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_Kob. (찌질의 즐거운 기록)

나는 그 애의 젠틀함이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 그 모든 것이 특별하다 느끼진 않았지만, 동시에 이 정도 담백한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따뜻함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늘어진 모습으로 함께한 아침과 진한 커피, 고등학생 때의 만우절 해프닝 등, 그 모든 소소한 것들이 그 애와의 섹스를 더 즐겁게 만들었다. »

박시내_예술의 ‘힘’에 대하여 – 모리 미술관의 ‘Catastrophe and the Power of Art’ 감상 후 든 사념들

팔레스타인에 피카소의 그림을 걸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2011년, 피카소의 Buste de Femme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수도, 라말라의 International Academy of Art-Palestine 에 전시되었다. 작품 하나를 걸기 위해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보험이었다. 7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걸작을, 끊임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전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어떻게 운반할 것이며, »

임지훈_‘Tracers’, 헛것을 더듬으면서 우리가 나눈 대화들

헛것처럼 흰 선들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읊조린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가 우리의 주변을 배회한다. 캄캄한 밤의 숲에서처럼, 어떤 것도 우리에게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몸짓, 선과 말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휘발하는 것을. 비고 작가의 공연 <Tracers>의 형식을 ‘말’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검은 방에 »

이민주_정오(正午)의 그림자와 우상의 자리: Veni, Vidi, Vici 전시 비평

이민주 전시는 우상의 역사가 곧 이미지의 역사라는 서사를 세운다. 우상Idol의 어원이 희랍어 Eidolon, 즉 이미지Image에서 유래했다는 점, 이미지와 우상의 관계가 ‘신의 말씀’인 언어에 대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그 근거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동시대 인터넷 환경과 디지털 이미지의 조건 위에서 우상의 자리를 질문한다. 이에 대한 잠정적인 진단은 “우상이 더 이상 호출되지 »

허호정_여성적, 말하기? : ‘우먼 핵Women Hack’에 붙이는 글

  2019년 1월 13일 발행 ​허호정 “타인만이 말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말이 아니라 차라리 말을 하라는 간청. 말과 함께 거부될 수도 있고, 제대로 들리지 않을 수 있거나 받아들여지지도 못할 수 있는 간청.”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1) 0. 알림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2017년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에 이어 2018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11월 »

조재연_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 2_손배영: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

2019년 1월 4일 발행 1 사랑한 이도 사랑받은 이도 결국 파멸로 끝을 맺는, 구원이라고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니체는 완전하게 구원된 무언가를 찾아내 소리 낸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인물들이 파멸했기에 오히려 구원될 수 있었던 혹은 파멸로부터 달성된 자연적 사랑이다.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

홍태림_‘고전에 기대는 시간’ 서평: 아름다운 삶의 재발견과 그 무게

2018년 12월 29일 발행   홍태림(미술비평가, 크리틱-칼 발행인) ​내가 스스로를 미술비평가라고 인지하며 글을 쓰게 된 것은 고작 몇 해 전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미술에 대한 글을 나름대로 쓰기 시작한 때가 대학원을 막 졸업했던 2014년 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미술에 대한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는 학부 과정에서 동양화와 »

조태위_아트선재 퍼포먼스: 오민

2018년 12월 16일 발행 ​네가 빈정댔던 것과 달리 “인싸력”을 과시하는 공연이 아니었어. 조세프 풍상은 영문 교열 담당자의 이름이었어. 유명 작가의 이름을 잔뜩 나열해놓은 포스터에 비해 별 볼 일 없었다던 5월의 전시와는 전혀 결이 다른 형식 놀이였다니까. 제목 속에 있는 이름 중에 우리가 아는 이름이 몇이나 있었니? 그리고 네가 북서울미술관에서 집중을 »

엄제현_질환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시각적 안내문

2018년 12월 2일 발행 ​2006년 출간된 정치 서적⟪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객관성과 전문성의 결손을 이유로 학계로부터 처형을 당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세력의 투쟁사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좌파의 맹공은 해당 서적을 역사적 징후로 읽는 메타적 접근에서부터 통계 데이터의 오류를 짚어내는 수리적 분석, 역사 인식에 대한 이념적 반박까지 총체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

홍태림_한석경이 열어젖힌 분단의 시간

2018년 11월 16 발행 홍태림(미술비평가, 크리틱-칼 발행인) ​식민지, 전쟁, 분단을 관통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는 한석경의 <진지하다>(2018)는 박 씨 할아버지, 박 씨의 외아들 박만수 그리고 박만수의 외아들 박형민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뒤얽히며 만들어내는 서사를 중심축으로 삼는다. <진지하다>의 이러한 서사구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배경으로 조씨(趙氏) 집안의 삼대가 겪는 갈등을 통해서 억압받는 여성, 대지주, 기독교인, »

성상민_뉴스, 리플리에게,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2018년 11월 7일 발행 성상민(만화-문화평론가, 미디액트 ACT! 편집위원) 올 연말에 쓸 글이 있어서 원래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갔었다. 좋은 작품이 없진 않았다. 안건형과 리슨투더시티는 여전히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선보였다. 근래의 트렌드인 아카이브, 빅데이터 포집, AI를 활용한 작업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이를 모아 큐레이션한 방식은 많은 골치를 만들었다. 나중에 별도의 글에서 »

오정은_쪼랩의 자각 ‘2018 SeMA 예술가 길드 만랩 萬Lab’

2018년 11월 4일 발행 만렙: 하나의 게임에서 캐릭터의 최고의 레벨을 뜻하는 말. 유의어로 만랩, 최대레벨이 있으며 반의어로는 쪼렙이 있다. 올해로 4회차를 맞는 서울시립미술관 SeMA 예술가 길드의 부제는 ‘만랩’이다. 가득 차다라는 뜻의 만(滿)과 레벨(Level)의 합성어로, 온라인 게임 캐릭터 레벨이 최고점에 도달하는 상황을 이르는 게임 용어 ‘만렙(滿Level)’에서 착안하여 ≪2018 SeMA 예술가 길드≫주제와 »

홍태림_화가 최민화의 민족, 민중, 민주주의

2018년 10월 23일 발행 홍태림(미술비평, 크리틱-칼 발행인) 1980년 5월, 전두환의 계엄군이 민주화를 외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은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최민화1)도 이 충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 7월에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서울 현대미술제2)에서 <시민>을 »

황재민_BLACK: 검은색을 통해서 어렴풋이

2018년 10월 9일 발행 황재민 1819년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는 ‘귀머거리의 집 Villa of the Deaf Man’이라 불리던 작은 주택을 구매한다. 고야는 1824년 프랑스 보르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 집에 거주하면서 14점에 이르는 벽화를 그렸는데, 유명한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Saturn Devouring His Son>와 <개 The Dog>와 같은 작품이 바로 »

허호정_광주,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

2018년 10월 1일 발행 허호정(이미지 연구 공동체 반짝) 《상상된 경계들》은 뿔뿔이 흩어진 전시들을 느슨하게 묶는다. 큰 제목 아래 각 전시는 ‘경계’라는 어휘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와 입장을 선보였다. 이를테면, 일종의 위기 국면을 맞은 인류/애, 사회-역사적 트라우마에 반응하는/반응하지 못하는 결과물로서 증상들과 그 수집, 이 모든 위기에 대한 안일한 대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