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배드 뉴 데이즈③_정강산: 예술이 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2017년 11월 15일 발행

<리딩 배드 뉴 데이즈>는 아티스트 콜렉티브, 배드 뉴 데이즈의 크리틱 프로젝트로 11월 2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목요일 크리틱-칼에 게시됩니다. 6편의 글들은 소책자로 묶여 <배드 뉴 데이즈>전시에 비치될 예정입니다. 전시에 관한 자세한 일정은 해당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badnewdayz)를 통해 공지되니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리딩 배드 뉴 데이즈③

예술이 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예술적 전위의 가능성에 대한 시론

글: 정강산

“동시대의 문화상황은 적들이 지뢰를 매설한 후 퇴각해버린 도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 도시의 문 앞에 있는 승리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이미 정복된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공격부대를 보낼 것인가?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혼돈을 창출할 것이고, 새롭고 무용한 파괴와 죽음을 야기할 것이다. 대신 그는 기관총이 아니라 가이거 계수기를 지닌 채 버림받은 그 도시로 전진해 갈 전문화된 후위부대를 보내야 할 것이다.”1)

리시츠키, <적색 쐐기로 백색을 공격하라>, 1919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아방가르드

뷔르거Peter Burger가 <아방가르드의 이론>을 통해 아방가르드에 대한 결산을 마친 뒤 43년이 흘렀다. 그 논쟁적인 저서에서 그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유미주의적 경향에 이르러 자율적으로 독립된 예술을 다시금 사회로 되돌리기 위한 대자적 기획이라 규정한 후, 그것이 제도를 해체하려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제도의 외연을 넓힘으로써 실패했고,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2) 이 작업은 시민사회의 출현에 조응하는 제도화된 예술에 대한 메타적 인식론을 확보했다는 지점에서 아방가르드의 급진적 의의를 규명하고, 유물론적 미학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탐침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아방가르드는 특정한 양식이 아니라, 예술제도에 대한 부정을 암시하는 태도와 지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존재론적 위상을 확고히 다진 반면, 명실상부 과거의 일로 규정되었다. 뒤이어 할 포스터를 비롯한 여러 미술사가들이 논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으나, 뷔르거 이후 아방가르드가 20세기 초반부터 대략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기간의 특정한 예술적 에토스를 뜻하는 것으로, 즉 역사적인 것으로 셈해졌다는 데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그 긍정적 측면만큼이나 부정적인 결론을 야기하게 되는데, 예술의 자기비판이 될 수 있었던 아방가르드가 완전히 역사에 박제되었다는 것은 비판적, 급진적 예술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저서가 출판된 이후로 한 세대가 훌쩍 지났으나, 예술적 실천과 양식들은 매우 순탄하게 갱신과 보존을 거듭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니멀리즘, 팝아트, 포토리얼리즘, 신 표현주의, 대지미술, 공공예술, 관계미학, 혹은 포스트모던미술/동시대 미술 등의 흐름들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나 뷔르거가 던진 질문은 개별 양식으로서의 미적 실천들을 초과하는 파장을 야기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할 포스터가 그 자신의 에세이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하는가”를 통해 뷔르거를 비판하며 미니멀리즘, 팝아트, 네오 다다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들까지도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통해 호명하고자 했던 까닭은 예술적 실천의 유의미한 가능성을 상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식론적 돌파구를 열기 위함이었다.3) 이는 아방가르드의 가능성이야말로 예술적 실천의 유효성을 증거 하는 강력한 지표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숍이 언급한 바 있는 ‘적대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관계의 미학이 지향하는 지금-여기의 유토피아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회적으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텍스트였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녀는 문화적 적을 관계미학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가능한 급진적인 미학의 단상을 여전히 적대를 발견하는 작업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비숍은 토마스 허쉬혼과 산티아고 시에라의 작업으로부터 ‘적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제스쳐를 발견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같은 긴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다양한 경제적 배경을 지닌 협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스스로를 다른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포용하는 영역으로 여기는 동시대 미술의 자기-인식에 도전하게끔 한다.”4) 이러한 그녀의 논리는 아방가르드를 예술의 자기비판이라 간주함으로써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위상에 급진성을 부여했던 뷔르거식의 전제를 두고 있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온전한 비판의 조건이 되기에, 동시대 미술의 긍정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적대’의 미학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은 과거 아방가르드와 같은 급진적 위상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를 데카당스, 즉 부르주아 사회의 퇴페적인 몰락의 징후로 독해한 루카치의 신경질이나, 그것이 태생적으로 금 탯줄을 달고 태어났다는 그린버그의 냉소를 차치해둔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아방가르드는 역사의 상수constant인 것으로, 새로이 재창 가능한 개념과 미적 실천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고 재출현할 무엇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혹은 지극히 역사적인 것으로, 이미 사장되어버린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예술로부터 일말의 비판적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다시 말해, 오늘날 급진적인 비판을 예술적 실천을 통해 괄목할 흐름으로 거듭하여 수행하는 것은 가능한가?

역사의 개념과 개방된 시간성의 붕괴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논리적 조건들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사적 메타포로 사용된 시기를 거쳐 1870년대 이후로 문화, 예술 영역에서 정착되기 시작한 ‘아방가르드’의 용례를 떠올려본다면, 칼리니쿠스가 지적했듯 그것이 모더니즘의 시기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5) 요컨대 아방가르드는 과거와 단절된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라는 개념 자체를 상정할 수 있는 조건인 ‘역사’ 개념에 기대어 가능했던 흐름이다. 그리고 미래를 선취하고자 했던 그들의 당위는 과거의 형식들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이뤄졌다. 요컨대 큐비즘 이전까지 그와 같은 예술형태를 상상할 수 없었고, 이는 초현실주의, 다다, 상황주의에도 모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방가르드의 형식적 갱신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은 모더니티의 열린 시간대 자체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간성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져 있을까. 우리는 우선 지양할 과거의 전통이 존재하는지의 여부, 문화적 전위를 선취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예술의 조건은 여전히 문화적 적의 부재에 직면하고 있다. 이브 미쇼가 ‘기체 상태의 예술’이라는 이름을 통해, 혹은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조응하는 미적 심상으로서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호한 개념 이상을 이끌어 낼 수 없었던 점은 이러한 사실을 예증한다.6) 하나의 일관된 양식으로서 존립할 수 없을 만큼 형해화 된 예술은 어떤 의미로 역사가 부재하는 영원한 현재- 동시대 속에서 무한한 참조와 반복을 수행할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강박적으로 과거에서 호출되는 양식style의 잔해들이 만들어내는 맥락의 포화상태는 사실 양식의 잠정적인 소멸을 의미한다. 제임슨이 언급한, 작품에서 관측되는 ‘깊이감의 상실’은 이를 잘 요약해주는데, 동시대의 문화적 양태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있으나 역설적으로 대문자 의미는 부재하는 환경을 반영한다.

이런 측면에서,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소규모의 유토피아를 재건할 것을 역설하는 부리오의 관계미학이 전제하는 강박적인 긍정성과 실효성은, 더 이상 부정성을 발견할 수 없게 된 세계에서 예술이 마주한 아포리아를 해소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으로도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최근의 저서 <포스트프로덕션>에서, DJ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의 작업을 절취하여 재구성하는 작가들을 ‘전용(appropriation)을 넘어 공유(sharing)의 방법론을 실행함으로써 소유 이데올로기를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예술적 전위’라 간주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다.7) 그가 새로운 예술적 흐름이라 지목한 작가들로부터 발견하는 “창조(creation), 저자성(authorship), 독창성(originality)”에 대한 재고는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 외려 대기업을 스폰서로 두는 대형전시8), 점차 치밀하게 구획되어온 지적재산권9), 정보화와 병행된 상품화10)에 의해 일찍이 각각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으며, 미술사적으로는 일찍이 초현실주의와 다다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실행되었던 기획이다. 문화 비평적 측면에서, 디제잉은 혼성모방으로서, 본래 맥락 없는 차용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다(이에 대해선 나중에 보다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예술적 조건을 둘러싼 현 상황의 부정성을 기꺼이 무시하며 그것들로부터 긍정성만을 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한편으로 필연으로서,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게도 예술적 전위의 존립 조건은 정치적 전위의 존립 조건의 양태와 조응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1905년 이후 사회주의적 이념 내지 아나키적 이념(극단적으로는 파시즘에 이르는)과 조응했고, 소비에트 블록이 정태적인 것으로 고착화된 이후 30년대부터 스러졌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11) 피카소와 프랑스 공산당, 앙드레 브르통과 트로츠키, 구축주의와 볼셰비즘, 살바도르 달리와 스탈린 등의 관계는 예술과 전위의 관계를 증거 하는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노선을 요약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12)라는 아이러니한 이름은 흥미롭게도 오늘날 예술적 전위가 처하게 된 상황을 암시한다. 단절과 함께 모든 세계의 규칙이 재배열되는 유토피아적 심상을 져버린 뒤 좌파에게 남은 것은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이윤원리를 승인한 채 부분적인, 가능한 개혁을 논하는 일이 되었다. 이는 개혁과 혁명을 대립시켜온 좌파의 고답적인 아포리아(로자냐 레닌이냐)의 문제를 초과한 지평에서 이뤄지는데, 까닭인즉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시퀀스란 더 이상 아무도 혁명을 믿지 않는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파와 좌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전위를 자임할 가능성은 사라지고, 타리크 알리Tariq Ali가 말한 ‘극단적 중도파’가 대두된다. 이는 모더니즘의 조건이 되었던 충격과 새로움의 미학이 제도적으로 승인되고 참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더 이상 미적 전위를 자임할 수 없게 된 상황과 조응한다. 레디메이드를 작업의 한 독립적인 요소로서 전유하는 몽타주로 대표되는 알레고리적 구성, 무의식적 행위를 집적하는 자동기술법, 공동창작 등은 개인의 창조성을 전제한 부르주아적 예술가의 형상을 파괴하고 자율화된 예술을 지양하고자했던 본래의 의도와 달리 이제 식상한 방법론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렇듯 ‘동시대 미술’이라는, 특정한 양식조차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이름에 새겨진 각인은, 좌우의 구분이 무화된 조건의 정치가 ‘동시대 정치’로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총체화 된 사회관계의 거울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스펜서Herbert Spencer가 <Principles of Sociology>를 통해 지적했던 분리와 통합의 경향, 즉 사회에 내재한 개인화와 분업의 경향은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완성되어 이러한 상황을 심화시킨다. 이는 한편으로 문화’산업’과 스펙터클의 심화, 그리고 이를 야기한 사회의 총체화 된 연관관계의 치밀한 구조망의 완성을 의미한다. 즉- ‘사회란 없다’라는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의 표현이 드러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시기가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심상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매개되는 힘이 유래 없이 강력해진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때 사회란 개인의 생활세계 일반을 조직하는 제도, 관습의 총체로서 자본-국가에 의해 1차적으로 규정되고 조건 지어진 근대적 발명품을 의미한다. 사회의 제 1법칙을 구성하는 이윤원리에 매개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가능성과 비전을 먹고 자란 정치적 전위는 사회의 매개의 정도가 완벽해진 조건에서 더 이상 유토피아를 보존하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예술적 전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사회의 외연이 확장되는 동시에 고착되는 것은 전위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직접적인 기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제임슨Fredric Jameson이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축이라 명명한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총체화 된 사회관계를 표현한다.13)

달리 말해 1인 1미디어 시대로 요약되는 정보화,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구축에 잇단 국제적 분업화, 금융 세계화는 더 이상 자본주의 체계의 외부를 예증하는 증인이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을 암시하며, 제 3세계로부터 매개되지 않은 목가성을 발견해내는 원시주의적 투사를 할 수 있었던, 자본의 타자를 발견할 수 있었던 환상의 소멸을 뜻한다. 가능한 공간적 외부의 상실은 곧 상상할 수 있는 시간적 흐름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 가능한 외부, 다른 시간, 즉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 가능성의 소멸이란 역사의 소멸을 지시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정한 계승관계에 있음을 역설하는 주장은 나름 합리적이지만, 그것은 신석기 시대가 금속기 시대와 계승관계에 있음을 논구하는 주장만큼만 합리적이다. 외려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에 병행된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국가 간 자본순환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세계화 이후로 분화되기 시작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사이의 단절점을 기억해야 한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티는 아방가르드를 가능케 했던 모더니즘의 열린 시간대가 닫혀버린 이후의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다소 과감하게 표현하자면, 상황주의를 마지막으로 한 아방가르드는 역사를 기억하는 마지막 예술의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팝아트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예술의 범속화, 세속화, 속물화는 차용과 전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방법론을 예고하는 원사로서, 이로부터 예술 작품은 과거의 양식, 소재 따위를 무매개적으로 채집하고 뒤섞음으로써 자신을 구성해내게 된다. 더불어 작품의 깊이감은 혼성화된 양식 내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것들에 의해 대체되고,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대중문화)의 경계는 사라지지만 동시에 작품과 상품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이는 앤디 워홀에서부터 제프 쿤스를 거쳐, 어쩌면 좀비-형식주의 등의 작업에서까지도 두드러지게 관측되는 모습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독해 가능한 언어가 된 것이 군사정권을 업은 발전국가의 시퀀스가 종결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 이후였음을 감안할 때, 포스트모더니티는 발전국가 모델이 지배적인 독점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이후의 자본주의적 조건에 조응하는 현상이라는 제임슨의 지적은 타당할 것이다. 발전국가 모델(혹은 이에 조응하는 행정국가)이 전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과, 이러한 통치를 야기한 국가주도의 자본운용이 명백했던 시기에 가능했던 패러디는 이제 불가능해진다. 푸코식 표현을 빌자면, 규율권력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근대의 행정국가의 모델은 ‘금지’와 ‘통제’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근엄한 체 하는 원본의 대상이 지닌 결함과 불완전성을 조소하고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이어 권력이 행사되는 방점이 규율로부터 통치적 관리로 심화됨에 따라 복종의 기제가 보다 내면화될 때, 권력은 개인의 외부에서 내부로 전화한다14). 개인이 교환원리에 근거하여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고 운용하는 대신 억압적인 국가의 형상, 아버지의 형상은 약화되며, 이런 조건 속에서 금기를 그 자신의 젖줄로 삼았던 패러디는 그 가장 근본적인 단위에서부터 내파되는 것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시장이 허락하는 혼성모방pastishe, 미래를 기억할 수 없는 닫힌 시간이 허락하는 혼성모방이다. 제임슨의 표현대로, “패스티시는 공허한 패러디이며, 유머감각을 상실한 패러디”15)의 일종이다. 키치는 이러한 상황을 대변하는 효과적인 개념이다. 바야흐로 예술의 탈이념화 내지 탈정치화의 시퀀스가 도래하고, 이런 상황에서 유일무이한 미적 경험 내지 충격과 새로움은 외려 심미화 된 상품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촘촘히 매개 된다. 예술을 삶으로 지양해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의 미학화와 편재에 의해 완벽히 이루어진다.

미적 갱신의 불가능성: 중기지속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새로움의 반복은 예술자체가 공회전을 하는 상황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미지화된 상품으로 포화상태가 된 시장이 매번 선보이는 새로움으로부터 연원한 측면이 결정적이다. 정확하게도 칼리니쿠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 시대 특징 중의 하나는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공공적 상황이 드러내주듯이 우리들 모두가 변화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가장 극단적인 예술적 실험들까지도 조그만 관심이나 자극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측 불가능한 것이 예측 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날로 점증하는 변화의 속도는 어떠한 특정한 변화의 드러남도 감소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새로움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만일 모더니티가 “충격의 미학”을 주재했다면 이제 이것이 모더니티의 전면적인 실패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극히 상이한 예술적 산물들은(비교적인 궤변에서 순수한 키치에 이르는 영역전부를 포괄하는) “문화적 슈퍼마켓”(말로의 “상상박물관” 개념과 반어적으로 상응하는 개념)에서 나란히 그들 각자의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그렇게도 성공적으로 예술의 “상습적인 조건”이 되어버린 오늘날 파괴의 수사학과 새로움의 수사학은 어떠한 영웅적인 호소의 흔적도 잃어버렸다.”16)

이렇듯 새로움이 일상화된 상황에 대한 칼리니쿠스의 명료한 진단은 일찍이 아방가르드가 불가능한 이유를 증언한 바 있다. 새로움에 잇단 충격을 전유하는 것은 아방가르드 이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게 여겨지고 있지만 현재의 객관적인 조건은 새로움의 발생 가능성을 미연에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문화적 슈퍼마켓이 된 미술관은 풍족한 문화적 삶을 표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휘발성의 상품으로 소비되곤 한다. 새로움은 충격과 논란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관에 의해 매개된 이벤트로서, 기다려지는 것 혹은 시큰둥한 것이 되었다. 수정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미적 어휘를 재배열하는 새로운 시각성을 내포한 작업 일반을 아방가르드로 정의하여 그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후퇴시키지 않는 한(이는 뷔르거의 작업에서 호명 받은 아방가르드 개념에 견주어 볼 때 박한 평가다),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며 집단적인 흐름으로서 반-미학적 충동을 세계에 투영하고자 했던 본질적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는 이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할 포스터가 아방가르드의 조건으로 암시했던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상호접합은 그 사이에 낀 시장과 닫힌 역사에 의해 봉쇄되는 것이다. 오늘날 유의미한 조직 내지 결사로서 예술적 실천을 꾸려가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러한 예술가들의 집단이 조명되는 경우 역시 없다. 스타 건축가들이 설계한 유수의 갤러리에서, 스타 큐레이터들에 의해 조직된, 명사화 된 예술가들의 대형전시(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맞은편엔 열화된 소형 공간에서 파국적 심상들에 퇴폐적으로 침잠하는 작가들이 짝패를 이룬다)가 무미건조하게 반복되고, 그마저도 충격과 새로움의 측면에선 상품과 이미지의 스펙터클에 비해 훨씬 못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른바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 으레 퍼포먼스 작업이 셈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연이 아니라 예술이 스펙터클 이상의 주목도를 지니기 위해 인간의 신체적 현존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개입시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후로도 비판과 역사에 대한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 일련의 흐름들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제도비판을 수행한 몇몇 소수의 영웅적 작가들을 통해 근근이 연명하는 정도였다.17) 자신만만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언을 단언한 니콜라 부리요의 미학이 실은 전적으로 포스트모더니티 속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뿐만 아니라 관계미학의 종언까지도 단언하며 ‘새로운 시각적 림보에 대응하는’ 좀비-형식주의 내지 좀비 모더니즘의 회화경향을 최신의 흐름으로 수입하고자 했던 임근준의 접근이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성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처럼18) 그것이 생산양식에 연동된 문화적 기류인 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손쉽게 극복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문화가 자체의 내적 법칙에 의해 갱신되게끔 나타나도록 그것을 독립화 시키는 과정이 역사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의한 것임을, 논리적으로는 경제에 의한 것임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대문자 역사의 소멸에 따라 닫힌 시간에 탐닉해야만 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시간축은 당분간 지속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날학파 2세대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의 시간성을 구성하는 범주를 4가지로 구분한 바 있는데, 초장기지속, 장기지속, 중기지속conjoncture(‘국면’, ‘형세’ 등을 의미하는 불어로서 일반적으로 이를 음차하여 ‘콩종크튀르’라 한다), 단기지속이 그것이다.19) 우선 초장기지속은 인간 역사일반을 의미하는 초월적 계기를 갖기에, 그는 이를 개념으로서만 확립할 뿐 구체적인 역사기술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장기지속은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혹은 고대, 중세, 근대와 같은 구조적 시간대를 지시한다. 한 생산양식 내부에서 단계적 변곡점에 따라 심화하고 변화하는 주기적인 리듬의 양상은 중기지속으로 설명되는데, 예컨대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시간대 내부에서 대략 10-50년을 주기로 전환되는 단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독점 자본주의에서의 ‘독점’,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후기’를 암시하는 변이가 그것이다. 중기지속은 구조 내부의 전환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간성이라 할 수 있다. 단기지속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사건의 시간성으로서, ‘촛불정국이 종료되었다’라고 할 때 의미하는 정국을 의미한다. 그는 이렇게 ‘구조-콩종크튀르-사건’의 삼층 구조로서, 이들 각 시간대의 중첩과 결합을 역사로 간주한다. 브로델에 따르면 이 중에서도 특히 역사학자가 중요하게 파악해야할 시간대는 장기지속과 콩종크튀르인데, 이러한 그의 도식은 역사적 국면들을 분석함에 있어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파악을 하도록 도와준다. 이에 기대어 말하건대 포스트모던은 후기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중기지속의 시간대에 조응하는 문화적 시간성이다. 따라서 생산양식의 전환 이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복과 결산을 논하는 것은 내겐 어불성설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네오 아방가르드를 향한 할 포스터의 구제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하위 단위들인 미니멀리즘과 팝아트의 한계는 뚜렷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명기에 나타났던 그들은 결정적으로 시장 친화적이었다. 60년대를 풍미한 네오 아방가르드의 시기는 미적 첨단을 달리던 현대미술작가들과 미술시장 사이에서 대규모의 타협이 일어난 시기다. 7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계의 규모 변화는 전례 없이 비대해지는데, 이는 미니멀리즘, 팝아트를 비롯하여 추상표현주의, 구상회화 작품에 이르는 당시의 현대미술을 흡수하는 정부와 기업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증대해 온 사정에서 연유한다.20) 다이아나 크레인Diana Crane은 미국 미술시장의 역사를 개관하며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1970년 이전에는 현대 아방가르드 예술이 아주 가끔씩 경매를 통해 거래되었다. 70년대에는 그러한 작품들의 경매판매가 더 빈번해졌다. 경매시장의 판매기록은 이들 화가의 작품가격이 해를 거듭하면서 얼마만큼 올랐는지를 보여준다.”21) 이런 상황에서 아카데미의 영향력 또한 마찬가지로 증대 되어왔는데, 예컨대 미국의 경우 1980년 전문화된 예술교육(파인아트 석사)을 이수한 이들의 숫자는 1950년에 비해 16배가량 증가했다.22)

에릭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이 “매체에 흠뻑 빠져들어 경험한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도관conduit; pipe이 되고자 했을 뿐 다른 어떠한 것도 거부”23)했다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팝아트를 수식한 것은 다소 과도하나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데, 까닭인즉 그에게 팝아트란 소비사회의 미학을 반영하는 ‘뚫려있는 파이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팝아트의 몽타주와 실크스크린, 레드메이드의 사용은 어쩌면 아방가르드와 동일하게 분업을 지양하는 방법론이지만, 외연이 넓어진 미술시장에 의해 완전히 흡수됨으로써 그 급진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소비 사회의 대량생산 체계를 미메시스 하는 것 이상의 시도를 보여주지 않았으며, 따라서 뷔르거가 네오 아방가르드를 새로움의 반복이라 평가한 것은 정당하다. 한때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던 동일한 방법론이 변화된 조건에서는 외려 퇴행적인 공모가 되고 말았던 까닭이 여기 있다. 상기한 맥락들을 고려할 때, 이젠 모든 사정이 ‘예술적 전위’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예술의 앙가주망적 계기에 기대를 걸고자 하는, 혹은 예술로부터 유효한 급진적 비판을 경로를 찾고자 했던 이들은 예술을 포기해야할까? 그것은 역시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모든 예술적 기획들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는 이론적 허무주의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 미학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들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음을 논하고 싶다. 요컨대 나는 여전히 예술로부터 열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이완과 주현욱의 사례

어쩌면 아방가르드의 가능성이 봉쇄된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유발한 구조적 계기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오늘날 가능한 아방가르드의 형식을 암시하는 단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관계미학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차원에서 작성된 느슨한 텍스트지만 클레어 비숍의 적대의 미학은 주목할 만하다. 비숍은 라클라우Ernesto Laclau-무페Chantal Mouffe의 적대이론과 주체성이론을 참조하며 항상적이고 구조적인 적대를 민주주의를 비롯한 인간 삶의 조건의 상수로 파악한 뒤, 이를 통해 관계미학의 한계를 규명해낸 바 있다. 즉, 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리요의 시선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부적절하게 참칭될 뿐이라는 것이다.24) 따라서 비숍에게 주체 자체를 규정하며 동시에 세계에 편재하는 적대를 직시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성을 획득하는 방법론이었다. 나는 그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허나 문제는 오늘날의 적대가 구조적으로 굴절되어 식별이 쉽지 않으며(관계미학, 포스트프로덕션 등에서 감지되는 긍정성이 스스로 증언하듯), 바로 그런 이유로 비판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이 개입할 지점은 바로 이곳인데, 즉 이제 예술가들은 적대를 드러내기 위해 비판의 불가능성을 응시하는 작업을 구성해내게 된다. 이는 곧 닫힌 시간성을 직시하는 것이 총체화 된 세계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모든 것이 현 세계의 닫힌 역사를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허나 이는 보다 대자적인 제스쳐를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비판과 형식이 형해화 되는- 스펙터클이 고도화된 후기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더 이상 예술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여기서 이완과 주현욱의 몇몇 작업이 보여주는 방법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이완의 작업은 형식적으로 개념적인 조각 혹은 오브제 설치와 수행적인 퍼포먼스의 범주에 속한다. 허나 표면적 형식 자체는 그의 작업에 관해 그다지 많은 얘기를 건네지 않는다. 그의 특징은 외려 이미 존재하는 형식들로 작업 외부의 서사를 담지 하는 내적, 논리적 형식을 지닌 작업을 ‘구성’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요컨대 그의 작업은 세계의 어떤 측면에 대한 추상에서 시작하는 알레고리적 유비에 가깝다. <삶은 그저 따라 울려 퍼지는 핏빛 물결>(2008)과 <그들에게 처한 불가역적인 기준의 증거>(2010), <5.06>(2011), <누가 버터 좀 더 가진 사람 없나?>(2013) 등은 이러한 그의 성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삶은 그저 따라 울려 퍼지는 핏빛 물결>(도판1)은 영락없는 야구공의 외형을 띤 오브제로서, 닭고기를 갈아 접착제와 안료를 섞어 압축하여 만든 것이다. 유용도가 탈각된 닭고기 야구공은 상품도 아니지만, 사용가치를 갖지도 않는 대상으로 제시됨으로써 상품과 사물의 경계에 놓인 어떤 것을 재현해 보인다.

도판 1, Chicken Baseball, Grounded Chicken, remanufacturing, 2008
도판 2, How to become Us (우리가 되는 방법), 5.06kg 1~60 / These works were adjusted weights of each objects equally, 2011

<그들에게 처한 불가역적인 기준의 증거>(2010)는 재질이 다른 물건들을 표면이 거울이 될 때까지 갈아 배치한 작업인데, 여기서 상이한 사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되는 ‘거울’의 속성은 비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하는 폭력(아도르노)을 암시하거나, 상품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상대적인 가치형태를 갖는다는 마르크스의 화폐론을 유비하며, 그것이 결국 내적으로 완벽한 기준에 동일화 될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편 <5.06>(도판2)은 여러 잡동사니들을 모아 저울을 달고 총 무게를 산출하여, 그 무게를 수집된 대상들의 개수로 나누어 5.06kg이라는 평균값을 낸 뒤 사물들을 그 평균값에 맞추어 무작위로 잘라내 저울위에 붙인 설치작업이다. 일정한 규칙에 의해 조립된 오브제들은 그 체계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제 본 형태를 상실하여, 재단되고 깎여나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설치된 오브제들은 단순한 레디메이드라기보다 개념적 조각을 구성하는 질료로서, 교환관계를 지시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누가 버터 좀 더 가진 사람 없나?>는 버터로 만든 상품을 찾는 인간의 형상을 버터의 끈적이고 녹아내리는 질감으로 조각한 작업인데, 이는 욕망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상품, 혹은 욕망 자체의 심상과 효과적으로 오버랩 된다.

위 작업들이 보여주는 방법론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심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개념적 파악에 관련된 것이다. 요컨대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상품세계전반에 대한 지식을 요한다. 이때 그가 보여주는 질문의 방식은 상품을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그것을 초과하는 측면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특징적으로 개념적 사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대한 그의 제스처는 여느 앙가주망적 작업들과 같은 윤리적인 거부도 아니고, 여느 팝 아트와 같이 그에 매료당한 모습도 아니다. 반면 수사적으로 자본주의를 언급하며 난해함을 자처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한 개념적 계기를 통해 그것이 현상하는 바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적당한 구성적 긴장과 거리를 유지한다. <메이드 인Made In- 대만,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중국, 한국>(2013-2016)시리즈 역시 그의 중심적인 방법론을 웅변하는 작업으로서, 작가가 아시아 12개국을 순회하며 사탕수수, 실크, 쌀, 금, 젓가락, 가발, 짚신 등을 직접 생산하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 클립들로 구성된다(도판3).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개인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소비인 현시대에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논리를 벗어난 생산품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할까?’”25)자신이 소비하는 하루의 양식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들로부터 생산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여기며 그들을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형식적으로는 수행적 작업이지만 그가 개입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event)을 발생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수행성과는 관계가 없다(수행성 자체에 대한 메타적 접근은 이제 식상해졌다). 외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국제적 노동 분업의 질서에 묵묵히 참여하는 장면들을 기록하고 그 결과물을 남김으로써 대상을 충실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요컨대 그는 어떤 윤리적 격정(각국의 사람들이 처한 열악한 삶의 조건을 성토하며 그들의 생활세계에 개입하려는 참여적 열정과 같은)도 없이 현지의 생산라인에 자신을 투입시키고, 단지 그들 속에서 배경처럼 노동하는 자신을 관조할 뿐이다. <메이드 인>연작을 통해 그가 경험적으로 감지해내고자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경험적 단위와 생활세계 속에선 감지해낼 수 없는 고도로 분업화 된 국제적 자본주의 생산 체계인데, 그의 불가능한 시도는 철저한 관조적 수행을 통해 성공하게 되며, 이는 곧 총체화 된 사회관계를 귀납해내기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변증법적, 혹은 비구상적 재현의 계기가 짙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가 그 자신이 상대하고자 하는 대상에서부터 출발하는 개념을 통해 작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도판 3, 이완,메이드 인 타이완(Made in Taiwan)_sugar,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00:59:37, 2014
도판 4, 이완, 고유시(Proper Time): 비록 꿈들이 달과 함께 용해되더라도, 668개의 시계, 가변설치, 2017, 사진출처: 313아트프로젝트

여기서 경험은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무시 못 할 요인이지만, 그는 경험을 통해 경험주의를 넘는 시선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내 보인다. 이는 그가 대상과 갖는 비평적 거리 때문인데, 아마도 이러한 태도가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제도 혹은 사회-국가의 외부가 사라진 현재의 시대가 여타의 실천에 앞서 객관적인 관찰과 숙고를 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올해 초 313아트프로젝트에서의 전시 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미스터 케이(K) 그리고 한국사 수집>(2017)에서도 이러한 경험적 계기는 마찬가지로 보존된다. 이 작업은 서울 황학동 시장에서 구매한 익명의 20세기 초반 세대의 사진꾸러미에 등장하는 인물을 미스터K로 설정 한 후 이를 모티브로 하여, 그의 생애주기에 연동된 정치적 사건들을 여러 사료를 통해 제시한 아카이브다. 미스터 K의 일대기가 촬영된 사진들과 함께 배치된 사료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냉전과 개발독재, 민주화 전후까지를 아우르는 상징적 오브제들로서, 신문, 책, 초상사진, 상장, 깃발 등에 이른다. 언뜻 구조에 대한 강조로 인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개인의 내밀한 경험들로 역사를 기술하려하는 미시사적, 문화사적 방법론처럼 여겨질 수 있는 그의 시도는 그러나 미시사에 머물지 않으며, 구조사적 맥락으로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그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건들의 연대기를 개인적 삶의 양태를 우선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으로 제시하나, 언제나 그것을 개인적 경험의 계기 속에서 진술한다. 관객은 미스터K의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반추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구조에 의해 조건 지어진 필연으로서 독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경험은 사회의 구조적 단층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만 허용되는 셈이다. 이완은 미스터K와 함께 전시된 <고유시Proper Time>(2017)에서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668명의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일일 노동시간을 질문하고, 각 개인이 재생산을 위해 하루에 투여하는 노동시간에 맞춰 상이한 속도를 지닌 시계들을 제작했다(도판4). 각기 다른 시간성을 가진 시계들은 해당 시계의 주인들이 처한 상이한 물질적 조건들을 생각하도록 이끄는데, 이 조건들은 국가, 계급 또는 계층, 성, 세대 등에 따라 복잡하지만 간명하게 구획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어떤 시계(영미권의 백인 남성 CEO)는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이지만 다른 시계(제 3세계 흑인 여성 노동자)는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인다. 이 역시 위의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세계화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양태와, 그 불균등한 발전 상태를 지시하나, 이때 세계의 불평등이 단지 고발되거나 성토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각 시계들이 암시하는 시간의 속도에 의해 관찰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상기한 작업들에서 이완은 일관되게 세계와 대응하는 개념을 문제화하며 (디지털 공간에서 열화된 이미지들에 탐닉하거나 소규모의 폐허 같은 전시공간에 내몰린 비참함과 관련되는 작업들이 그러하듯이)단순히 현 시대의 조건을 미메시스 하지 않고, 그들을 대자적으로 인식한 후 일시적으로 포착되는 상들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이완의 작업은 특정한 장소에서 잠시 명멸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의 작업은 작품이 놓이게 되는 곳이 어디든 동일한 ‘의미’를 담지하게 된다.

도판 5, 주현욱, Frozen Sleep Time Slip, 야채 수경 냉장고, 김일성화, 김정일화, 2016
도판 6, 주현욱, 21세기를 위한 SF안무, 퍼포먼스, 2016

이 연장에서 주현욱의 <Frozen Sleep/Time Slip>(2016)을 살펴보자. 이는 금수산 태양궁전에 박제되어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헌사 된 꽃을 그들의 대략적인 신장에 맞추어 유리관에 진열한 작업이다(도판5). ‘얼어붙은 잠’이라는 개념을 통해 작업을 독해할 경우 이것은 현실사회주의의 물화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암시하는 오브제가 되지만, ‘시간의 미끄러짐’이라는 개념으로 독해할 때엔 냉장장치에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품으로서 재맥락화 된다. 이를 통해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가둬져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세계의 타자로서의 북한’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전제되는 자본주의 세계는 개념적 수준에서 서로 랑데부를 하며, 한 대상 속에서 동일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그려진다. 즉 박제되어 안치된 시신에 대한 오마주는 동시에 순백색의 진열대에서 판매되길 기다리는 상품으로서의 싱싱한 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의 시신과 상품을 병존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와 양자의 등치관계를 암시하는데, 그의 작업은 그 온전한 이해를 위해 이데올로기의 항상성과 상품/화폐라는 개념을 통한 논리적 독해를 요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조각의 형식을 띠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의 개념이 지시하는 바가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점이다. <21세기를 위한 SF 안무>(2016)에서도 역시 이러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는 블랙큐브 속에서 총 3막의 서사극을 구성하고, 공상과학을 가능하게 했던 근대의 유토피아적 기획이 발생한 시기-70년대까지의 유토피아적 SF의 전개과정-이후 90년대까지의 디스토피아적 SF의 전개-21세기의 키치로 전락해버린 SF(극 속에서 이는 드론과 전동의자, 조잡한 신디사이저를 통해 암시된다)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을 구분한 뒤 이 속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문학적, 역사적, 과학적, 예술적 사건들을 담담한 어조로 나레이팅 한다(도판 6). 나레이팅이 서술하는 내용에 따라 삽화적인 방식으로 각 막 테마송, 관중소리, 데이지 벨, 사운드, 각종 기기와 엔진의 소음이 동원되며 극의 시간이 전개되는데, ‘미래에 대한 상상 불가능성’을 환유하는 SF의 불가능성을 논함으로써 여기서 결국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정을 먹고 자랐던 20세기 SF의 조건이 21세기로 넘어오며 몰락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한편의 음울한 동화, 혹은 역사서를 읽은 듯한 심상을 느낄 수 있는 이 작업은, 당연하게도 극의 매체성에 대한 메타적 탐구가 아니다. 외려 도입부에서 피날레로 이어지는 완결된 극의 서사를 지녔으며, 그가 설정한 개념적 도식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 강제된 관람을 전제하기에, 관람자와의 상호작용 내지 관계를 생성해냄으로써 이미 전문화된 예술의 양태를 은폐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업들은 외려 자신이 파악한 세계의 개념들을 예술적 어휘로 번역해 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관람자들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는 측면에서 브레히트적 계기를 지니는데, 이러한 태도는 이런저런 해석의 드리블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의 경계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세계에 관해 무슨 얘기를 건네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소리다.

각종 이슈와 형식적 고안을 빠르게 순환시키는 대신 이완과 주현욱은 모더니즘적 충동들로 독해될 만큼, 작품이 그 자체 자기완결적인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듯이 오브제들을 조립하여 의미를 투여하고 그들을 하나의 단위로서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의 작업은 다소 고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장소 보편적이며, 구조사적이다. 장소 보편적, 구조사적 맥락에 닿아있는 그들의 작업에 관람자들과의 거리를 재설정하려는 메타 형식적 시도는 없다. 관람자들의 참여를 통해 가능한 수평적 관계를 창출하는 관계 미학적 태도 또한 부재한다, 또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질문하는 체 하지도 않는데, 이들은 짐짓 예술이 특정한 의미를 담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포스트 인터넷의 담론으로 그들을 독해하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덧붙여 그 작업들은 과거의 예술적 형식을 참조하고 비트는 패스티시와도 거리가 멀고, 과정 중심적 제작 방식의 극점에 있는 아카이브 작업도 아니며(미스터K는 아카이브의 형식을 띠지만 수집품들로 작업의 구성을 대체하거나 모호하게 의미를 분산시키지 않는다), 폐허, 파국의 심상들에도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의 작업은 예술의 경계를 반성하는 메타적 제스쳐를 취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미적 관습의 최신 유행에서 한참 빗겨나가 있다.

허나 예술의 자율성을 승인하는 듯한 이러한 작업방식은 외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무화시켰던 아방가르드적 계기들이 물화된 동시대 미술의 상황에서 유효하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려왔던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후 이 연장에서 예술의 외연을 확장하며 반복되어온 동시대 미술의 흐름은 아방가르드에 의해 힘을 잃은 모더니즘을 잠시나마 뿌리 끝까지 전복시키는 듯 했으나, 오늘날 예술과 상품(이 매개된 일상)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져버린 포스트 모더니티의 상황에서 그러한 제스처를 특별한 사유 없이 반복하는 것은 상품이 미학화된 조건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경계를 전제하는 그들의 태도는 작업에 압축적 의미와 구성을 부여함으로써 일찍이 잃어버렸던 작품의 깊이감을 회복하는 계기를 지닌다. 한편 이러한 작업들은 닫힌 구조로서 제시되는데, 이는 해석의 폐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완결적 형태와 서사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작업을 진행해 온 방식은 참조, 전용이 아니라 (강한의미에서 사유를 요청하는)‘구성’이다. 기체상태의 예술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주류 동시대미술은 그 형태가 명료해지는 데에 저항하는데 비해 이들은 그에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흩어지고 무화되는 의미와 예술적 형식을 그러모아 고체화 시킨다. 허나 이를 단순한 그린버그적 형식주의로 독해할 경우 실패하고 말텐데, 왜냐하면 모더니즘의 자기 지시적인 순수형식의 탐구를 예술 본연의 과업으로 설정한 그린버그의 작업은 물질성과 평면성을 탐구하는 일에 예술을 가뒀기 때문이다. 허나 이들의 작업은 자기 완결적인 동시에 세계를 지시하는 형식주의로서, 닫힌 동시에 외부로 열려있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는 이들이 과거의 개념예술과 구별되며 보다 정치적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성의 방식은 비구상적 재현을 통한 인식의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라는 수사로 파악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어쩌면 이제 비판은 비판의 불가능성을 응시하는 속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여타의 형식적 갱신과 표면적 새로움을 요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대동소이한 형식들을 통해 어떤 내용과 의미를 독해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형식을 와해시킴으로써 비판을 전유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이제 반대로, 와해된 예술적 형식을 확립하는 것이 된다. 이제 공모는 어디에나 편재한다. 이 사회의 총체화된 생산양식 속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않은 채, 그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이 발언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외려 비판이란 자신이 비판 대상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예술의 비판은 대상의 내부에서, 세계와 대응하는 개념적 계기를 통해 대상에 대한 주의 깊은 파악과 인지를 유발하는 것으로서 존재 근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재귀 불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일, 아마 바로 그곳에 동시대적 아방가르드의 맹아가 있을 것이다.

정강산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재고하는 글을 써왔으며, 비판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일반, 유물론적 예술론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1) Angelo Guglielmi, <Avanguardia e sperimentalismo>, Milan: Feltrinelli, 1964, p.56. M. 칼리니쿠스,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이영욱 외 역, 시각과 언어, 1993, 153p에서 재인용.

2)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Theorie der Avantgarde)>,(Frankfurt a. M.,1974), 최성만 역, 지만지, 2013, pp.119-126.

3) 할 포스터,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 하는가?”, <실재의 귀환>, 이영욱 외 역,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0.

4)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110, Fall 2004, p, 70.

5) M. 칼리니쿠스, 1993, 같은 책, p.126.

6) 이브 미쇼,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동시대 미술”, <기체 상태의 예술>, 이종혁 역, 아트북스, 2005.

7) 니꼴라 부리요, <포스트 프로덕션>, 손부경 외 역, 그레파이트온핑크, 2016, p.14.

8)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긴축재정을 이유로 90년대 이후 가속화 되어온 공공기금의 축소에 잇따라 미술계에 대한 사기업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왔고, 이에 조응하는 현상이 전시의 대형화라는 사실은 이제 썩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클레어 비숍, <레디컬 뮤지엄>, 김해주 외 역, 현실문화, 2016, pp.15-24. 이런 상황에서 스타화 된 작가들은 그 어느 때 보다 자기 자신이 ‘창조’한 작품 목록인 포트폴리오를 ‘창조적으로’ 잘 관리해 온 이들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이러한 흐름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창조적 개인을 인적 ‘자원’으로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노무관리 담론에서 징후적으로 관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9) 네그리와 하트에 의해 지목된 “제국”의 시퀀스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은 정보화에 따른 지적재산권의 강화이며, 이는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되어 왔다. 이에 대해선 다음을 참고하라.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제국>, 운수종 역, 이학사, 2001, pp.381-397. 한편 <제국>에서 <공통체>(2014)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현대적 생산에선 물질화된 상품을 만들어내는 물질노동에서 비물질적인 정보와 지식을 구성해내는 비물질노동으로 방점이 이동해왔다고 주장하며, 이미 생산의 공동적 성격은 충분히 심화되었으나 생산관계(노동자-자본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들을 비롯한 소유권과 같은)는 변화한 생산력의 조건을 반영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지에서 자본주의는 체계적인 내적 합리성을 지닌 생산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폭력이자 법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도식은 정보화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의 모습을 충실하게 잘 설명해주지만, 자본주의에 항상적인 착취의 계기를 축소시키는 낭만적인 긍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미 존재하는 양식과 소재들을 편집함으로써 소유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공동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부리요의 낭만성은 노동의 조건이 물질에서 정보로 이동함으로써 공동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한 네그리-하트의 조야한 미술적 버전에 가까워 보인다.

10) 이에 대해서는 소비 자본주의의 시기의 부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스펙터클의 집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총체적으로 상품화된 문화일반에 주목한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혹은 이러한 진단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낸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참고하라. 모든 것을 소비할 이미지, 구경거리로 휘발시키는 스펙터클의 조건 속에서 상징적 차별화를 보장하는 상품에 의해 균질화 된 세계에서 독창성originality은 이미 획일적으로 구획되고 재단된 것이다.

11) 게일 해리슨 로먼 외, “타틀린의 탑: 혁명의 상징, 혁명의 미학”, <아방가르드 프런티어>, 차지원 역, 그린비, 2017, p.70, 76.

12) 낸시 프레이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언”, 김성준 역, 말과활 13호, 2017, p.179.

13)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역, 문학과 사회 117호, 2017.

14)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심세광 외 역, 난장, 2011. 통치성 색인 참조. 예컨대 케인즈식 노무관리에서 하이에크식 노무관리로의 이행이 야기한 효과를 떠올려보라. 물론 푸코에게 주권과 규율, 통치적 관리는 자유주의의 출현 이후로 통치성의 항상적인 요소들이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15)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 김욱동 편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0, pp.244-246.

16) M. 칼리니쿠스, 1993, 같은 책, pp.175-176.

17) 예컨대 보디츠코는 60-70년대의 비판적 아방가르드로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쉬포르 쉬르파스suppert surface, 한스 하케Hans Haacke를, 현재의 비평적 공공미술 지성으로서 신아방가르드를 대니스 애덤스Dennis Adams, 데라 번바움, 댄 그레이엄Dan Graham,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 안토니오 문타다스Antonio Muntadas 등으로 꼽는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변형적 아방가르드>, 길예경 외 역, 워크룸프레스, 2017, pp.273-275. 그의 구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작가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8) 본문에서 상술했듯 부리요가 전제하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는 닫힌 시간성에 대한 반응이며, 그것은 이미 정치적 진보의 불가능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환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편 좀비-형식주의는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보드리야르를 배제하면 온전한 설명조차 불가능한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정강산, “예술가들이여, 미적형식에 대한 물신을 거부하라: 좀비-모던담론을 비판하며”, 웹진 크리틱-칼, 2015.

19) “History and the Social Sciences: The Longue Durée”, Fernand Braudel and Immanuel Wallerstein, Review(Fernand Braudel Center), Vol. 32, 2009, pp.171-203. 이 논문에서 브로델이 확립하는 것은 장기지속의 핵심적인 개념들이다.

20) 공교롭게도 장소특정적 미술의 선구주자이자 개념미술가, 미니멀리스트로서 1960-1970년대 당시엔 아방가르드로 셈해졌던 다니엘 뷔랑은 최근 명품브랜드 마크 제이콥스와의 협업을 통해 런웨이를 꾸미거나, 루이비통 재단의 미술관에서 현대화된 서커스를 선보인다.

21) 다이아나 크레인, <아방가르드와 미술시장>, 조진근 역, 북코리아, 2012, p.14.

22) 같은 책, p.21.

23) 에릭 홉스봄,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양승희 역, 조형교육, 2001.

24) Claire Bishop, 2004, 같은 책 pp.66-67.

25) http://brand.hyundai.com/ko/art/projects/brilliant-30-lee-wa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