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로_ 번역 : 자크 데리다의 세 가지 나이 The Three Ages of Jacques Derrida (interview by Kristine Mckenna)

2018년 7월 14일 발행

사람들이 미치광이 프랑스 지식인이자 아는 사람만 아는 슈퍼스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미국의 대중문화잡지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해체주의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할 때,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듯 세계 도처의 대학생들이 해체주의의 뜻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자크 데리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지식인으로서 지배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데리다는 언어를 해체하고 언어에 내장된 그릇된 가정과 선입견들을 폭로하도록 고안된 논쟁적인 분석 체계인 해체주의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오롯이 의식에 끌어오기를 꺼리거나 또한 불가능한 것들이 우리의 언어에 담겨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해체주의는 어떤 텍스트에라도 적용될 수 있는 유연한 방법론이며, 나아가 그것이 문학 비평에 갖는 영향력은, 더 크진 않을지라도, 철학적 담론에 남긴 영향력과 맞먹는다.

1930년 프랑스 식민지하에 있던 알제리의 이탈리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데리다는 그의 나이 열 살 때 지적 편견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다. 알제리가 나치에 협력하는 프랑스 비시 정권에 침략당한 때였다. 그 시절 데리다는 교사로부터 “프랑스 문화는 유대인 꼬마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데리다는 논쟁의 여지 없이 재능있으며 또 불온한 학생으로서 경력을 이어갔고, 19세에 파리로 건너가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다. 고등사범학교는 데리다가 정신분석학자인 마가릿 오쿠트뤼트를 만난 곳이며, 그들은 1957년 결혼한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이 학교에 다니며 데리다는 주로 독일 철학자인 에드문드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작업에 몰두했고, 그들에 관한 저작으로 1956년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로 가게 된다. 1960년 소르본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을 번역하고서 오히려 후설의 에세이를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긴 서문을 달아 출간한 데리다는 2년 뒤에 철학자로서의 독립을 선언한다. 1967년 데리다는 자신을 철학적 담론의 중심에 던져놓은 매우 독창적인 세 권의 책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을 출판하며 자신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들을 선보인다. 22개국 언어로 번역된 45권의 책의 저자인 데리다는 1986년 어바인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임명되었다. UC 어바인에서는 대학의 성공을 기리는 일환으로 1990년 데리다 아카이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데리다와 나는 어바인에 있는 그의 수수한 사무실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작에서 보이는 대담함, 야망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그는 다가가기 어렵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의 생각들은 종이 위에서보다 대화에서 훨씬 덜 위압적으로 들렸다. 데리다는 아주 매력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커비 딕과 에이미 지어링 코프만이 감독하여 이번 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데리다에서는 그의 카리스마가 여실히 드러난다.

Derrida (2002)

L.A. WEEKLY: 영화 데리다의 촬영에 동의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DERRIDA: 즉시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꺼림칙한 느낌이 계속 이어졌는데, 그건 사진에 드러난 나의 이미지에서 제가 항상 느껴오던 불편함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20년 가까이 내가 드러나는 이미지를 제외하고 책을 출판하는 데 성공해왔습니다. 그렇게 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나는 관습적인 저자 사진 -저자의 책상에서 찍은 얼굴 사진-에 관하여, 당신이 ‘이념적인 반대’라고 적을법한 것을 가졌는데, 그런 사진은 내게 마치 언론과 판매에 관한 영업권을 뜻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 저는 항상 저 자신의 몸과 이미지에 관해서 아주 까다로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진에 담긴 자신을 바라보기가 제게는 아주 어려웠고, 그래서 20년 동안 저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의 이미지를 지워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은 그러기가 어려워졌는데, 저널리스트가 참석하는 공적인 공간에서의 회담에 제가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는 통제하기가 불가능해졌고, 그런 거리낌을 넘어서야 할 때라고 저 자신이 느낀 것처럼, 결국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 영화가 매일매일의 사적인 삶과, 그보다 덜 사적인 것들 -예를 들어 촬영 기간에 떠났던 남아프리카 여행이라던가-, 그리고 거대한 주제들에 관한 성찰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엮어냈는지에, 즐거운 마음으로 놀랐습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저자의 전기 biography에 관한 질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꼭 전기를 가져야 할까요?

어떻게 철학자가 전기를 갖지 않을 수 있죠?

물론 그는 자신의 전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제기한 물음은 우리가 그것을 공개해도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전기를 스스로 들려줘야 할까요? 그가 자신의 삶이 공적인 것이 되고, 해석되도록 놔둬야 할까요?

당신은 철학자의 저술과 철학자의 삶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통적인 철학자들 대부분은 그것들을 분리하려 했고 몇몇은 성공했습니다. 당신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읽는다면 그들이 결코 ‘나’라고 말하지 않고 1인칭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주변적인 것이나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었고 그들의 사유였죠. 전기는 경험적이고 외적인 것이며, 철학적 행동이나 체계에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화 속에서 당신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존경하는 철학자들에게 어떤 것에 관해서라도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을 듣고 싶습니까? 당신은 “그들의 성생활.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니까”라고 하셨죠. 하지만 그리고서 인터뷰어가 당신의 성생활을 묻자 당신은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왜 성생활은 접근이 금지된 주제입니까?

그 주제가 감춰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답변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내 삶의 가장 사적인 측면을 카메라 앞에서 즉흥적으로, 또 외국어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주제에 관해 논해야 한다면 저는 제가 가진 도구를 더 세심하게 다루는 편을 택했을 겁니다. 글쓰기 말입니다. 당신이 제 저작들을 읽어본다면 내 방식대로 그런 질문들을 다룬 여러 텍스트를 찾을 겁니다. 조종 [1974], 우편엽서 : 소크라테스부터 프로이드 그리고 그 이후 [1980], 고백 [1991]은 특히 자전적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과 나의 욕망은 내 모든 저작에 새겨져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신을 실감했던 순간을 떠올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 단어가 관습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에서, 당신이 포착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을 실감했던 순간을요.

이 주제를 말하려면 먼저 ‘관습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의’ 신에 관한 정의를 세워야겠군요. 하지만 좋습니다.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 저는 주기적으로 알제리의 시나고그[스페인 유대교의 회당]에 데려가 졌고 거기에 제가 사랑하던 유대교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음악이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저는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무신론의 이름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내 가정에서 종교가 아주 잘못 이해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아주 몰지각하고, 단지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제가 특히나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존경을 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율법을 읽고 실천하며 보이는 그들의 존경은 시나고그에서 경매하듯 주고 받아졌고, 나는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3살이 되어 니체를 처음으로 읽었는데, 비록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제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서 저의 일기장은 니체와 루쏘의 인용으로 가득 차게 되었죠. 당시에 니체와 루쏘는 제게 또 다른 신이었습니다. 니체는 극렬하게 루쏘를 반대합니다만 저는 둘 모두를 사랑했고, 내 안에서 어떻게 둘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이데거는 2차대전 이후에 짧게 행해진 인터뷰에서, 하지만 1976년 사망하기 전까지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만, “니체 이후의 철학은 인류의 미래에 어떠한 도움도 희망도 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신이 재림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신”이라는 어휘는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반-종교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카톨릭 문화에서 성장했지만 격렬하게 기독교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언급하는 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아직까지 도래한 적 없을 뿐 아니라 아마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희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고, 도래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이름을 가지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구원에의 희망을 부추기는 것이라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우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흔쾌히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저는 여기에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라고 기술하는 바의 형식이며, 우리는 천성적으로 메시아주의적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 발생하기를 기대하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희망 따위 없는 상태로 있다 해도, 기대한다는 감각은 우리가 시간과 맺는 관계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입니다. 어떤 선한 것, 사랑하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도착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오직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이데거가 의미한 것이라면, 저는 그에게 동의합니다.

2차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신의 어린 시절이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전쟁이 벌어졌던 시기에 내가 겪은 것들은 분명 어려운 것들이긴 했지만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벌어졌던 일들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알제리에 끔찍한 반-유대주의가 횡행하긴 했습니다만 이 나라에는 독일인도, 집단 수용소도, 유대인의 집단 이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는 갖게 되지요. 당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도 못 한 채로 학교에서 쫓겨난다면, 그 일은 당신에게 흔적을 남길 겁니다.

론 로젠바움은 1998년 저작인 히틀러를 해명하기에서, 히틀러의 궁극적인 희생양은 의미 그 자체였다고 제시합니다. 홀로코스트에서는 일관성을 갖춘 의미가 찾아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요. 당신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여기서는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집단학살 속에서 절대적으로 새로웠던 것은 그것이 희생제의적 구조를 갖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냉혹하고, 이성주의적이고, 산업화된 것이고, 거기에 희생제의적 의미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하겠군요.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는 답할 수 없겠습니다.

철학이 답해야 할, 거기에 철학의 존재 이유가 달린 주된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그리고 어떻게 함께 잘 살 것인지’입니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다뤄졌던 문제인데, 그 시작에서부터 철학과 정치는 깊이 얽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삶을 변화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우리 자신을 상위에 위치시킵니다. 나는 동물(성)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철학에서 다루어 지는 방식에 비판적입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주제겠지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우리는 삶을 조직할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가능한 최선의 삶을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저는 우리가 이 문제의 답에 도달할만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한게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서로 혼합되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은 많은 것을 알면서 아무런 지혜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행동 사이에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연이,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많이 알고자 하는 노력을 가로 막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사랑이고 소피아는 지혜이지요. 그래서 지혜로워야 하는 의무가 바로 철학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행동을 결정하는 일이 전적으로 지식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행동하기 이전에 가능한 많이 알려고 노력하지만, 결정의 순간에 내가 지식에서 비약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1967년 출간한 세 권의 책을 통해, 당신은 자신의 지적인 이해를 보여주었지요. 이 일이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주었나요?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계속 나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주 활동적으로, 전력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20살의 제게, 지금 72살인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을 나중에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에는 육체적으로도 더 허약했으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일부만 주어져도 쓰러지고 말았을 겁니다. 제 작업에 주어진 환대가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와 저의 작업을 관대하게 바라봐 줍니다. 이런 너그러움이 없다면 저는 분명 쓰러지고 말 겁니다.

왜 여성 철학자는 없는 겁니까?

철학적 담론이 여성, 어린이, 동물, 노예들을 주변화하고, 억압하고,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적 담론의 구조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건 멍청한 짓이 될 겁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위대한 여성 철학자는 없었습니다. 위대한 여성 사상가들은 있었지요. 하지만 철학은 사유의 여러 양식들 중에서 아주 특수한 한가지 양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변화하고 있는 역사적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아주 큰 문제입니다만, 어떤 측면에서는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작업 대다수가 남근중심주의 phallocentrism의 해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입으로 직접 말해도 괜찮다면, 저는 이 문제를 철학적 담론의 중심에 가져다 놓은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끝내기를 지지합니다. 특히나 남근중심적인 철학의 기반에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런 관점에서 저는 페미니즘 문화의 한 동맹군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몇 선언들은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단순히 권력의 계층을 반대로 뒤엎거나, 관례적으로 남성적인 행동이라 간주하여온 것들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을 이제는 여성들이 전용하겠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작업에 관해 가장 크게 오해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어떤 것도 의미를 갖지 않으며 텍스트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적인 허무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멍청하고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내 글을 읽지 않은 사람만 이런 소리를 할 겁니다. 이건 내 작업에 관해 35년 전부터 시작된 오해이고, 깨뜨리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언어적이며 우리가 언어에 갇혀 있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실상 저는 그 반대를 이야기해왔고, 로고스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곧 모든 것이 언어라는 바로 그 철학을 분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주의를 갖고 내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긍정과 믿음을 고집하고, 나 자신이 읽어온 텍스트들을 향한 존경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겁니다.

타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다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제거될 수 있을까요?

살인의 충동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동물로서 인간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동물로서 인간은 잔인해질 능력을 갖고 있고, 타인을 고통받게 만드는 일이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지울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살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거할 수 없는 이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철학과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 중 하나입니다. 잔인함과 공격성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글을 쓸 때, 글을 쓴다는 행위에는 공격성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 행위는 공격성을 어떤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애쓰는 것이지요. 공격성은 살인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도 어떤 것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나 그녀의 삶을 끝장내지 않고도 저는 타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열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적일 수 있지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뿌리에 영토와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개념들은 어디에서 유래했고, 우리는 왜 여기에 매달리는 걸까요?

수 세기동안 도시는 상업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중심이었지만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소를 소유하는 정치도 이젠 다릅니다. 그럼에도 장소는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제 친구 중의 한 명이 말하더군요. 오늘날 탈영토화되거나 가상화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예루살렘과 석유라고 말입니다. 누구도 예루살렘을 가상화하길 원하지 않고, 누구나 실제 석유를 소유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석유에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해도, 바뀌는 순간 모든 사회가 무너질 겁니다. 이것이 석유가 문제시되는 이유입니다. 이건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함께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미국에선 더 문제시됩니다. 아주 분명한 이유에서요.

사람들에게 과거는 쉬이 고통이나 기쁨의 원천이 되는 걸까요?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운이 좋게도 과거와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것이 끔찍하다는 것을 저 자신도 알고 있는 삶의 어려웠던 부분의 기억들과도 저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제 삶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겁니다. 정확히 그것이 일어난 그대로요. 영원회귀 말입니다.

요즘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사적이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여러 가지 것들이 제게 중요합니다만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저는 항상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 내가 죽으리라는 것, 삶은 짧다는 것을 같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내게 남은 시간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비록 어릴 적부터 이런 성향이었다고 하지만, 72살이 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겠죠. 지금껏 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서는 결코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네요. 이 의식이 내가 사유하는 모든 것에 스며듭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참 끔찍하고, 그게 제 마음 속에서도 일어납니다만, 그것들은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공포와 함께할 뿐입니다.

당신은 어느 시점에 어른이 되었습니까?

아주 특이하고 재밌는 질문이네요. 저는 모든 사람이 하나 이상의 나이를 지닌다고 항상 믿어 왔습니다. 저 자신은 세 가지 나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20살 때 저는 자신이 늙고 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아이 같다고 느낍니다. 여기에는 멜랑콜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비록 저 자신의 마음이 젊다고 느껴도, 객관적으로 내가 젊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제가 가진 두 번째 나이는 실제 나이인 72입니다. 저는 매일 이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신호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나이는, 그리고 이건 제가 프랑스에서만 느끼는 것인데, 내가 첫 작업물을 출간했던 나이, 35입니다. 이 느낌은, 마치 내가 작업하는 문화적 세계 속에서 서른 다섯에 멈추어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죠. 여러 분야에서 저는, 이것저것 많이 출판한 늙고 명망 있는 교수로 취급 받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 자신을, 이제 막 책을 출간하기 시작한 젊은 저자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하겠죠, “흠, 장래성 있는 놈이군.”

이여로│freely46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