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흑표범 ‘VEGA’ 리뷰: 절망과 애도 사이에서

2017년 12월 16일 발행

* 본 글은 2016년에 웹진 두쪽에 기고했던 글이었으나 두쪽의 운영이 종료되어 크리틱-칼로 옮겨온 것입니다.

《VEGA》가 열린 공간해방에 들어서자마자 세월호 참사 당시 진도 체육관에 계셨던 어머니들이 그려진 삼베 천들을 볼 수 있었다. 삼베 천들 앞뒤에는 이영만 학생의 어머니가 평소에 수집했던 아들의 물건들과 그 물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가 만든 뼈 모양의 작업 몇 개가 어우러져 있었다. 삼베 천 반대편에는 흑표범 작가가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제작한 낡은 시계와 영만 학생이 어릴 때 주어온 조약돌에 큐빅을 붙인 작업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시계와 조약돌 아래 창가에 붙은 작은 종이 위에는 어머니들의 육성과 작가의 자전적 기억이 교직된 영상이 맺혀 있었다. 이처럼 《VEGA》가 열린 공간해방은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고요히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공명은 가시적 요소에 한정되지 않고 흑표범의 퍼포먼스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공동체 상영 및 대화의 자리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로도 이어졌다. 덕분에 《VEGA》는 좁은 공간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VEGA》를 통해서 직조된 관계만큼 외부로 확장될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종이 위에 맺힌 영상에서는 세월호 참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 관한 추억이 어머니들의 육성을 통해 재구성되었다. 곁에 없는 아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어머니들의 비통한 육성을 들으면서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인한 재앙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떠넘겨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영상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어머니들의 육성 사이에 흑표범 작가의 꿈이 틈입한 것이다. 흑표범의 꿈속에서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아들은 그녀의 몸 안과 밖을 넘나들며 아이나 어른의 모습으로 연이어 나타난다. 흑표범의 꿈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 아이는 불안한 여운을 남긴 채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고 그녀는 그런 아이를 끝내 붙잡지 못하고 “아들! 아들!”이라는 외마디 절규만을 남긴다. 어머님들의 육성과 흑표범 작가의 자전적 기억의 교직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영역 밖에 있는 수많은 개인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다시금 되뇌게 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소박한 일상을 빨래건조대에 매달린 이영만 학생의 유품과 삼베 천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교복, 어버이날 편지 같은 물건들을 통해서 반추할 수 있다. 본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머금어갔어야 할 이 물건들은 한 개인의 죽음과 함께 시간이 멈춘 유품들이 되어버렸다. 이 유품들은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겨진 가족들의 붕괴된 일상과 그에 따른 절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전시장 벽면에 걸린 편지들과 교복이 맨몸으로 애원하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이 그려진 삼베 천과 서로 맞닿지 않고 평행하게 배치된 것도 그러한 절망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이를 상실한 절망은, 그것도 억울한 상실로 인한 절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 없는 공백이다. 이 공백 속에서 가족들의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 뿐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위를 미끄러지며 일상을 쌓아가는 이들과 세월호 유가족의 괴리감은 점점 깊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흑표범이 빨래건조대에 자신이 뼈들을 유품들과 함께 매달아 놓은 것은 공백 속에서 맴도는 유가족들의 시간을 기꺼이 타인의 절망을 함께 마주하고자 하는 개인, 공동체와 연결하고 이들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는 이정표 중 하나로 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제작한 낡은 시계와 큐빅이 박힌 이영만 학생의 조약돌을 보자. 이 낡은 시계와 조약돌은 이영만 학생의 어머니가 베란다에서 매일 보셨던 직녀성 방향에 맞춰 배치되었다. 시침과 분침이 없는 낡은 시계는 흑표범이 광주 희생자의 사진을 5.18 재단에서 얻어서 시계에 붙이고 희생자의 훼손된 신체 이미지에 큐빅과 유화를 염하듯이 얹은 것이다. 이 두 작업은 세월호 참사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연결 지었다는 점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을 떠오르게 한다. 홍성담의 <세월오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5·18 광주정신으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홍성담이 말하는 광주정신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그러나 흑표범의 손길을 거친 낡은 시계와 조약돌은 홍성담의 말하는 광주정신 같은 거시적 측면 보다는 개인들의 고유한 미시사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흑표범은 5.18 희생자의 사진에서 어떤 거대한 담론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개인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침과 분침이 없는 낡은 시계는 초침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초침 뒤에는 상흔을 물감과 큐빅으로 보듬은 광주 항쟁 희생자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초침만이 돌아가는 시계는 분명 어떤 시간을 재현하고 있지만, 시침과 분침이 없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시간을 재현한다. 그래서 이 초침은 광주 항쟁 희생자라는 거대한 틀만으로 봉합될 수 없는 한 개인의 고유한 시간을 은유한다. 아마도 흑표범은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생명의 유품인 조약돌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의 사진과 동일한 맥락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대 담론이나 통계치, 보상금 몇 푼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말이다.

VEGA / performance / 2016.2.13.6pm @ space Haebang, seoul

전시 기간 중 두 차례 진행된 흑표범의 퍼포먼스는 공간해방 맞은편에 있는 빈 창고에서 진행되었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공간해방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쭈그려 앉아 창가에 맺힌 영상과 흑표범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흑표범과 관객들의 시선은 흑표범과 공간해방 사이에 놓인 찻길 위를 무심하게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인해 이따금 끊기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과 흑표범은 영상과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만은 계속 공유할 수 있었다. 흑표범은 팽목항에서 가지고 온 이불을 덮고 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관객들을 약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녀는 왜 그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흑표범은 자신이 몸으로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은 것이 몸을 비움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몸을 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흑표범의 빈 몸에서 재현으로 채워진 몸과는 다른 차원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의 기억과 절망을 담아냈음을 그녀의 날 선 눈빛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번 퍼포먼스에서 흑표범이 몸으로 무언가를 재현했다면 그만큼 희생자와 어머니들의 심신은 희석되거나 왜곡될 여지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퍼포먼스에서 흑표범이 자신의 몸을 담담하게 비운 것은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예술이 불능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흑표범의 이번 퍼포먼스는 타인의 절망을 미력하게나마 기꺼이 품에 안아보는 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순환을 염원하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같은 거대한 절망 앞에서 예술은 정말 불능일 수밖에 없을까. 나는 예술이 결코 어그러진 사회의 구조와 규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영역은 예술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정치, 언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조율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율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절망에 대한 사회적 애도를 조금씩 이끌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가 사회적 애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전사회 구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절망 앞에선 예술은 무엇으로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거대한 참사 앞에 선 예술이 소집단이나 개인 같은 미시적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망에 빠진 삶 곁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예술은 사회적 애도가 흘려버린 수많은 개인의 고유한 삶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다. 이에 관한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VEGA》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VEGA》는 영만이 어머님, 예진이 어머님, 시찬이 어머님 곁에서 함께 상실을 애도하고 기억을 구술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애도와 미시적 애도 사이에 우열은 없다. 두 가지 애도는 각자의 역할을 신실히 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 안에서 이 두 가지 애도가 함께 발을 맞춰 앞으로 나갈 수 없다면 세월호 유가족의 절망은 애도의 과정에 진입할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이 애도의 과정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숨을 거둔 아이에게 두고 온 삶에 대한 의지와 감정을 되찾지 못하고 계속 위태로운 상태에 빠져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사회적 애도와 미시적 애도가 각자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실조차 상실해 버려 상실 자체가 부재하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무가치해진 비참한 세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흑표범의 《VEGA》는 분명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절망이 애도로 진입하는데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나는 흑표범의 《VEGA》에 감사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또한 《VEGA》와 함께 해주신 어머님들과 관객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