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정_전시-경험의 시세: 낙차를 견주기 그리고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2018년 6월 25일 발행

전시는 경험을 시간적인 것으로 포박한다. 전시는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무언가를 – 이미지를, 소리를, 몸짓을 – 풀어놓는 (혹은 묶어 놓는) 형식 일체인 한편, 특정 기간의 문제를 가시화한다. 달리 말해, 전시-경험은 보거나 듣고 느끼는 일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우선, 물리적 시간의 제약 속에 들어앉아야 하는 일인 것이다. 결국, 일주일, 이 주일, 혹은 한 달에서 두 달 안에 해당 공간을 방문하지 못하면 전시-경험은 불가능하다.

이런 제약은 당연히 시간을 분절적으로 대상화하고 삼켜버리는 상품 가치와 친연성을 갖는다. 어떤 경우에 상품은 시간 자체를 수요-공급의 단순한 논리 속에 가지고 놀곤 하는데, 기간 한정 바겐세일이나 리미티드 에디션은 아주 흔한 예이다.

그런 한편, 특정한 전시 기간 동안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작업들이 등장하는 다수의 전시의 경우에는 상황이 악화된다. 작품이 드물게 ‘전시 된다’는 정황은, 흔히 상품과 다를 바 없다 여겨지는 ‘미술품’의 (실제 그것이 화폐로 전환될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희소가치를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고두고 회자되지만 역시 특정한 전시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다 여겨지는 측면에서나, 한 번 선보이고 언급된 이후 (작가 개인 홈페이지 정도 외에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 상이한 의미에서의 – 측면에서 희귀한 경우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시-경험은 사치품의 소유 문제와는 달리 시간적 제약 그 자체를 각축하게 만드는 다수 사이에서 스스로 시세를 떨어트리고 만다.

대체 이것이 왜 그렇게 문제적인가 하면, 바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 경험의 시세에 관한 질문을 회의적으로 되풀이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당 기획은 특정한 큐레토리얼에 의해 마련된 ‘전시’를 단 하루만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동시대 무빙이미지가 희소하게 소비되는 문제적 조건을 건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동시대 전시-경험과 그 안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미술품의 노출을 둘러싼 현상을 극적으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질문은 다시 다음과 같다. 결국 단 하루만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경험을 다시 한 번 그 “하락된 시세“에 맞게 소비되도록 한 것은 아닌가? 굳이 암전된 전통적 극장 환경 안에서 무빙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지금 여기서 보지 않으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작품의 희소가치라는 측면을 어떻게든 극화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 열린 전체 아홉 날 중 네 차례, 전시-경험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5월 7일과 10일, 13일, 14일에 세실 극장을 방문했고, 그 동안 2회의 연계 강좌 프로그램과 2회의 기획전에 참석할 수 있었다. 10일 방문한 전시는 조은비가 기획한 <VVM: 비디오 벤딩 머신>으로, ‘벤딩 머신’이라 명명된 태블릿 피씨를 받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요는, 관객이 극장 내의 범주에서 제공된 와이파이와, 접속 아이디를 통해 동영상 스트리밍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전체 영상을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제공된 서비스 페이지에 들어가기 위해 관객은 자기 얼굴을 태블릿 피씨로 찍을 것을 요구 받는데, 얼굴이 입력되고 나면 일종의 유저-프렌들리를 창출하는 느낌으로 추천 영상을 띄워 주는 방식이다. 나는 카메라를 미숙하게 다루다가 그저 암전된 공간의 검은 인상만을 남겼다. 그리고 이미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이 기기에 찍혔으므로, 그것이 나의 얼굴로 인증된 셈이었고 추천된 영상을 받게 되었다. 벤딩 머신의 추천은, 여다함의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

이외에도 이 태블릿 ‘벤딩 머신’의 조작에는 기술적 문제가 연이었다. 이를테면, 와이파이를 통한 스트리밍이다 보니 영상이 끊기거나 음성과 화면의 불일치가 아주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게다가 영상의 끊김과 불일치는 매우 자주 일어나서 사실상 하나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불가능했고, 스트리밍 화면이 유투브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기에 자주 스크롤을 움직여 영상의 부분 부분을 떼 내어 보게 되곤 했다. 상당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전에 보았는데 다시 보고 싶거나, 혹은 미처 보지 못한 영상을 언제고 계속 부여잡고 있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욕망 속에 오래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일종의 조작 방식을 터득하기도 하였다. 화면에 약간 손을 대고 있으면 영상이 잘 끊기지 않는다거나, 한 화면을 보는 중에, 다른 화면을 또 눌러두면 스트리밍 시간을 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의도되지 않은 이 모든 불편이 암전된 극장 공간 및 개별 작업들과 적절히 화해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디오 벤딩머신>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희소한 영상들을 접근이 용이하고 조작도 꽤 친숙한 환경에 재배치하여, 그것의 가치조정과 관객 능동적인 배열 – 말하자면 큐레이션 -을 기대했을 테다. 하지만 좀 더 편안한 카우치에 누워서 이 페이지를 소유하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과연 전시는 이 한정된 시간과 특수한 공간을 유의미한 경험의 세계로 이끌어냈던 것일까?

13일에 방문한 전시는, 권혁규 기획의 <인저리타임>이었다. 이 전시는 극장의 스크리닝 프로그램처럼 타임테이블을 가지고 하나의 스크린에 정확하게 하나의 작품을 투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스크리닝 프로그램은 기획자가 상영 순서를 정한 것이기에, 우리는 여기서 큐레이션의 흔적이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배부된 타임테이블 시트를 가지고 들어간 극장에서 나는, 영화 관람객과 전시 관객의 사이에서 전면의 스크린을 응시하게 되었다. <인저리타임> 전시 관람이 영화 관람과 구별되는 차이라면, 전시 당일 이전에 타임테이블이 공지 되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 채 방문한 전시 공간에서 스크리닝 및 타임테이블의 정황을 짐작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사전에 프로그램의 타임테이블을 보고 어떤 영화(영상)를 볼지 정해서 정확한 시간에 극장에 자리 잡아야 하는 영화-극장-경험과 달리, 이 전시는 공간에 도착한 당일 현장에서 받은 타임테이블과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는 작품을 맞춰보는 일을 필요로 했다.

타임테이블을 관찰한 결과, 권혁규 큐레이터가 제안한 스크리닝은 짧은 주기로 몇몇 작품을 반복하고 있었다. 실시간과 상영 시간을 병기해 두었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작업이 전체 프로그램의 어디에 위치한 것인지 살펴보는 데에는 꽤 시간이 들었다. 곧 이러한 스크리닝은 특정한 상영 순서와 반복을 취하고 있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이들 무빙이미지들 사이의 연결에는 어떤 규칙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일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인저리타임>의 관람, 전시-경험은 상당한 곤혹감을 동반하는 것이다. 극영화가 아닌 이들 무빙이미지의 지루함과, 더불어 전시의 변화된 조건 일반이 신체를 괴롭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인저리타임>의 스크리닝이 제시하는 무빙이미지는 같은 작업이 종종 다른 전시장에서 상영되곤 할 때 여타 이미지 및 사운드, 공간으로부터 겹치고 방해되는 경험을 야기했던 반면, 좌석에 앉아 한 방향을 볼 수밖에 없는 암전된 극장에서 오롯이 러닝타임을 지켜야 한다는 상황 속에서 다른 경험을 상정하고 있었다. 더하여, 권혁규는 짧은 러닝 타임의 지루한 무빙이미지를 ‘반복’ 하기를 시도함으로써, 블랙박스라는 물리적 조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람 경험을 제안하고 있었다.

<인저리 타임>은 최이다의 작업에서 (오늘 혹은 내일) 자살 할 것이라 말하는 화자의 말과 일상이 반복되는 것, 차재민의 작업에서 어떤 손이 선을 감고 풀고 조이는 일을 지속하는 것, 조익정이 강남 모처의 역 앞에서 고등학생들이 자기 이야기를 랩으로 푸는 일을 담는 것 등을 이상하리만치 집중하게 만든다. 모든 무빙이미지 제작자가, 자기 작업의 결과물의 영사 방식이나 그것의 전시 조건을 미리 예상하지는 않겠으나, 어떤 경우에 무빙이미지는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될 것이라 전제 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관이 아닌 전시장에서 상영될 것이 기대되는 경우에 무빙이미지는, 관객이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을 본다, 혹은 보지 않는다- 를 쉽게 무시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전에 이들의 작업을 이토록 장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집중해서 본 적이 있나? 반복되는 영사 동안에 각 작업이 유발하는 지루함, 내러티브 없이 전면을 감싸고 튀어나오는 이미지, 거친 화면과 소리의 불친절함은 더욱 강조될 따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저리 타임>은 블랙박스, 스크리닝, 전시-경험을 영리하게 활용하며, 반복의 효과를 현실화한다. 이는 과도한 집중을 관객에게 강제하는 한편, 특정한 무빙이미지가 가진 이질적인 요소들을 계속해서 발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획의 가장 바깥 층위에서 전시는, 기획진이 사전에 수집한 영상 작업 풀pool과 6인의 큐레이터가 각각 마련한 하루 동안의 전시라는 두 층위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기획자 이양헌은 아래 두 층위를 딛고,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가 무엇으로 규정되는지, 큐레이팅은 어떻게 활성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실천이 수행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적어도 이 층위에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위 같은 질문을 유효하게 만든 실천적 효과를 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큐레토리얼적 정황 – 어떤 작가가 어떤 기획적 의도 안에 선별되고 어떻게 공간 속에 녹아 났는가 – 에 대한 감상 혹은 비평이 있기 전에, 정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거의 언제나 가치 절하될 수 있는, 하락된 시세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시-경험에 뛰어든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으며 이제는 낙차를 견주기 어려워진 수많은 여흥의 경험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어떤’ 전시를 기대한다. 가령, 선택된 작업들과 그것이 놓인 시-공간의 진의를 곱씹도록 새로운 사유를 마련하는 전시와, 특수한 이미지와의 만남을 언제고 가능하게 하는 전시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때 비평 역시 전시를 종이 위에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비평가 스스로 공간과 시간 속에 들어앉음으로써 이미 가능했던 “경험”을 다루어야 마땅하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한 가지는 정확히 짚었다. 전시-경험의 시세는 (전에 없이) 하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남는 질문. 그럼에도 여기에 뛰어는 자들은 왜? 그들은 또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