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최민화 개인전 ‘두 개의 무덤 스무 개의 나’에 대한 아쉬움

2017년 12월 16일 발행

* 본 글은 2016년에 웹진 두쪽에 기고했던 글이었으나 두쪽의 운영이 종료되어 크리틱-칼로 옮겨온 것입니다.

최근 최민화 작가의 개인전이 합정지구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시 소식을 듣고 내 머릿속에서는 왜 지금 합정지구는 최민화를 호출했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물음표는 합정지구가 어떤 시의성을 염두에 두고 최민화를 호출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합정지구에서 열린 최민화의 개인전은 어떤 시의성과 연결될 수 있을까. 내가 최민화의 개인전에 기대했던 시의성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올해 미술시장의 주도로 시작된 것으로 회자되는 민중미술 바람과 관련이 있다. 올해 미술 장에 민중미술 바람이 덧붙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국내 화랑과 언론은 국제 미술시장에서 나름대로 선전을 이어온 단색화에 열풍, 한류 같은 수식어를 부지런히 붙여왔다. 그리고 단색화의 이러한 열풍 앞에서 꾸준히 민중미술 작가를 다뤄온 화랑들은 민중미술도 바람을 넘어 열풍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 부채질을 거듭하는 형국이다. 이 부채질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곳은 가나아트센터와 학고재를 꼽을 수 있다. 가나아트센터와 학고재는 시장성이 어느 정도 검증된 민중미술 작가를 하나둘 호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호출에 민중미술 작가들도 별 저항 없이 화랑의 부채질에 몸을 맡기고 있다. 사실 민중미술 바람을 주도하고 있는 가나아트센터는 민중미술의 상징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예전부터 꾸준히 노력해왔다. 한 예로 가나아트센터가 2001년에 상설전시를 조건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던 200점의 민중미술 작품이 올해 ‘가나아트 컬렉션’ 전시실 개관과 함께 빛을 보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가나아트센터의 오랜 노력은 타이밍 좋게도 최근 북서울미술관에서 개막한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와 포개지기도 했다. 덕분에 민중미술의 시장화에 골몰하는 화랑들은 민중미술의 연속성, 현재성에 대한 알리바이 일부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손쉽게 빌려올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최근 불기 시작한 민중미술 바람에서 최민화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을까. 화랑가에서 최민화를 호출할 것이라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지만, 민중미술 대표작가라는 멋쩍은 수식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최민화도 민중미술 바람에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나는 합정지구의 이번 최민화 개인전이 최근 화랑과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명하며 만들어 내는 바람에 대한 시의성 있는 반응을 내보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최민화, 두 개의 무덤과 스무 개의 나, 캔버스에 유체, 142x360cm, 1999

두 번째는 최민화가 우리에게 던져온 미적 가치가 무엇이고 그 미적 가치를 현세대가 어떤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합정지구가 거칠게나마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현세대가 앞 세대의 집단적 혹은 개인적 경험을 비판적으로 이어받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세대별로 찢진 집단들이 그저 물리적으로 공존하는 반폐허가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비판적 연속성의 부재로 인한 폐해는 미술 장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평소에 나는 세대 간의 비판적 연속성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 미술 장에 대해서 늘 안타까움을 느껴왔다. 그런데 마침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합정지구에서 최민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앞서 말한 비판적 연속성과 뒤섞인 기대감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합정지구가 개인과 사회,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가와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보여 왔기에 이러한 기대감은 더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비판적 연속성에 관심을 두는 이유 중 하나는 미술 장 안에서 세대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비판적 연속성이 꾸준히 작동할 수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나는 다양한 창작활동도 더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정치적 당위보다는 형식실험이나 자유로운 유희에 주목하는 젊은 작가들의 최근 창작경향을 충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과거 단색화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향의 반대편에 있었던 1980년대 민중미술이 지금까지 어떤 궤적을 밟아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되뇌어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이 꾸준히 이뤄지지 않았을 때 형식실험과 자유로운 유희를 선호하는 젊은 작가들의 근간을 몇 가지 소실점으로 서둘러 봉합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다른 예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붓으로 더듬으며 소박(심)한 발언과 실천을 모색하는 이우성 작가의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이나 걸개그림을 상기시키는 정사각형 천 그림 같은 연작을 최민화의 <횃불시위>, <그대 뜬 눈으로-이한열 열사 부활도>, <이석규 열사 부활도> 같은 작품과 비교하여 각각의 상이함이나 공통점을 담론화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합정지구에서 열린 최민화의 개인전은 앞서 언급한 기대감과 맞물리는 점은 그다지 없었다. 이번 최민화 개인전은 그의 대표적인 연작에 속하는 작품 몇 점과 미공개작 일부를 함께 배치하고 거기에 작가와의 인터뷰를 곁들인 구성을 취했다. 물론, 최민화의 작품을, 그것도 미공개작 일부를 실견할 수 있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최민화의 분홍을 인쇄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은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구성이 정직한 절망이나 실패하는 위로, 죽음 같은 낭만적 클리셰(Cliché)를 되새김질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역시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최민화의 작품활동에서 클리셰화된 부분을 극대화한 것은 그의 18번인 <아름다운 강산>을 들을 수 있는 헤드폰에서였다. 이 같은 클리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을 극화하는 구성은 합정지구 같은 젊은 공간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와 현세대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을까.

만약 이번 전시가 앞서 내가 언급한 두 가지 기대감이 아니더라도 최민화의 클리셰를 우회하여 재맥락화가 필요한 지점들을 드러내는 구성이 취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전시가 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작품 상태에 문제가 없다면 최민화의 2000년대 <상고사> 연작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민화의 <상고사> 연작은 대량으로 복제, 배포, 판매되는 브로마이드 위에 서양 근대미술사의 대표 매체인 유화로 한국 고대 신화를 희화화한 것이다. 민족과 민주를 중시하는 시대에 뜨겁게 타올랐던 최민화의 궤적을 반추해봤을 때 이러한 이미지 변용을 시도한 것은 분홍에서 옅은 회색과 흰색으로 탈색된 그의 근작들만큼이나 흥미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이 당시에 성완경 평론가는 <상고사> 연작을 두고 최민화 특유의 ‘미칠듯한 순수의 서정, 증류, 솟구쳐 오르기, 열혈남아, 양아치, 무림, 영웅적 순수’를 잃었기에 “길을 잃었다”고 보기도 했다. 이 같은 <상고사> 연작에 대한 성완경의 실망도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성완경은 최민화를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과거 1980년대 민중미술이 만들어낸 낭만적 자장 안에서만 바라보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최민화의 <상고사> 연작은 분명 이러한 시각에 대한 거리 두기이자 자신이 현재 발을 딛고 서 있는 시대에 대한 반응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민화의 <상고사> 연작과 성완경의 간극을 오늘날 재맥락화 할 수 있다면 최민화가 우리에게 던져온 질문 중 하나를 현세대가 더 구체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질문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합정지구처럼 작고 영세한 규모의 공간에서 예순을 넘긴 작가의 개인전을 치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앞서 내가 지적한 점들이 합정지구 같은 공간이 아니라 자본과 인력이 갖춰진 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사실 나는 합정지구가 처음 생겼을 때 이곳이 아트 스페이스 풀의 위성공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합정지구를 이렇게 예단하는 것은 단편적인 일반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예단을 걷어내고 보자면 합정지구는 각자 쉴 틈 없이 자신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미술 장의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서로서로 바라보며 함께 어울리고 응원할 수 있는 소집단에 더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합정지구는 끝없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일면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만족하는 것이 합정지구 같은 소위 신생공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할까. 나는 가능하다면 합정지구 같은 공간이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아니라 주어진 고속도로 밖의 길을 상상할 수 있는 갓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상상력을 지킬 수 있을 때 합정지구는 관성이 아닌 능동성을 품은 지구(持久)를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