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_2017 한예종 조형예술과 졸전 리뷰: ‘캐치를 하는 세계’를 다녀와서

2018년 1월 14일 발행

30 여 명의 작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인전을 펼치기로 했던 걸까. 냉랭한 복도를 오가며 여러 문들을 열었다가 닫았다. 문득 졸업 전시가 아니라 서울 어딘가에 가설된 공간에 펼쳐놓은 이벤트로 착각하게 되는 찰나들이 있었다. 착각이라기보다 기시감이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각 졸업생-작가에게 할당된 공간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확보할 수 있는 서울 내의 몇 안 되는 전시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졸업 이후에 ‘현장’에 ‘나간다’ 해도 높은 확률로 냉난방 시설이 구비되지 않고 건물의 뼈대가 그대로 노출된 공간에 전시를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물리적 조건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하는 원칙이나 지원의 폭도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캐치를 하는 세계>(이하 <캐치>)는 그러한 조건들을 이미 체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졸업 전시라는 것을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도록 주어진 조건을 잘 활용하여 공간을 조성하고 설치를 진행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크레딧에 빼곡히 적힌 참여자의 이름들과 각 방에 놓인 핸드아웃에 적힌 별도의 전시명들이 <캐치>가 단지 심사를 통과하고 졸업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내보이는 자리라는 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작업에 몰입하거나 그 앞에서 다른 생각들이 촉발되는 경험은 드물었다. 작업이나 설치의 완성도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고, 현장의 맥락을 이미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했음에도 그 공간 안에 선 관객이 갈 길을 잃고 제대로 접속하지 못하고는 이를 만회하려는 듯이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어 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소해 보이는 특징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우선 각 작가에게 할당된 공간에 블랙박스를 연출한 경우가 꽤 많았다. 물론 조현의 경우 커튼을 활용하여 블랙박스와 VR 상영실을 연출한 것이 영화관이라는 장소와 영상 매체가 다뤄지는 방식을 재고하는 작업의 맥락과 잘 부합했고, 이처럼 작업이 블랙박스를 요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별다른 필연성을 추적할 수 없는 어두운 공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조명 설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전시 공간이 어둡다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만 조도를 낮추어 관객의 몰입을 직설적으로 유도하는 데에 비해 작업 자체의 밀도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때 그 공간들은 어쩐지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불길한 느낌,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지 규명하기 어려운 무거움.

캐치를 하는 세계 포스터, 아카이브 사이트: http://kartsfaa.org/

하지만 이러한 음한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비관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전시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캐치>가 마주한 세계의 하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캐치를 하는 세계”가 작업의 시작 단계부터 던져진 과제는 아니었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면, 각 방에서 작가들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란 어떤 곳인지 되물어볼 수는 있겠다. 이때 마주하게 되는 문제는 <캐치>의 세계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구체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보다—물론 그런 부분도 전혀 배제하긴 어렵겠지만—각 방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한 채로 정확히 멸망의 정서가 공유되거나 충분히 비관하기보다 어떤 무기력에 대한 소문이 한 차례 훑고 간 듯한 음산함이 드리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작가가 캐치한 세계에 접근하기 유난히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매체 불문 이에 해당하는 유형은 작업과 작가의 스테이트먼트 사이의 괴리가 극심할 때이다. 관객이 졸업 전시 내의 작업들 앞에서 겪는 소화불량은 한 작가의 이전 작업들을 따라가 보면서 쌓았어야 할 시간이 결여되었다는 점에 주로 기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낯선 작업에 접속하기 위해 함께 놓인 텍스트를 유심히 읽게 되는데, 스테이트먼트에서 밝힌 바를 작업이 전혀 작동시키지 못할 때, 마치 작가의 작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기획자가 써준 서문과 같은 글이 작업과 함께 놓여 있을 때 돌연 작업과 텍스트 모두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회화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전반적으로—물론 예외가 있었지만—한 방 안에 폭넓은 작업들을 잘 정돈해 선보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디서 본 듯한 화풍이나 색감이 두드러지는 작업군과 그것과는 이질적인, 전혀 다른 사람이 그렸다고 해도 수긍할듯한 작업으로 양분되어 보이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때 전자의 경우가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작업이 훨씬 더 가까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자는 촬영해 온 이미지를 재차 확인해 볼 때 보다 완결성을 갖춘 듯했고 후자의 경우 작업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경험이 더 명징했다.

이 두 가지 유형이 전시 전반에서 느꼈던 허기를 완전히 규명해주지는 못한다. 다만 30 여 개의 개인전을 살피며 즉 각자의 세계가 조밀하게 응고되어 있기를 혹은 이를 캐치하려는 악력을 확인하기를 기대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리뷰를 요청받았을 때 모두가 공들인 졸업 전시인 만큼 최대한 많은 작업을 언급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정에 따라 원고를 썼다. 하지만 30 여 명의 이름과 작업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적어 내려가던 중 담임 교사가 작성해 주는 세 줄짜리 생활기록부와 똑 닮았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캐치>에 기대했던 바, 즉—추상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이지만—작업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어떤 세계를 만날 수 있었느냐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작업들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관객으로서 내가 접속할 수 있었던 ‘캐치’의 세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며 감상문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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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Something in line + background>(싱글 채널 비디오, 4min 45sec)는 깊이의 차원이 생략된 이미지와 네 컷 만화를 연상시키는 분할 프레임을 기본 템플릿으로 설정한 영상이다. 화면 속 화자들은 목소리로 말을 할 수 없는지, 혹은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지 자막으로만 발화한다. 영상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인간이 아닌 물고기 시점에서 ‘나’가 누구인지, 그리고 스스로가 갇혀 있는 환경은 어떤 곳인지를 묻는다. 이때 내뱉는 말들—“다시금 날 여기 가두고 뭘 하려는 거지?”, “여기가 어디지?”—은 화면 밖으로 공명하여 대답을 요구하기보다 뜬금없는 자문자답에 가깝게 전개된다. 사분할된 화면에 얹혀진 상투적인 디지털 이미지로밖에 스스로의 좌표를 파악할 수 없게 되자 대뜸 ‘해야 솟아라’의 노래 가사가 끼어든다. 출구가 없는 화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한 사분면에서 다른 사분면으로 밀고 밀리거나, 그 표면 위를 부유하거나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마 전부일 것이다. 물고기, 소녀 일러스트, 돌고래, 정체불명의 형상 등이 화면에 등장하여 때때로 나가버리겠다며, 혹은 도망치라며 단말마를 내지르지만 아무도 화면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못한다.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 새 날, 새 해에 대한 희망은 결코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탈출할 수 없는 납작한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그친다는 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레임은 희망을 희석시킨다. 하지만 분명 그 화면 속에서만 가능한 간편하고 산뜻한 희망의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지원이 그려내는 비관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기본 템플릿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짧은 편에 속하는 이 영상에서 시점의 주체가 쉴 새 없이 이동하는데, 시점의 이동이 반드시 인간-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 전시장에 함께 설치된 드로잉들은 인간-시점 화자의 말에 무심하거나 버릇없게 받아치는 비인간-시점 인물들이 등장하고—“인간인척 쩌네 재수없어!”, “거 참 성질 더럽네ㅋ”, 이러한 존재들의 개입으로 대화는 뚝뚝 끊기고 서사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주어진 세계 속에 갇혀 있다는 감각은 이로써 깊이 있는 절망감으로 드러나기보다 이질적인 존재들의 시선에서 횡적으로 펼쳐진다. 인간 주체로서의 유능감을 스스로 발견하거나 확신하기 어려운 리얼리티를 설정해 두었다면 납작한 스크린에 갇힌 물고기가 되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
정유진이 연출한 공간에 들어서자 전시장 밖에서 채집한 풍경의 단편들이 들어서 있다. 아니, 첫눈에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내 이 공간이 통째로 엇나간 시간 속에 밀려들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간을 가설하는 데에 동원되는 자재들로 만든 설치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공간을 확보했다기보다 시간이 흘러가다가 미처 챙기지 못한, 공간이 변형과 재건을 반복하던 중 보살피지 않고 두고 간 것들로 다가온다. 현재로 귀결된 과거 시재는 차분히 축적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단발적으로 가설하고 폐기하기를 거듭해온 것에 불과하다는 어렴풋한 인상(<동굴벽화>, <졸라맨이 죽은 자리>). 이미 다가오고 있는 미래가 그들을 보란 듯 비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해적판 미래>). 이 공간은 과거에 인간들이 잠시 머물렀지만 그곳을 견디지 못해서 사라진, 하지만 미래에 시원한 종말이 오리라는 기약도 없는 시간으로 밀려들어가 있다. <악 담기(웰컴 플랜트)>의 이파리에는 “인간이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미래의 송충이가 우리말을 습득하여 엄중히 경고하는 것인지, 과거의 현자가 미래의 인류에게 던지는 다급한 메시지인지 규명할 수는 없지만 그 공간의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 사계절 가리지 않고, 아니 도저히 예측 불허한 계절 변화에 미쳐버린듯 제멋대로 피어나기로 작정이라도 한 개나리(<(故) 개나리 – 카모플라주>도 한마음인 것 같다. <최후의 만찬>의 아웃라인을 따라 스테이플러 심을 반쯤 박아 넣은 듯한 <슛팅 드로잉>이나 내장재로 주로 쓰이는 스티로폼을 임의로 깎아낸 무늬 사이로 드문드문 도시의 랜드마크가 그려진 <동굴벽화>는 시간의 축적을 날조한다. 위조된 과거의 시간, 가짜 식물들의 경고, 불법적인 미래로 둘러싸인 현재라는 시간은 얼마나 조악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것일까.

+
이승주가 그리는 세계는 살뜰하게 파괴되어 있다. 먹으로 그려낸 이미지는 명료하고, 작업 전반에서 흑백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흑과 백의 긴장이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끼어드는 빛, 기류를 타는 데 실패한 연, 구조를 요청하려는지 마는지 하는 백기, 그리고 인물의 천진한 웃음으로 드러나는 흰 치아. <탈출기>(56x67cm) 시리즈에 등장하는 흰 면들은 검거나 뿌옇게 망해버린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줄기들은 구도상 구조 헬기로부터 온 것 같이 보이지만 장면 속 인물은 이를 추구하지 않고 전혀 무관한 행동을 이어간다. 구조 신호를 보내지면 위에서 떨어지는 빛줄기에 열광하지 않는 인물은 잔해 속에서 대체로 환하게 웃고 있다. <탈출기>의 한 프레임에 하나씩 그려진 인물을 제외한 모두가 그 세상이 철저히 망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인물도 세계에 내려진 사망 선고 앞에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세계를 떠나지 않고 잔해 속에 스스로를 파묻거나 무언가를 만들고 열심히 걷고 어딘가를 오른다. 한편 한 벽면을 채운 <내가 나를 구원하리라>(150x200cm)에서는 어이없는 웃음조차 가신 채 스스로의 멱살을 잡아서 끌어 올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구원은 영영 유예된 것 같다. 하지만 지연된 구원과 현재 사이의 간격은 촘촘하고 성실하게 그려진 탓에 ‘망했으니 대충 살자’ 정도로 요약되는 태도를 비켜 나간다. 때문에 반대 벽을 가득 채운 <우리는 건강하다>(450x200cm)에서 여러 손이 들어 올린 메시지가 단순한 반어법적인 말장난으로 다가오기보다 어느새 양가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건강하다고 자기 위안 삼는 손들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스스로 선언해 보이듯이 건강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