은 자신의 삶 속에서 파열하는 국가의 부재를 거듭 되뇌며 촛불을 들고 광장과 뉴스 사이를 헤매는 자신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2016년 가을에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며 대통령 하야, 탄핵을 외치는 국민의 평화로운 촛불시위가 끝없이 이어졌다. 기어코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까지 이뤄낸 평화 촛불시위를 두고 누군가는 촛불혁명을 말하기도 한다. 촛불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촛불 이후에 무엇을 이뤘는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국가의 부재가 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호소한 비전 중 하나는 나라다운 나라였다. 나라다운 나라는 가급적 합리적인 방향으로 경제주의의 게임이 작동하는 안전사회, 공정사회를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은 이러한 의지에 압도적인 지지로 응답했다. 혁명이 한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촛불혁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혁명이라 부르기 어렵다. 이번 촛불은 혁명의 모양을 갖췄지만 내용은 대부분 보수적 가치를 내재화한 국민의 요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촛불은 민생과 소비를 위한 공정사회, 안전사회를 국가에 요구한 것이지 기존의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지향한 것이 아니다.7) 그러므로 촛불시위는 세상을 뒤바꾸려는 노력 대신에 너덜너덜한 현실을 땜질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87년 체제와8) 97년 체제9)를 살짝 교정하는 게 최선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땜질은 서동진 교수가 말하는 마비된 시간10)이나 혹은 강신대가 말한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령 이러한 측면을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민주노총 안에서 현장파를 제외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내세웠던 국민파와 중앙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노사정의 합의의 관련된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굴레 안에 있다.11) 그랬던 탓에 김대중 정부 시절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공무원과 교원의 노조 결성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정리해고를 협의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1기, 2기 노사정위원회 이후 원죄의식 때문인지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노·정 교섭이나 한국경총과의 노·사 직접교섭 요구 같은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살짝 빗겨나간 틀에서는 사실상 사회적 합의주의라 볼 수 있는 시도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12)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에게 근원적인 변화를 주는 노사정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는 역사의 주인공이나 사회혁명의 주체 같은 혁명적 수식어를 노동자와 분리시킨다. 오늘날 민주노총은 이러한 태생적인 혼란과 동요 탓인지 겉으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만 정규직 일자리를 위해 비정규직 해고를 묵인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13년에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의 대표 사업장인 현대 자동차의 임금·단체협상의 경우가 그렇다. 당시 현대차 노조는 하도급 금지와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으나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위한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비정규직 처우 개선 요구를 철회했다.13) 이처럼 우리의 노동문제는 모순을 극복하기는커녕 97년 체제를 살짝 교정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상황이다. 물론 서동진과 강신대가 말하는 시간의 문제는 한국이나 노동문제에 국한된 것일 수 없다.

2017년 6월 14일 런던에 있는 24층짜리 그렌펠 타워(Grenfell Tower)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2017년 6월에 약 600명이 거주하는 영국의 공공임대 아파트 그렌펠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최근 영국에서 공공주택에 대한 방치와 저소득층 퇴거가 사회문제로 불거지는 와중에 켄싱턴·첼시 구청은 그렌펠 타워의 집세를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한 임대관리소에 건축물 재정비 사업을 맡겼다. 그렌펠 타워의 화재가 대형 참사로 이어진 이유는 이 재정비 사업 당시 건물 외벽에 저렴하고 가연성이 높은 외장재를 사용한 것과 계단과 비상구의 단일화, 소방시설의 부실화 때문이라고 추측되는 상황이다. 때문에 그렌펠 타워의 입주민들은 참사가 발생하기 전부터 아파트의 안전성에 대한 민원제기를 이어갔지만 켄싱턴·첼시 구청은 이를 묵살하거나 주거계약에 위협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그렌펠 타워의 화재와 함께 세입자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14) 이처럼 런던도 재개발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라는 논리가 일방적으로 가속되면서 서민을 위한 임대주택은 민영화의 마수에 노출되었다. 이 마수에 노출된 임대주택 세입자의 거주권, 안전권은 국가 시스템의 의도적 방치와 함께 급격하게 추락했다. 결국 도시 한복판에서 시커멓게 타버린 채로 우뚝 서 있는 그렌펠 타워는 이윤을 진리로 삼는 자본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세계의 민낯을 폭로하는 수많은 상징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징을 계속 쌓아나가는 세계는 결코 마비된 시간,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를 완화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 순서로 강신대의 최신작을 살펴보자. 몽환적인 분위기의 포스트 펑크에 레트로 감성을 접목한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인터내셔널가(하즈X펄펄Ver.)>(2016)15)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혁명가인 인터내셔널가16)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강신대는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인터내셔널가>(이하 본격-인터네셔널가)가 혁명가인 인터내셔널가를 동시대적으로 리메이크17)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이러한 자평은 과거 작업들을 관통하는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와 관련된 것이다. 즉, 강신대가 정의하는 동시대의 본질은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이 작업이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견이자 동시대 문화에 대한 코스프레라고 말함으로써 동시대를 비꼰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세계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하던 해방과 혁명을 기념하고 향수하며 소비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출구를 닫아버리고 깔끔하게 절망을 향해 질주하다가도 흔들리기도 했던 강신대는 <본격-인터네셔널가>에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몽환적인 블랙코미디라는 엔진을 달고 절망을 향해 달려간다. <본격-인터네셔널가>는 박근혜의 하야, 탄핵을 외치던 국민들의 촛불이 광화문을 가득 채우던 때에 만들어졌다. 분명 강신대는 광화문의 촛불이 단지 시장주의 체제에 입각한 평등의 고원18)과 정상적인 착취를 요구할 뿐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신대는 고작 소비자 정체성과 정상적인 착취에 안주하는 한국사회를 몽환적이고 느린 템포로 리메이크한 <본격-인터네셔널가>로 조롱하고 체념한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체념과 무기력함이 가득한 이 시대를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간단히 평가절하될 수 있을까. 당장의 삶을 위하여 평일에는 노예가 되고 간혹 휴일에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은 나쁜 것인가. 그러한 삶이 모순이라면 당장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틈새는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선택지는 사랑과 노동에서 도망가며 프리터(freeter)19)로서 살아가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본격-인터네셔널가>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당장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너덜너덜한 현실을 땜질하다가 어느 순간 자본주의가 세계를 완전연소시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 흘리는 시위와 혁명을 무서워하는 나는 고작해야 평화시위와 경제민주화, 공정-평등사회를 지지하고 적당한 노동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최대한 행복하게 죽어가고 싶을 뿐이다. 그런 바람을 갖고 살아가는 나는 비겁한 삶을 사는 것일까.

강신대는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작가지만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사회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지금까지 강신대가 보여준 작업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그가 서동진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한다. 과거에 서동진은 이영욱과 진행한 게릴라 살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근본적인 대안은 세상이 바뀌는 것, 즉 현실 세계의 체제 혹은 구조의 변화잖아요? 하지만 이런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다른 대안들이 무수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헌데 그러한 것들이 근본적인 해결을 대신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닌 것이잖아요? 좀 더 상황을 낫게 해보자는 노력인데, 저는 이런 것들을 대안으로 보지 않고자 하는 것이에요. 사실상 이들은 저변에는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메타적인 대안을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에요.”20)

앞서 언급했던 서동진의 마비된 시간이나 강신대가 말한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는 결국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구조가 세워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발되는 모든 대안은 현실에 대한 체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변혁적 운동은 원인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다양한 문제가 풀 엄두도 나지 않는 실타래처럼 꼬인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은 원인이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할 때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 주체화 같은 익숙한 이야기도 앞서 언급한 민주노총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해결책이라고 말하기에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면 민주노총의 변화를 어떻게 모색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방향일 것이다.

강신대의 작업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자 세계의 모순이 상존하는 원인을 은유, 변주하는 것만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이 해결책을 꼭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최근 젊은 작가들이 사회 앞에서 폐쇄적이고 발언도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강신대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작업을 통해서 사유하는 태도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미술과 정치의 극적인 만남을 다양한 방식으로 끌어냈던 80년대 민중미술 혹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민중미술과 애매한 동거를 시도한 포스트 민중미술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비판성이 있었다. 따라서 강신대의 작업에서 정치적 비판성이 일부 검출되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마침 민중미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오지랖 넓게 짚어볼 점이 있다. 그것은 강신대의 작업에 정치적 비판성이 일부 드러난다고 해서 그를 민중미술 혹은 포스트 민중미술 같은 틀로 규정할 수 있는 가이다. 우리가 포스트 민중미술을 진정 논하기 위해서는 80년대 민중미술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꼼꼼히 규명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87년 체제와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 《민중미술 15년》(1994) 이후 민중미술이라는 좀비21)는 정치적 비판성이라는 영혼만을 잘게 흩뿌렸다. 그리고 민중미술 이후 뚜렷한 정치적 비판성을 드러내는 미술운동이 부재하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들이 민중미술의 재평가 및 비판적 계승을 위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찬경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중미술과 절합하는 포스트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를 통해 작가의 계보를 만들고 싶어 했다.22) 실제로 박찬경은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로 플라잉시티, 조습, 조해준, 최원준, 김상돈, 고승욱, 송상희처럼 대안공간 풀이나 포럼A와 관계가 많은 작가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했다.23) 그러나 2008년 당시 김성원은 박찬경이 원하는 계보의 구축 이전에 작가들 각각의 작업에 대한 생산적 비평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24) 문영민도 최근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2016) 관련 출판물에서 포스트 민중미술의 계보 만들기에 저항해야 하며 오히려 포스트민중 시대의 조건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사실 제도화가 많이 된 현실과 발언을 제외하고 두렁 같은 여러 동인과 그러한 동인에 가담했던 작가들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민중미술에 대한 재평가나 비판적 계승은 흩뿌려진 민중미술의 조각난 영혼 중 유독 빛나는 것을 선점하려는 욕심과 다를 바 없다.26) 민중미술은 여전히 기초 연구도 부족하므로 포스트민중미술을 논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신대의 사회적, 미적 탐구를 민중미술과 관련하여 성급히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보다는 김성원의 말대로 계보를 통한 틀 짓기 이전에 강신대라는 작가와 작업에 대한 생산적 비평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미술이나 포스트 민중미술은 그렇다 쳐도 강신대를 그와 비슷한 연령의 8090년생 작가들과 견주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서서히 고요한 경쟁을 통해 제도화되고 있는 8090 작가들을 되뇌어볼 때 신생공간이라는 화두를 빼놓을 수 없다. 김영삼과 백남준이 국내 미술계에 던진 세계화27)라는 명령 속에서 내적인 성장을 제물 삼아 외적인 성장만을 쫓아온 미술계는 세계적인 장기불황 속에서 폭탄 돌리기를 하며 늪 위에 모래성을 쌓아왔다. 예를 들어 미술시장, 미술품 감정, 미술교육, 공공미술, 예술노동, 비평, 미술언론, 미술정책, 미술계 내 성평등과 관련된 문제가 그러하다. 미술계의 모래성들과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 전망이 부재한 상황 앞에서 신생공간과 관련된 8090 작가들은 겉으로는 냉소적으로 “망했어요”를 외치며 공회전을 거듭하는 미술계를 확인사살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2015~16에 드러났던 이러한 흐름은 망해버린 철로를 탈선한 것이 아니라 앞 세대의 인준을 받고 제도화되는 인정투쟁의 자장으로 쉽게 빨려 들어갔다. 신생공간과 그곳들에 관련되어 활동했던 많은 8090 작가들은 폐허를 외치며 전통, 역사, 정치적 가치를 애써 혹은 자연스럽게 외면28)하면서도 폐허에서 맹목적인 자아실현, 자기개발을 추구하는 미술로 선회했다. 안 그래도 90년대 이후 과거 민중미술처럼 선동적, 상투적, 이념적 경향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정치적 비판성을 선명하게 내세우며 운동까지 하는 작가나 콜렉티브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8090 작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대에 대한 냉소를 형식적인 측면으로만 수렴시키며 앞 세대 못지않게 자아실현, 자기개발을 추구하고 있다.29) 물론 시스템의 고립을 겨냥하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참여형 프로젝트를 지속해온 차지량처럼 맹목적인 자아실현, 자기개발의 함몰되는 것에 거리를 두며 묘한 정치적 비판성을 발휘하는 젊은 작가도 있다. 그리고 나는 강신대 역시 차지량과 유사하게 정치적 비판성을 조심스럽고 예민하게 다루려는 작가라고 생각한다.30)

어쩌면 누군가는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가 시대정신인 시대에서 <본격-인터네셔널가>의 의도적 힙함이 후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술계가 자아실현, 자기개발 미술로 채워져 가는 시점에 그러한 일침은 어떤 점에서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그러한 지적은 자기반성적 시간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문화, 정치, 경제, 예술에 대한 풍자를 통해 정치적 비판성을 고민하는 강신대가 원하는 반응기도 하다. 그러나 강신대의 작품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정치적 비판성은 당연히 해결책과 직결될 수 없으며 감상자의 반응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강신대의 정치적 비판성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현재 강신대는 대부분의 또래 세대가 추구하는 맹목적인 자아실현, 자기개발의 함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생산물로써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비판성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물론 그가 이 분기점에서 어떤 곳을 향해서 나아갈지는 미지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신대가 이 분기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비판성을 어떻게 밀고 나갈 것인지에 대해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그리 머지않은 때에 이 글의 뒷부분을 이어서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어 쓰게 될 글을 통해서 강신대의 정치적 비판성에 대한 판단은 물론이고 그 판단을 통해서 한국 미술계의 정치적 비판성이 드러낸 성과와 한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1) 사운도: 해미 클레민세비츠 / 영상 디자인: 원준경

2) 한편으로 앞서 말했던 참혹한 현실을 화면 너머에서 꺼림칙하게 소비하는 우리의 일상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3) 테크니션 김상훈

4) 테크니션: 김상훈 / 도움주신 분들: 심이나영, 최지현

5) 또한, 사회정치적 맥락을 분리하는 과정에는 당연히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휘발하는 것도 포함된다.

6) 노재운 작가(1971~)는 이미지 저장소인 cloudy12pictures.com, 이미지 가공소 time-image.co.kr, 극장 vimalaki.net을 운영했다. 현재는 vimalaki.net만 접속할 수 있다. 노재운은 2004년에 인사미술공간에서 《Skins of South Korea》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자신이 인터넷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가공, 출력, 연출하고 감상자가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당시 이 전시를 두고 한 평론가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본문에 언급한 내용은 그 과정에서 나온 노재운의 이야기다. 그러나 time-image.co.kr이 사라진 탓에 이 논쟁에 대한 노재운의 원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당시 노재운의 글이 담긴 강수미의 이글루스(http://egloos.zum.com/desumi/v/6279189)를 참고했다.

7) 물론, 촛불은 경제, 사회,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수적 토대 위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할법한 요소도 뒤섞여 있다. 예들 들어, 박정희, 박근혜를 지지했던 이들이 촛불을 들었다는 점이나 주거, 임금, 등록금처럼 자신과 직결된 문제에 한해서 진보적인 경향을 보인 청년세대가 그러하다.

8) 6월 민주항쟁을 도화선으로 창출된 민주화와 관련 있다. 최장집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산업화에 의한 고도성장이 근대화에서 소외된 민중과 중산층을 만들었기에 결국 노동운동과 민중운동,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대한 발전은 경제적 성장의 결과라고 보았다. 운동에 의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 이후 운동과 제도권 정치가 분리되면서 운동의 중심 세력인 학생, 노동자 등이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최장집은 한국의 민주화를 보수적인 민주화라고 보았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02, pp. 124-143 참고.

9) 1997년 외환위기로 공기업 민영화,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 실직, 기업 줄도산, 해고규제 완화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관련하여 쓴 말이다. 97년 체제 이후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으며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다.

10) 서동진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인터내서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에서 강신대의 <본격 시대정신 밴드 컨템포러리-인터내셔널가>가 마비된 시간에 취한 우리의 멍한 시간의 경험을 힐난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비판’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고 평했다. 원문은 http://www.homopop.org/log/?p=1074#more-1074 참고.

11) 국민파는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인 권영길 계열로 학생운동의 틀로 보면 NL로 분류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서는 범자민통 또는 자주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중앙파는 사회적 대화보다는 총파업 투쟁을 강조하지만 사회적 대화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별, 업종별, 지역별, 교섭은 찬성한다. 학생운동 틀로는 PD계열인지라 국민파와는 달리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다. 앞의 두 정파에 비해서 소수파인 현장파는 단위노조나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며 PD계열이라 분류된다. 3개의 정파 중 가장 노사정위원회를 거부하며 현장투쟁을 강조한다. 2014년에 첫 직선제로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된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현장파에 속한다. 조상기,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민노총 선거 3파전’, <주간경향>, 2007.01.23, http://www.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3593&code=115 참고.

12) 한석호, ‘민주노총이 모든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매일노동뉴스>, 2017.04.03,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3597 참고.

13) 박점규, ‘[박점규의 동행]<10> 회사보다 정규직 노조가 더 미워지면 안 되는데’, <프레시안>, 2013.09.15,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7280

14) 이정무, ‘그렌펠타워 화재: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드러난 런던 공공주택의 위기’, <민중의 소리>, 2017. 06. 18. http://www.vop.co.kr/A00001169928.html 참고.

15) 음악 프로듀싱: 하즈 / 보컬: 펄펄 / 영상디자인: 원준경 / 영상 촬영: 원준경, 최명성 / 출연: 백장미 / 촬영 스텝: 김은진

16) 프랑스인 외젠 포티에르(Eugène Pottier, 1816-1887)가 파리 코뮌 봉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71년 작사했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널리 불렸다.

17) 중국의 메탈 밴드 Tang Dynasty도 인터네셔널가를 리메이크 했다.

18) 이택광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쾌락의 평등주의이며 쾌락의 평등주의는 평등의 고원을 계속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유효하다고 보았다. 노동자와 시민 사이를 구분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나누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쾌락의 평등주의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경제주의와 쌍을 이루며 경제주의를 뒷받침하는 윤리이기도 하다. 이 윤리는 공동체를 분할해 자격에 따라 몫을 분배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평등의 고원이 만들어진다. 이택광,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민주화가 배제시킨 정치의 기원들에 대한 사유』, 시대의 창, 2014, pp. 194-195. 참고

19) 프리(free)와 독어의 노동자를 뜻하는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로 뚜렷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와 최소한의 소비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뜻한다.

20) 김희진 외, 『연속과 강도: 2008-2010, 58인의 참여와 한국미술』, 포럼A, 2010, p.179

21) 예전부터 시장성이 검증되어왔던 일부 민중미술 작가만이 미술시장에 끌려다니며 시장화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22) 김희진 외, 『연속과 강도: 2008-2010, 58인의 참여와 한국미술』, 포럼A, 2010, p.86

23) 박주연, ‘민중미술 작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주간경향>, 2009. 01. 20. http://weekly.khan.co.kr/khnm.html?artid=19160&mode=view

24) 김희진 외, 『연속과 강도: 2008-2010, 58인의 참여와 한국미술』, 포럼A, 2010, p.87

25) 김홍희 외,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 서울시립미술관, 2016, p.44

26) 그런 점에서 《청춘과 잉여》(2014) 서문에 박찬경을 민중미술의 적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급하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7)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외쳤고 백남준은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유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광주비엔날레의 산파 역할을 했다.

28) 물론 신생공간 중에는 공간해방, 합정지구, 지금여기처럼 정치적 가치와 마주하는 데 거리낌이 없던 곳도 있다.

29) 신생공간의 이러한 분열적인 모습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신생공간, 휘발하지 않는 것」을 참고할 수 있다. 홍태림, 「신생공간, 휘발하지 않는 것」, 『미술세계』, 2016. 12. pp. 88-90

30) 강신대의 정치적 비판성은 이미지 수집 알고리즘 키워드를 다룰 때만 그나마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측면들에서는 정치적 비판성 자체보다는 정치적 비판성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가 주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