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ROSA_언더조직을 둘러싼 반응들에 보내는 아쉬운 에세이

2018년 2월 6일 발행

윤리적 악으로서의 권력투쟁? : 언더조직을 둘러싼 반응들에 보내는 아쉬운 에세이

2017년 6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시그니처타워 앞에서 알바노조 관계자들이 맥도날드와의 단체교섭 상견례에 앞서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언더조직-노동당/청년좌파/알바노조에 유비하면서 이를 운동사회 내부의 적폐로 규정하는 주장은 전략적으로 채택할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규정적이지 못한 만큼 좌파 고유의 의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애초에 좌파들이 최순실 게이트에서 문제시한 것은 그녀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되지 않은 비선실세라는 사실이 아니라 보수 우파 정부의 집권에 따른 전방위한 실정과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스스로를 좌파라 규정하고 그 속에서 사고하며 행위하는 이들 중 삼권분립이라는 공화주의의 이념이 침해되었다는 사실이나 정경유착의 편재 자체에서 분노를 느낀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언더조직에 가해지는 특정한 종류의 독해가 좌파 고유의 문제설정과 썩 관계가 없었다고 해서 그들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언더조직의 혼전순결 서약과 연애 통제와 관련해서는 시대에 뒤쳐진 성보수주의와 과도한 금욕주의를 읽어 낼 수 있고(해당 서약이 여성 조직원들에게만 적용되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자폐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몰상식까지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조직 내부에서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을 방치하고 조직 내부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 놓지 않은 사안에서는 사사화된 운동의 한계가 드러난다. 많은 이들의 증언대로라면 그들이 선배 활동가들의 발언권과 그 위상을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했던 것은 이들이 나이주의와 연고주의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반증하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미적으로도 썩 훌륭하진 않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혹은 조직 공학적 측면에서 비판받을 수 있고, 비판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의 사태는 오래된 습관을 지속하기엔 개인들의 의식이 많이 달라졌고, 운동 자체도 여러 측면에서 다변화되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이는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변혁운동이 염두에 두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소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조직 내 의견 수렴의 절차와 운영 방식에 관한 쟁점이 활성화된다면 그것만큼 반길 일도 없을 것이다.

허나 동시에 상기한 이유로 비합법, 비공개 조직(과 그 속에서의 보수적이고 비민주적이며 패권적인 인습)이라는 좌파 내부의 오래된 장치가 지금 딱 씹기 좋은 껌이 된 것은 명백해 보인다. 우리가 탈정치화, 개별화(혹은 취향화)의 경향이 우세해지며 모든 이념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감안할 때, 많은 이들에게 이들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편집증환자에 가까워 보이리라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문제를 몇몇 분파들의 기행적인 일탈로 규정하는 것은 절반만 옳은 말이다. 이는 범 좌파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여기엔 일말의 조직성과 불투명성, 타율성에 대해서도 면역학적으로 거부하는 경향 또한 전제되어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외려 어떤 측면에서 언더조직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일종의 시대적 징후로서 읽자면, 현재 언더조직의 존재 자체에 대한 조롱과 성토는 생산적인 비판의 수준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패권주의와 종파주의적 공작을 통해 조직 내 여론, 경선 등에 관한 집단적인 개입(인위적인 동원)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연장에서 왕왕 나오는 반응은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레닌의 전위당 모델은 훨씬 열려있는 토론을 보장했으며,’ 지도부와의 의견 차이가 있을 때는 당내 비판 내지 신문 등을 통한 공개적인 비판이 가능했기에, 이들은 차라리 총학-학교중앙위-대의원대회-한총련 중앙으로 이어지는 공식 기구들 최상위에 존재했던 한총련 비선조직과 유사하거나, 나아가 스탈린주의와 같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말하자면 이것은 때론 조직적인 여론조작과 사실과 어긋나는 주장을 일삼고, 결코 소수의견을 충분히 접수시키지 않았으며,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적색테러를 주장하고, 반대자들을 공론장에서 퇴출시키고, 크론슈타트 해병들을 진압하는 등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아포리아를 살피거나, 한총련 이외에 수없이 많은 ‘좌파’ 조직들에도 만학도나 대학원생 등으로 이루어진 비선라인이 있었지만 그 규모에 의해 과소 표상되었다는 점을 복기하거나, 쉴라 피츠패트릭의 연구가 보여줬듯 어떤 측면에서 아래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없지 않았던 스탈린주의의 복합성을 고려하면 하기 어려운 주장이며, 무엇보다 그렇게 얼버무리는 것은 애초에 근본적인 수준에서 마르크스에게 정치에 관한 독자적인 규정이 없듯 좌파들에게 민주주의 자체에 관한 강조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항변에 머무른다.

물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단면으로서 국가의 지양을 제안했고, 레닌 역시 제 운동영역에서의 민주주의적 투쟁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경향을 예고한 그람시 등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적 공간을 마련했고, 풀란차스는 이를 심화시켰으며, 신좌파들에게 민주주의는 놓칠 수 없는 쟁점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최소한 경제 내지 계급적 문제설정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를 규정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그 사상적 계보로 미루어보아 정치체와 관련된 쟁점이 ‘좌파’를 정의하는 기본 단위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여전히 여느 대학이든 공공연하게 운동권 후보를 밀어주는 이런저런 학생 서클 내부의 담합이 존재하며, 이들의 행동은 보통의 학생들에게 폐쇄적이며 음험한 조직적 공작이자 불투명한 선거개입, 반민주적 폭거로 독해될 것이다(이대 시위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운동권’을 무리에서 퇴출시킨 것이 이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 변혁운동의 맥락에 익숙한 좌파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까닭인즉 이들은 순진한 조합주의자들이나 낭만적인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권력투쟁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권력투쟁은 담합과 제휴, 동원과 선동, 조작과 공작의 기예다. 권력투쟁에 오염되지 않은 채 청정지역에서 노니는 좌파들은 내가 알기로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기만적이거나 순진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사태 당시 유시민 등의 참여계가 (결과적으로 참여계의 조직적 소극이었음이 드러났으나) 당권파의 조직적 부정경선의 의혹을 제기하고, 심상정 등 정의당 온건 PD계열이 헌법 내 진보를 논하고, 노동당이 신문광고를 내어 종북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NL들이 악에 받쳐 그들을 비난했을 때, 그들이 서로의 성향과 노선을 문제 삼으며 무성한 말을 쌓아 올릴 때, 사건의 당사자들은 실은 그것이 권력투쟁의 과정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헌데 많은 이들이 광의의 (비합법적)민중운동 내지 변혁운동의 퇴조를 보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동시에 이른바 ‘언더조직’으로부터 개인의 자율성과 숙의 과정에서의 민주적 투명성을 해치는- 규율, 불투명성, 조직적 동원만을 읽어 낸다면 이는 이율배반적일 것이다.

한편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 지운 서사 속에서 그들에게 ‘힘내요’와 ‘슬퍼요’를 누르며 윤리적 공감과 연민을 보내고, ‘가해자’로 호명되는 이들을 향해 분노한다. 연이은 내부 고발은 당연히 폭로자들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른바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조직 내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속내를 내비치는 시점에서, 그 언더조직 구성원들의 부족한 윤리의식 이외에 무엇이 ‘가해’와 ‘피해’의 인과를 만들어 내는지 잘 아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들을 손쉽게 피해자로 만들기에 운동조직에서의 활동은 그 첫 제안에서부터 내부의 여러 사업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자발성을 허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들 중 그 첫 제의 단계에서부터 언더조직의 존재 자체에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폭로자들의 상당수는 운동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에 조직이 너무 폐쇄적이고 단단했음을 언급하며 자신이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여 조직문화에 적극 동조했음을 뒤늦게 반성한다. 이는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스탈린 체제 속에서 적극적으로 체제의 관습과 규칙, 코드를 재구성하며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고 그에 맞는 인간상이 되기 위해 노력한 인간들의 개인적 기록들을 연구한- 포스트 수정주의로 알려져 있는 작업물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설적인 지점과 관련된 것이다. 즉 그들은 서술된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조직의 대의를 승인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비공식 지하 조직으로부터 나름의 합리성과 매력을 발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조직문화와 작동방식을 재고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질문되어야 할 지점은 여기에 있지 않나.

이렇듯 사정이 생각보다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언더조직 자체의 폐쇄성과 구시대성을 성토하는 것이 현재 운동의 패인을 철저히 반성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게 그것은 운동이 처한 위기 자체를 축소하는 불성실한 인식으로 여겨지기에 여러모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