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원_아주 조금 있는 문학

강보원(문학평론) 1. 데리다는 한 텍스트에서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1)고 쓴다. 데리다가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썼는지와는 별개로, 이 말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문장에서 그가 문학의 정의를 양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 특히 가시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할 때 생기는 이점은 그것을 실제로 눈에 보이고 공간을 »

크리스토프 타르코스 인터뷰: 두 태어난

번역: 홍승택 버트란드 버디에가 크리스토프 타르코스를 인터뷰하다. 1996년 11월 3일-파리 13구 버트란드 버디에(이하 버디에): 당신의 최근 글, 행동시학에 있는 하나, 니오크에 있는 다른 하나, 두 개의 글은 당신의 발전을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그래』의 독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그래』를 시작하는 “바깥의 시” 안에 있는 “말반죽의 이론”에 관해서요. 크리스토프 »

조재연_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김학량: 벽화

조재연(미학) 1 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

박동수_‘퀴어한 신체’의 불완전한 계보┃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박동수 지난 5월 8일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가 열렸다. 전시에는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정은영 작가의 작품이 선보였다. 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이었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여성국극(女性國劇) »

마이너리그 리포트 : 작가 희키를 만나다

인터뷰를 기념해 희키 작가에게 짤막한 축전을 부탁했다. 그림의 제목은 <숲속 친구들과 참치>이다. 그렇다면 ‘숲속친구들’이란 무엇인가. 희키 작가의 단편에 나오는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본래 정확한 명칭이 없었지만, 작품이 주는 교훈을 따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군중’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물론 이는 필명인 ‘숲속의 참치’와는 무관하다. 다만 ‘숲속’이라는 키워드는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염두에 »

김지율_토마스 루프 작가론: 암실을 벗어나 웹(Web)으로, 사진 너머의 사진을 향하여

글: 김지율 이미지와 사운드가 있다. 이것은 픽셀과 주파수로 구성되며, 다시 한 번 0과 1로 분해된다. 형태를 해체하여 들어간 가장 안쪽에서 우리는 0과 1이라는 단순한 부호를 마주한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작은 부호들을 추적함으로써 큰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토마스 루프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의 다층적 구조를 파악한다. 현재 뒤셀도르프에 »

김선호_카연갤에 올라오는 자전적인 만화에 대한 고찰

김선호(만화평론가)  1. 작가 지망생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아마도 입봉이다. 대학원생에게 졸업논문이 연구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뜻하듯이, 작가에게 입봉작이란 앞으로의 자신을 어느 정도 예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입봉작은 신중하게,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게 옳다. 하지만 당장 살아가는 게 고달픈데 어찌 먹이를 가릴 수 있을까. 많은 작가들이 그런 고민에 빠진다. 소위 말하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

윤태균_새로운 비평형식을 위한 몇 가지 서술

윤태균 1. 혹자가 비평의 위기를 말할 때 나는 비평의 해체를 제안한다. 2. 비평의 위기라는, 다소 긴박해 보이는 이 상황은 지난 수년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것은 비평만의 위기라기 보다는 비평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조건의 위기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진부해진 이 위기라는 상황에는, 당연하게도 미술계 내부의 제도적인 측면, 미술 경험방식의 변화, 대중의 비평 수용 »

정민재_영화적 충돌에 관하여: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영원과 자동수기인형

정민재 ▽▽영화적 체험에 관해서—그것이 지면에 올라가는 한 편의 글이든, 아니면 신문에 올라가는 짧은 글이든, 그것도 아니면 한 권 분량의 책이든 상관없이—글로 서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영화적 체험 그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영화 속에서 체험했는지를 서술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즉, 영화적 »

안진국_서양미술사를 관통하는 새로운 시선 :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안진국(미술비평가) 먼지 쌓인 문서를 다시 펼쳐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존중이며, 현재에 대한 반성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는 것은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미술사 연구소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원고가 놓여 있다. 1905년 세상을 떠난 학자가 남긴 미완의 원고다. 집필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은 »

엄제현_회화를 둘러싼 질문들

엄제현 본고는 집단오찬에서 황재민이 제기한 회화에 대한 논의의 끌개이다. 그가 진지하게 펼친 회화에 대한 질문은 동시대의 중요한 사유 중 하나다. 《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라는 다소 긴 이름의 전시는 (거진)파산한 회화에 대한 현재적 지위를 물으며 작금의 시공간 내부에서 회화가 어떤 »

엄제현_가치라는 환상

엄제현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극단적인 평가절하는 때때로 정치에 관한 냉소를 가볍게 넘어서는 듯하다. 왜일까? 언뜻 보기엔 아직도 ‘미’라는 개념이 직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미몽적인 사유 체계에 기인하는 듯도 하고, 소정의 작품들이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형성하는 데 대한 아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작품이 부자들의 탈세에 악용되고 있다는 (제네바를 시초로 생긴 프리포드나 »

박미란_공회전: 맴도는 도상들

박미란(전시기획자) 스산한 풍경이 펼쳐진다. 공간이 인물을 잠식한다. 인체의 형상은 사물과 뒤엉키거나 배경 속에 흩어진다. 낮은 채도로 조밀하게 묘사한 화면 위, 상징적 도상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현실의 풍경을 분해한 조각이다. 이동혁은 장면을 재구성하며 사유를 정제해 나간다. 관념이 형상화한다.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믿음에 대한 의구심이다. 종교적 맹신, 집단의 관습에 관한 이야기다. 새로운 관점을 »

박규남_비장소의 상상속에서 유희하기 – 청주 퀴어 에세이

박규남 ‘비장소’라는 말은 서로 구분되지만 보완적인 두 가지 실재를 가리킨다. 어떤 목적(교통, 통과, 상거래, 여가)과의 관련 속에서 구성된 공간, 그리고 개인이 이 공간들과 맺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층위의 관계가 어쨋거나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겹치지만(개인은 여행하고 구매하고 휴식한다), 그렇게까지 혼동될 정도는 아니다. 비장소들은 자기와 타자에 대한 관계의 총체를 매개하는데, 그 »

윤태균_디지털 나르코시스-미디어 묵시록

윤태균 1. 이것은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에 대한 재독해로 시작된다. 그는 「미디어의 이해」(1964)를 통해 전기 매체 시대의 감각을 탐험으로서, 또 계시로서 제시한다. 이제는 일반명제와 같이 여겨지듯이, 미디어는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이 아니다. 미디어의 형식은 곧 내용이다. 매체 자체의 특성, 매개성에서 그 의미가 도출되는 것이다. 즉 “미디어는 메세지다”[1]. 미디어는 인간이 세계를 수용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