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배드 뉴 데이즈⑤_안준형: 정정당당하게 선전, 선동으로 승부하기 위한 몇 가지의 변호들

2017년 11월 30일 발행

<리딩 배드 뉴 데이즈>는 아티스트 콜렉티브, 배드 뉴 데이즈의 크리틱 프로젝트로 11월 2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목요일 크리틱-칼에 게시됩니다. 6편의 글들은 소책자로 묶여 <배드 뉴 데이즈>전시에 비치될 예정입니다. 전시에 관한 자세한 일정은 해당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badnewdayz)를 통해 공지되니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글: 안준형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프로파간다-선전화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다양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선전화는 일단 불쾌하고, 거북하고, 과장되어 있으며, 미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전화를 그렇게 주의 깊게 보는 일은 없다. 너른 아량으로 과연 진정한 프로파간다 이미지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해도 그렇게 썩 쉽게 될 일은 아니다. 남한사회에서 허락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이미지는 지도자를 찬양, 숭배한다거나 단순 무식하게 적(철천지원쑤 미제, 전쟁 야욕에 사로잡힌 파쇼군대 등)을 쳐부수자고 부추기는 영 바보 같은 이미지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파간다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올려보고, 프로파간다를 경멸하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인 듯 하지만 사정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념적인 이미지들부터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그들을 상기하도록 허락되어 있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보같은 선전화 보다 먼저 우리가 더욱 바보일지도 모른다. 왜냐고? 우리는 선전화가 선언하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달콤한 약속을 비웃을 줄은 알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다른 미래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와 새로운 미래에 대한 낙관과 비전을 비웃기란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그러한 전망과 기대를 보존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하는 프로파간다의 몇몇 유형들에 대한 대략적인 도상학적 분석이다. 소비에트 블록의 붕괴 이후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전리품처럼 호사가들의 가정집 벽면을 장식했던 이 포스터들은, 사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이 가능했던 시기의 어떤 심상들을 암호처럼 품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새로운 미래와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사, 대안적인 사회에 관한 열정이 외화 되는 이미지적 형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환희에 찬 민중들:

냉소나 비아냥거리기, 의심해보기 같은 건 오늘날의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천들이다. 집단 속에서의 무아지경이나 공허한 이념과의 동일시는 냉소적인 서양식 조크의 좋은 소재가 될 뿐이지 않은가. 물론 자기계발에의 몰입과 스티브잡스, 빌 게이츠, 워렌버핏과 같은 뛰어난 인문학적 자본가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생활 습관 따위에 혼연일체가 되는 열정은 언제나 장려되고 권장된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정치적 열정도 죽은 개 취급을 받는다는 상황에서 다소 역설적인데, 그러나 역시 훌륭한 현대인이라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아냥거릴 줄 알아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순 없을 것이다. 허나 이와는 반대로 프로파간다의 양식 중 주요하게 범주화시킬 수 있는 유형 하나는 환희에 차 있고, 의심이 없으며, 열정적인 모습들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오늘날엔 ‘광기에 찬’, ‘미쳐있는’, ‘세뇌되어 있는’ 등의 표현으로 쉽사리 바꾸어 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믿음과 이데올로기, 집단적인 정치적 기획에 조소를 날리는 똑똑하고 야무진 현대인들은 저 미친 현실사회주의국가가 반인륜적인 노동교화소와 정치범 수용소들을 운용하였으며 이제는 완전히 파산하고 망해버렸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들의 환희가 거짓됨을 알고 있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지만, 재앙을 몰고 온 만악의 근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실 환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일찍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범죄자들의 노동 교화를 위한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과, 악명 높은 포로 고문을 일삼은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초기 식민지 경쟁에서 나타난 자본주의 열강들의 야만적인 학살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쉽사리 사회주의를 악으로 전제하고서 비난하기 이전에 현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들에게 냉소와 비아냥거리기와 같은 태도가, 고뇌하고 의심하는 자아상의 욕구를 그릇되게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이것이 가능한 세계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한 태도로 인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며 무언가에 열중하여 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미친 인간들처럼 보이지 않는가? 앞 뒤가 꽉 막힌 채 대화가 안 통하며, 나에게 윤리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바보들 말이다. 허나 여전히 기아와 전쟁, 대량 살육, 불평등한 소득격차 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위 포스터 유형들이 암시하는 그러한 전적인 믿음과 결단이 없이, 어떤 유의미한 세계의 변화가 가능할까? 어쩌면 진짜 미친 것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신주단지 받들 듯 모시는 냉소에 찬 우리들 아닐까. 미래를 믿었던 그들과 차라리 과거에 침잠하는 우리 중 누가 더 미친 인간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환희에 찬 민중들”이라 임의로 이름 지은 이 같은 선전 유형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른 세계가 약속하는 환희와 열정,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언하는 것 같다.

가족과도 같은 위인의 상:

선전화는 많은 인물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개인을 묘사하는 초상화나 인물사진과는 달리, 프로파간다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한 계급이나 정체성으로 보편화되고 추상화된 인물상이다. 달리 말해, 어떤 공동체의 대표성을 담지한다면 설령 그것이 개인이라도 선전화를 통해 선전되곤 한다. 바로 혁명의 지도자나 영웅, 위인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나 국가의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마치 시대정신이라는 모순어법이 그러하듯 말이다. 요컨대 혁명의 지도자는 곧 시대정신을 체현한 인물이며, 민중 내지 인민이라는 추상적인 주체의 정신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 개인이 어떤 사회의 대표성을 가질 정도라면 그곳에서 그 인물은 심히 비범하고 대단한 위인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위대하고 초월적인 어떤 인물에게 이입하고 그의 가치관을 지향할 수 있을까? 혹은 시대정신을 체화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누군가는 애당초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상이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그것은 혁명이 우상숭배라는 구시대의 낡은 습속을 온전히 지양해내지 못한 까닭에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 곁에 머무르는 환상일 수도 있다. 모든 몽매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고 비판하는 대자적인 사회주의적 인간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상과, 우상화되고 박제된 혁명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영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역설은 그가 대단하고 모범적으로 재현될수록 그 상은 더욱 동일시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자 했으나 그러한 시도 또한 혁명을 선도한 주요인물들이 문자를 읽을 수 있으며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들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은 마땅히 권위와 위용에 어울리게끔 사뭇 진지하고 근엄하게 그리는 일이 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선전화들은 일국 내부에서 사회주의 존립을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정책노선에 부응하여 다량 제작되었기에, 사실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프로파간다는 영웅을 영웅답게만 그려 선전하지도 않는다. 선전화의 대표적인 양식중 하나는 가족과도 같은 위인의 상이기 때문이다. 해당 공동체의 위인을 흔히 동네, 평범한 가정에서 볼수 있을 법한 친근한 인상으로 표현하는 일은 선전화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양식 중 하나이다. 이는 위인과 보편성의 역설을 겨냥하는 정치적 기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나름 합리적인 대표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보편적 주체와 동일시되기에 그에 마땅한 재현의 양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당연하게도 혁명이 성공한 국가에선 혁명의 이념을 오롯이 유지시킴으로써 혁명을 보존하고 국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것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까지 수혈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혁명의 지도자와 혁명의 2세대를 상징하는 어린이가 만나는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믿을만하지 못하다’라는 식의, 오늘날 유행하는 정치혐오의 맥락에서 읽히진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세계를 바꾼다는 것은 우선 어떤 대상과의 강한 동일시를 전제로 하며, 변화된 세계는 사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요지다. 동일시의 대상이 예수, 부처, 혹은 노동자, 민중, 민족, 여성이라는 추상적인 주체이든, 자유주의, 사회주의, 보수주의라는 모호한 이념이든, 레닌, 마오, 게바라 등의 인물이든, 그러한 동일시의 과정은 곧 시대정신을 승인하는 과정이며, 그게 정치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 대상은 보편적 이념의 지향을 가리키는 아이콘인 동시에 만인의 의지가 집약된 형상이며 따라서 그 다음 세대에게 이념의 유산을 전수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로부터 무분별한 동일성만을 확인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편성을 담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념을 기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확인하듯 창의적인 예술가와 혁신적인 자본가가 절충된 스티브잡스적 ‘롤모델’과 ‘멘토’가 시대정신을 대체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유형의 선전화는 시대정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짐짓 시치미를 떼는 일에서부터 가능한 변화가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리라 말하는 듯하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화면 내부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이미지의 바깥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선전화의 목적을 고려해보았을 때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신세를 지고 있는 이념의 한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이념을 어떻게 가시화시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거주중인 국가의 지도자일까? 아니면 영웅과 위인? 책이나 깃발? 어쩌면 그것은 그들 중 하나이거나, 그 모든 것이거나, 혹은 그 모두를 초과하는 대상일 것이다.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그들이 꿈꾸는 이념이 가시화된 형상이 아닐까 싶다.

평범하게 먼 곳을 보려고 할 때에 사람들은 눈가를 찡그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면 먼곳에 있는 흐릿한 물체의 해상도를 조금은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가를 찡끄리지도 않고 오히려 똘망똘망하게 그 곳을 바로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이념은 아무리 먼 곳에 있다 한들 흐릿하지도, 의심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가 믿는 이념의 한 양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미래에 대한 상상과 관련된 것이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 하지만 어쩌면 도달할 수도 있을 곳,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곳, 곧 도래할 듯한 장소는 응시를 통해서밖에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러한 양식의 프로파간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상상들을 증언한다.

그러나 한편 이 양식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편에 속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는 아직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대학교 입학 광고나 취업 박람회의 홍보 포스터같은 것들에 어김없이 먼 곳을 바로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클리셰중 하나이다. 명백한 삶의 변화를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어쩌면 이제 집단적인 무의식으로 넘어가고, 그나마 가시적으로 외화된 상상들은 개인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쪽 손을 높이 쳐들고 있는:

선전화에는 큰 보폭으로 전진하는 자세, 무언가를 가리키는 자세, 주먹으로 분쇄하는 자세, 손을 저어 단호하게 거절하는 자세,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자세 등 몇 가지의 자주 재현되는 자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손을 높이 쳐들고 있는 자세는 선전화의 인기 있는 포즈 중 하나이다. 보통 이 유형에는 오브제들이 적극적으로 동원되곤 한다. 책이나 깃발, 수첩 등,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이념을 함축하는 오브제들을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리고 있거나 드물게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그냥 손을 흔들기도 한다.

이 독특한 제스쳐에선 대략 두 가지의 인상이 교차한다. 첫 번째는 이념을 번쩍 들어올려 보이는 것으로 그 자신과 이념에 대한 자부심을 표하는 것이고(<세계를 뒤흔든 열흘>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후 노동자들의 대오가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며 퍼레이드를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두 번째는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이 멀리 있는 지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듯, 말 그대로 선전을 하는 것이다.

안준형, <코리아 프로파간다>, oil on canvas, 101×141cm

이렇듯 프로파간다는 이상하리만치 이데올로기의 가시성이 확보된 형식이다. 자신 있게 갖은 미몽과 환상에서 벗어난,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시대임을 자처하는 오늘날엔 더더욱, 프로파간다는 지독하리만치 이데올로기적인 잔여물이자 그 유령으로서 현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바깥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독하리만큼 이데올로기의 잔여물로 여겨지는 프로파간다는 흥미롭다는 생각이다. 허나 정말로 프로파간다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몽매와 무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시대를 증언하는 오늘날의 몇 안 되는 증거 중 하나일까? 어쩌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인류 역사상 가장 신학적인 세계라고 묘사한대로, 탈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사실은 이데올로기가 더욱 더 공고히 작동하고 있는 증거인 것처럼, 무언가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사유를 가리는 장막이자 역설 중 하나는 아닐까? 오늘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선전, 선동이라는 말이 어느새 비난의 수사가 되었고, 모두가 그것이 왜 비난이 되는지 알고 있는 체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비겁하게 팩트를 늘어놓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조작과 선동으로 승부하라’고 하는, 요즘 유행하는 이 반어법처럼, 선전, 선동은 조작과 날조라는 말과 아예 한 세트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서 ‘사실’은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은 채 홀로 독립된 의미소로 설정된 반면, 선동과 선전은 어떤 사실도 담지 못하는 공허한 말장난이자 누군가의 관점이 투시된 거짓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일련의 실천들에 의해 이미 선전되고 선동된 것들이다. 이는 일체의 자연과학적 사실조차 부정하는, 예컨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식의 음모론이 아니라, 그조차도 태양과 지구의 의미와 위상을 설정하고 탐구하게끔 유도된 기제가 존재하며, 가장 단순한 자연과학적 진술조차도 어떤 기제와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상대하는 과학적 진술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기제들이 작용한 결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실은 선동으로부터, 누군가의 실천의 작용인 선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며 정작 대상의 변화를 추동한 궁극적인 기제와 원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매에 빠진 것은 누구일까? 선동, 선전과 진실의 상실, 숨겨진 음흉한 꿍꿍이를 동일시하는 우리들일까, 기꺼이 대안적 진실을 추구했던 이들일까? 이 지점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지독한 교착 지점 중 하나이며, 빛 바랜 프로파간다로부터 현재의 승리를 자축하는 일 보다 진정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안준형은

영웅과 위인의 흔적, 옛 정치적 이미지들의 자취를 쫓으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냉소적 세계 안에서 정치적 열정과 믿음이 어떻게 우회되고 고발되고 있는지 탐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