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버닝. 이미지와 서사, 언어의 환유를 통한

2018년 7월 9일 발행

본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 대한 비평으로, 영화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독자분들께선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 비평은 다른 비평들로부터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해 작성한 것이다. 어쩌면 청년 세대를 겨냥한 영화가 실상 다른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청년 세대가 이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와 비슷한 답답함을 느낀 관람자들이 본 비평을 경유해 약간의 동의를 해준다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기술하지만 철저한 오판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성장 부재를 다룬다.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의 성장도 불가능해 보이는 청년 세대를 조명한다고 봐야 옳다. 주인공 종수(유아인 역)는 소설 지망생이다. 그러나 어떤 소설을 써야 할 지 모르는 그의 배역은 상상이라는 것을 가다듬기가 불가능해진 청년의 문제를 압축한다. 소설은 가공의 이야기이다. 소설을 쓴다는 일은 상상을 필요로 한다. 상상은 두 가지 시제를 한꺼번에 내포하는데, 먼저 그것은 현재적이다. 작가가 현재 품고 있는 상상을 가공하여 풀어놓는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상상은 근미래적이다. 희망은 미래에 대한 어떤 낙관적 상상으로 주체가 인식 내에서 미래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의 종수가 세대적으로 처한 현재-부재와 미래-부재의 문제는 그가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스스로를 서사화할 잠재성을 도난당한 세대이다. 세계는 그가 안주할 어떤 현재도 마련해놓지 않았고, 타자가 전유하는 세계는 그에게 미래를 용납하지 않는다. 가산 하거Ghassan Hage의 ‘사회적 희망’이란 개념을 떠올려 보자. 미래는 사회가 주조하고 제공해야 하는 환상에 가깝다. 근대사회는 희망이라는 집합적 믿음을 제시하면서 구성원에게 자기실현의 기회를 부여해 왔다. 산업화 시절은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란 각종 프로그램을 설파하며 고된 노동을 견디게 만들었다. 미래를 배분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 마련되어 있어야 인간은 전력으로 쟁취적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사는 특수한 시간, 자신의 영생을 위해 구성원의 미래를 착복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에게 미래를 배당하길 거부한다. 종수에게 미래란 부재하는 판타지이다. 그에겐 미래도, 그가 자리할 현재도 없다.

때문에 그는 이끌려야 한다. 제 스스로의 창조적 능력이 결여되어 어떤 자기 서사를 꾸려내기가 불가한, 어떤 환상으로 자신을 채울 능력이 부재하는 종수에게 해미(전종서 역)가 등장한다. 삶에 있어 일말의 이벤트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종수에게 여자용 시계 당첨의 기회를 선물하는 해미는 당첨 확률처럼 희박하게 서울 도시 어딘가에서 고향 친구의 역할로 등장해 종수와 조우한다. 이런 영화적인 의도적 개입이 없이는 종수의 서사가 발생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청년에 대한 부정의 의미는 가중된다. 그의 주체성 결여는 얼굴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데, 짐멜과 고프만을 통해 완성된 얼굴의 사회학적 의미를 잊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을 텍스트로 간주하고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파괴되고 근대 도시가 형성된 이후 시민은 각자가 각자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인을 갖추기 위해 사회적 얼굴을 만들어낸다. 얼굴이란 것은 타자와 최초로 마주하는 표징으로, 사회적인 것이 생성되는 장소이다. 짐멜의 말대로 그것은 어떤 노동에서도 해방되어 있(었)고, 몸에 대한 반도적인 성격 탓에 독특하며, 각 기관의 미묘한 조합으로 영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사회가 화폐로 인해 매개되었다면, 민낯을 드러내는 행위는 결례나 무지에 가깝다. 심지어는 약점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민낯은 자취를 감추고 적당히 상대방과 어울릴 수 있는 표정들을 꾸준히 연마하는 것이 시민의 사회화 과정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종수의 얼굴은 연습이 되어 있지 않다. 영화 내내 그에게서 공적 표정이라 할 만한 이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종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일관하며 반쯤 벌어진 입은 전개되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물기를 실패한다. 굳게 다문 입이 의지를 표현하는 기호로 읽힐 때 반쯤 벌어진 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의 언어는 어정쩡한 입의 모양만큼이나 확실한 말이 나오는 경우가 없다. 확신에 찬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는 말하기보단 상대적으로 보고 듣게 될 것이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진짜 침이 나오고 그럼 맛있어.

다시 말하지만 종수는 소설 지망생이다. 환상과 실재를 혼합하고 만들어내는 일은 그의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환상을 정초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환상은 타인이 주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해미가 제공한다. 해미는 내래이터 모델로,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기 때문에 관련 직종에서 일하며 춤을 추는 청년이다. 그녀 역시 종수와 같은 세대로써 미래가 제거되어 있지만 그녀에겐 종수와 달리 현재가 있다. 빚이 있는데도 대책 없이 아프리카에 여행을 떠나는 일에서 그녀가 미래보단 현재를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직업에서도 현재성은 두드러진다. 미래의 자기 인물상을 상상 속에서 스케치하며 직업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 내레이터 모델을 한다. 춤을 추는 일은 걷는 일과는 다르다. 걷는 일은 A에서 B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몸을 이용하지만 춤은 그런 선형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것은 동작에 관한 문제이고, 현재적인 장식성을 나타낸다. 종수와 달리 해미가 현재에 천착할 수 있는 것은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환상을 매개로 작동한다. 그녀는 아프리카라는 환상을 좇으면서 다음 시퀀스를 펼친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며 해미는 종수를 원룸으로 데리고 간다. 원룸에서 해미는 창문을 열며 빛에 관해 말한다. 하루에 딱 한 번 남산의 창을 통해 반사된 빛이 원룸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는데 이 우연적인 시간은 시각적인 은유를 작동시킨다. 우선 둘은 거기서 섹스를 한다. 섹스는 오직 현재로만 의미를 채운다. 가장 내밀한 육체의 감각, 발기조직의 충혈, 해면체의 흥분, 짓눌리는 살의 무게, 성감대의 자극. 애무의 생생함, 떨리는 신체, 그 모든 것들이 당장에만 집중하도록 명령한다. 현재로 충만한 해미가 줄 수 있는 시간이다. 주목할 점이라면 섹스 중인 둘의 시선은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해미가 아닌 난반사된 빛을 바라보는 종수의 시선은 항구적으로 엇갈려 있는 시선이다. 빛을 본다는 일은 사실은 수동적인 일인데(우리가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우리의 망막에 맺혀 상을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밝기로 인해 명료한 듯 보이는 빛은 이미 반사되고 굴절되어버린 빛인 만큼 불투명하다. 섹스가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것 같지만 장차 그를 의심스러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처럼. 이후에 어떤 성적인 케미스트리도 추가적으로 형성하지 못한 일회성의 섹스는 둘의 시선만큼이나 비관계로 소급된다. 종수는 사랑을 느끼지만 해미와 연관되지 못한다. 섹스는 지젝 식의 표현대로라면 ‘둘이서 하는 자위행위’가 되고 만다. 이후 해미는 아프리카로 떠나고 종수는 원룸에 들러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해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고양이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종수는 고양이의 존재를 인식한다. 고양이의 똥과 분뇨통, 사료 등의 인접한 물건들을 취합해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이 방식은 영화 전체를 제유하는 형식이 된다. 느슨하게 제공된 정보들이 얼개를 짜 종수의 인식 내에서 하나의 연관성을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병치들. 다른 평론가는 이미지로 서사를 부숴놓았다고 하지만, 그보단 이미지가 서사가 되는 과정에 가깝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지만 예기치 못한 인물과 동행해 공항에 마중 나온 종수와 해후한다. 벤(스티븐 연 역)이라는 인물은 그 등장만큼이나 낯설게 종수를 이질적인 인식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종수에게 벤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막연한 상위계급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세계를 더욱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셋이 함께 막창을 먹은 뒤 벤의 지인은 페라리를 몰고 나타나는데, 여기서 종수가 끌고 온 화물차와 벤의 페라리는 극명한 계급적 대비를 이룬다. 벤은 해미에게 차에 태울 것을 권유하고, 해미를 차에 태운다. 여기서 태운다는 표현을 기억해두자. 종수는 자신의 초라한 계급적인 지위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벤과 붙어볼 만한 어떤 시도도 감히 하는 일 없이 순순히 벤에게 해미를 양보한다. 그에겐 이미 대적 불가능한 사회적 사실이 있는 것이다. 영화는 종수가 분노하는 어떤 장면도 내보내지 않는데, 계급이란 것은 이제 불가피한 짜증조차 유발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화된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연인이 된 벤과 해미는 파주에 잠깐 드라이브를 왔는데, 아버지의 재판 때문에 송아지를 돌보고 탄원서를 돌리러 파주 집에 거주하는 종수에게 들린다. 마당에서 간단히 술을 마신 뒤에 떨을 한다. 해미가 한바탕 춤을 추고 잠을 청해 종수와 둘만 마당에 남았을 때 벤은 자신의 취미를 능청스레 고백한다. 두 달에 한 번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권태를 해소한다는 것. 그리고 이 주변에서 자신이 태우기로 결심한 비닐하우스를 발견했으며 주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이는 종수를 아연하게 만든다. 아득한 능력을 가진듯한 벤이 아무렇지도 않게 종수 주변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원시적인 폭력에 가까운 위협이 된다. 벤은 언제든 종수의 세계를 농락할 수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닐하우스건 해미건. 종수는 세련된 상류사회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방화와 약탈이라는 일을 너무나 손쉽게 기획하고 해내는 야만을 동시에 겸비한 존재이다. 그의 야누스적인 위치는 극에 계속해서 스릴러에 가까운 긴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해미를 쟁취한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하는 종수가 그와 대결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비닐하우스를 태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것이 그에게 가능하다고 할 법한 유일한 저항이었으리라. 그는 다음날부터 차를 타고 비닐하우스를 점검하기 시작한다. 그 근방에 존재하는 비닐하우스란 비닐하우스는 닥치는 대로 수색한다. 지도까지 찾아가며 불에 탄 비닐하우스가 있는지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그의 범행을 추적하는 와중에 그는 꿈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는데, 꿈은 소망충족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해진다. 꿈속의 비닐하우스는 잠재몽이 아닌 현재몽의 층위에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현실에서 종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욕망에 지독하게 함입되어 비닐하우스에 잠깐 불을 붙이기까지 한다. 이때 비닐하우스는 은유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종수의 잠재적인 욕망을 지시하는 메타포이다.

한편, 파주의 밤에서 벌어진 관계의 비틀림은 종수와 벤의 일만이 아니다. 다음날부터 해미와의 연락이 두절된다. 영화는 그것을 떨을 한 뒤 옷을 벗고 춤을 춘 해미에게 종수가 그런 짓은 창녀나 하는 것이라며 비난했기 때문으로 여겨지게 만드는데, 종수가 사과하려 아무리 연락을 하고 메시지를 남겨도 해미는 답신이 없다. 답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가 휘발되었다. 원룸을 찾아가 봐도 오간데 없고, 그녀의 언니와 어머니는 빚도 갚지 않고 사라졌다며 투덜거린다. 이때 우물이라는 맥거핀이 문제적으로 부상하는데, 해미가 종수로부터 구원받은 우물의 존재를 모녀가 부인한다. 해미의 말이 의심스러워진다. 해미의 옛 집터를 찾아가 보아도 우물이 있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근처의 노인에게 물어도 우물의 기억은 없다고 한다. 종수에게도 우물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이후 난데없이 등장한 종수의 친모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어느 하나의 사실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이미 사실은 윤색된 기억의 불투명한 지점에서 복잡한 미로가 되어 명확한 출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우물은 종수에게 있어 해미와 같은 존재의 무게를 갖는 듯 보인다. 한때 존재했으면서도(했던 것 같으면서도?) 타인에 의해 부정된다. 실종된 해미는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물 역시 존재했는지 부재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물도 고양이도 해미도 무엇 하나 자명한 것이 없다.

부재하는 것들을 더 좇을 방법이 없을 때 종수는 벤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벤은 금세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해미가 연상되는 언행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듯한 여인. 해미는 벤에게 너무나도 싱거운 서사였던 것처럼 보인다. 두 달에 한 번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처럼 짧은 간격에 교체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벤은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종수를 초대하는데, 거기서 고양이를 발견한다. 이전에 없던 고양이가 종수의 관심을 끈다. 홀린 듯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수납장을 열자 영화 초반에 해미에게 주었던 당첨된 시계가 들어 있다. 벤의 새 여자가 방문하면서 부주의하게 문을 연건지 고양이가 도망간다. 종수 또한 앞서 나간 벤과 여자를 좇아 지하에 내려간다. 고양이를 발견한 종수는 고양아, 00아, 불러보다가 “보일아.”하고 고양이를 불러본다.(작중 해미가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이다.) 고양이는 반사적으로 종수의 품으로 뛰어든다. 사건들이 인과망을 형성한다. 하나의 가정을 인식 내에서 진실처럼 딱딱히 굳히기에 이른다. 해미의 원룸에서 고양이 똥, 분뇨통, 사료가 고양이의 부재를 존재로 뒤집었듯이, 시계, 보일이, 해미의 실종이 종수의 인식 내에서 모종의 의심을 만들어낸다. 종수는 아마 벤이 해미를 죽였다 생각했을 것이다. 두 달에 한 번 태운다는 비닐하우스. 종수와 아주 가까웠고 이미 태웠다는 비닐하우스. 그와 같은 타이밍에 실종된 해미. 사라진 보일이, 동시에 벤의 집에서 발견되고 그 이름으로 부르자 달려드는 고양이.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졌어요.”라는 벤의 대사. 장식장에서 발견된 시계. 각기 떨어져 아무런 연관도 갖지 않는 듯 보이는 일들이 연결되어 해미의 부재에 어떤 특정한 원인을 추론하고 확신하게 만든다. 벤이라는 착란적일지도 모르는 원인을.

해미의 실종과 관련된 메타포는 언어를 통해 이미 환유되었다. 페라리에 해미를 ‘태운’ 벤은 해미와 떨을 ‘태웠고’ 이윽고는 비닐하우스가 아닌 해미를 ‘태웠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지 못하도록 종수가 분주하게 돌아다닌 까닭이 밝혀진다. 종수가 꾼 꿈에서 비닐하우스는 해미라는 대상물의 전치이다. 비닐하우스와 해미가 상징적으로 치환되는 대상물이 되었다. 해미는 벤에 의해 가로막혀 은유로만 허용된 잠재몽의 욕망이다. 영화 중간에 종수가 벤의 욕망에 이입해 비닐하우스에 불을 붙였다가 황급히 꺼버렸을 때, 자신의 화물차에 해미를 태우고 싶었던 심리를 슬쩍 드러냈던 게 아닐까. 꿈의 경로가 도덕적 검열을 우회하면서 두 개의 층위로 분할되는 것이라면 근친상간의 죄도 아닌 해미가 비닐하우스로 은유되는 일은 자본주의 질서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윤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생산에 대한 역사적인 관계를 자연적 사실로 오인할 때 그릇된 상징적 질서의 여파는 무의식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선재하는 세계가 주체에게 오인된 인식을 진리로 접종하여 진리가 항상 오인의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전연 허튼 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승자 독식의 구조가 종수의 욕망을 근원적인 영역에서부터 억압하고 좌절시킨다. 이를테면 욕망은 사회적으로 거세당한다. 그것이 청년 종수가 자본의 율법으로부터 받는 처절한 징벌이다. 비닐하우스로 은유된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때 세대적인(정확히는 계급적이지만) 문제가 된다. 계급적 문제가 세대적 문제로 전치되어 영화 중에 나타나는 것은 현실에서 청년 세대의 삶이 기성세대가 전유한 듯 보이는 경제 질서로부터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탈의 왜곡은 실업을 통해 두드러지는데, 실업은 철저하게 경제 문제이지만 세대적 담론화를 거쳐 청년실업이라는 특정 서사로 포획될 때 사회문제 또는 세대문제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계급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미가 비닐하우스로 전치되듯이 계급 문제는 가장되고 전치되어 나타난다. 다시 말한다. 문제는 계급이다!

결말에 다다르면 종수는 아버지의 칼로 벤을 찌르고는 벤을 차에 태우고 차도 태운다. 태운다는 기표의 끊임없는 교차가 일어난다. 기의가 종횡무진 마구 내달리며 미끄러진다. 맥락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로 힘차게 고동치며 이미지를 산출한다. 그리고는 방화물을 뒤로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해미의 부재로 해미를 태울 수 없게 된(차에 태운다는 의미는 성적인 의미 또한 갖는다.) 종수는 그에 대한 복수로 벤을 태운다. 용법적인 전치가 이미지를 통해 분노를 가시화한다. 인격적 살인은 종수에게 있어 대안에 가까웠던 것으로, 부정을 쉽사리 찾기 어렵게 된 오늘날에 존재하는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적대를 감각하면서도(또는 영화처럼 편집증적 추론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면서도) 명쾌한 해결의 수단이 없는 종수가 선택한 극단적인 대안이다. 해미는 빚을 갚기 싫어 떠났을 수도 있다. 벤에게 실연당한 아픔에 잠수를 탔을 수도 있다. 종수에게 배신당한 듯한 충격에 그저 홀홀단신 여행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전체에 거쳐, 우물이나 고양이 등의 맥거핀을 통해 강화되며 사실이나 진실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춘다. 어느 한 면을 분명히 맞추려 해도 어긋나는 큐브퍼즐처럼 이질적인 색이 끼어들어 있다. 이는 복잡해진 오늘날의 세계를 대변한다.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적대가 살아있음에도 논리적인 언술로까지 끌어올려 마주 대하기가 더없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그것의 메커니즘을 분명히 할 수 없을 때 가능한 일이란 인격적인 누군가에게 분노를 일거에 쏟아내는 방식일 것이다. 묻지마 살인처럼. 종수가 사실을 완전히 밝혀내는 것에 실패할 때, 또는 집적된 몇 가지의 증거 아닌 증거로 사실을 성급하게 추리할 때 이제 그의 능력을 벗어난 규명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갈 데 없는 그의 분노를 해소하려는 의지가 불쑥 부상한다. 자위를 통해 해소되지 않은, 남산 타워를 통해 대변되는 그의 남근적 욕망은 극단적인 가학으로 대치된다. ‘태운다’는 기표를 통해 시시각각 표류하면서.

영화 말미엔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 숏이 있는데 종수가 해미의 원룸에서 마침내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종수의 모습이 줌아웃 될 때이다. 이는 감독 본인이 1997년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의 엔딩에 쓴 것과 동일한 마감형식인데, 때문에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났고 이후 벌어진 종수의 살인은 종수가 쓴 소설의 기입이라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결말을 연속적인 서사로 생각하는 일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기표는 계속해서 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수가 쓴 소설 속의 허구로 치부하는 역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종수로 하여금 사건들에 대한 특수한 메타포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들 때 소설은 쓰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초반부 벤의 집에서 메타포가 무엇이냐는 해미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종수의 모습과 대비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계급적 현실에서 태울 만한 것? 기껏해야 담배 나부랭이 아니겠는가. 이창동 감독이 다소 방관적으로 내건 이 숏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를 영화로만 즐기는 일은 역시 순진한 오락에 머물면서 따분한 위로만을 느끼는 게 되지 않겠나. 그것만치 영화를 불량한 뽄새로 보는 일도 없다. 어찌되었건 영화는 결코 자명하게 디스플레이 되는 법이 없는 미완의 이데올로기기 때문에, 즉 당대의 지식이 자신의 당위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영화가 투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이냐는 긴장 넘치는 바깥의 대립이 격화되는 한에서 영화는 사막의 식물 같은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