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정_서평: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

강미정 21세기에 접어든 후 서구 철학계 일각에서 ‘비인간 전회’(the nonhuman turn)의 물결이 형성되었다. 비인간이라는 화두는, 인간너머의 존재에 관한 포스트휴머니즘 및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유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질시대를 인류세라고 명명한 생태학적 위기감과 더불어 부상했다. 현재 진행 중인 비인간주의로 향한 흐름 가운데는 ‘사변적 실재론’ 또는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을 표방하며 철학의 물줄기를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바꿔 »

서운_어둠 속의 대화 관람기 : 당신의 감각에 질문을 던지는 하루

서운 비가 끝도 없이 내리는 하루를 50일 동안 당연하게 살았다. 비가 오는 풍경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며 흘려보냈는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자 빗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빗물이 창을 통과해 내 얼굴에 뿌려졌으며 비릿한 냄새를 동반했다. 비는 눈을 지나쳐 느낌으로 왔으며 귀와 코에 스며들어 몸의 감각을 자극했다. 바이러스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거나 혹은 우리와 함께 »

윤태균: 포스트모더니즘의 잔해들┃조형성과 텍스트

윤태균 1. 조형성(formativeness)과 텍스트(text)는 발생론적 측면에서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다. 2. 조형성과 텍스트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거의 미학적 도식들 중 단계적 논의를 위해 살펴볼 만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질료(matter)와 형상(form) 개념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실체(substance)는 책상이라는 개념적 형태, 즉 형상과 나무라는 질료로 구성된다. 이때 형상은 유비적 본질로서 질료가 최종적으로 환원되고자 하는 지점이다. 환원의 »

조재연_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유태영: 그날, 문을 열다

1 몇 번이나 몽상을 했다.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 훼방을 놓았던 그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이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저쪽을 선택했더라면. 그리고 그 시점에서 물러났더라면. ‘만약’의 층위는 나를 꼴사납도록 만드는 »

정강산_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1) 정강산 *직접인용문 내부의 ‘[]’는 모두 인용자의 주이다. 1. 퀑탱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그가 “선조성”이라 부르는 것, 즉 칸트적 상관주의2)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거나 상관주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유 발생 이전의 과학적 사실로서의 실재를 사유할 필요를 역설하며, 칸트의 이성비판으로 열린 공간을 »

오정은_미술비평,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ㅠㅠ

오정은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좌석에 앉아 ‘미술비평’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예술인이 된 이후, 비평은 이제 생계를 위한 거의 절대적인 도구가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미술비평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는 없지만, 글을 씀으로 인해서 이따금 돈을 벌고 드물지만 가끔 문화예술계에 소개되고 »

윤태균: 우리는 디지털 양의 꿈을 꾸는가? : 펜데믹과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웹 전시

윤태균 (예술학) 1. 지금은 ‘코로나-이후’인가? 이전의 모더니즘은 스스로의 가치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에 두었다. 모더니즘의 지향성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 아닌 미래와 예술에 있었다. 미래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보이듯, 미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쫓아야 할 종착지였던 것이다.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와의 연계점을 찾는 모더니즘의 시도들은 자신의 시간을 곧 서술될 역사의 한 부분에 배치하고자 했다. »

조재연_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1 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

엄제현_거식증을 앓는 세계

엄제현 먹방의 범람은 어떤 사회적 징후일까? 단지 구강기적 시기로의 퇴행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퇴행은 결과적인 표현태이지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이라 볼 수 없으니까. 먹는다는 행위는 개체의 생식을 넘어선 범주로, 청소년기에 흔히 있는 단식투쟁이 이를 뒷받침할 예랄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단식을 통한 부모에 대한 반항은 그들을 직접 겨냥하지 »

서운_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 관람기: 불투명한 소음을 통해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서운 예측 가능한 사실이 다가오고 있다. 예측이 실현되는 순간 예측은 사라지고 현실로 다가오는 공포가 있다. 그것이 어떤 절망의 한 조각일 수 있고 어둠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는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다. 특히, 그것이 보이는 현실 공간에서는 고통이 희석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노동의 신성함을 주장하지만 숨어 있는 노동자의 »

박동수_영화와 게임의 스침: 영화적 체험과 게임적 체험의 교환 가능성

박동수   2019년 최고의 영화를 묻는 『인디와이어』의 설문에서 루카 구아다니노는 코지마 히데오의 콘솔게임 [데스 스트랜딩]을 꼽았다. 같은 설문에서 봉준호가 데이빗 핀처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인드헌터> 시즌2를 꼽은 것처럼, 게임이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와 게임(여기서 게임은 PC 및 콘솔게임으로 한정한다)의 관계는 점점 영화와 »

김선호_페드로 코스타를 보며 유아사마사아키를 떠올리다

김선호(만화평론가) 유아사마사아키의<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영화는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이었다. 그 이후에는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가 떠올랐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이것들은 본능적이고 시원적(始原的)이라는 점에서 정합하는 부분이 있다. 먼저 포르투갈의 명장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가 알다시피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의 도입부에 ‘솟구치는 용암’을 정말로 보여주었다는 실수*를 저질렀다.(*마노엘드올리베이라.) 물론 »

강보원_아주 조금 있는 문학

강보원(문학평론) 1. 데리다는 한 텍스트에서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1)고 쓴다. 데리다가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썼는지와는 별개로, 이 말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문장에서 그가 문학의 정의를 양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 특히 가시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할 때 생기는 이점은 그것을 실제로 눈에 보이고 공간을 »

크리스토프 타르코스 인터뷰: 두 태어난

번역: 홍승택 버트란드 버디에가 크리스토프 타르코스를 인터뷰하다. 1996년 11월 3일-파리 13구 버트란드 버디에(이하 버디에): 당신의 최근 글, 행동시학에 있는 하나, 니오크에 있는 다른 하나, 두 개의 글은 당신의 발전을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그래』의 독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그래』를 시작하는 “바깥의 시” 안에 있는 “말반죽의 이론”에 관해서요. 크리스토프 »

조재연_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김학량: 벽화

조재연(미학) 1 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