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2)

2018년 8월 11일 발행

이영욱(미술평론가), 박찬경(작가)

3. 거대한 뿌리 -전통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단언은 전통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와는 다른 접근방식을 요청한다. 비숍의 책을 읽는 도중에 시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방인 비숍은 구한말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낯설고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은 그간 전통을 대해왔던 시인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이다. 식민의 상처 때문에 그 수치스러움 때문에 시인은 과거와 전통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느껴 의식의 저편 깊숙한 곳으로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비숍의 글은 시인의 이 같은 시선에 충격을 가한다. 비숍의 시선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시선이지만, 무엇보다도 폐쇄 회로 속에 갇혀 있는 시인의 시선과는 다른 외부의 시선일 뿐 아니라 심지어 좀 더 객관적이고 실상에 가깝다. 시인은 불현듯 자신의 추방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더럽다고 외면한 전통이 더러울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고, 추방해 버린 과거가 추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을 알아챈다.16) 억압, 차단된 기억의 고리가 풀리면서, 시인은 과거가 자신과 철저히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비약!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단언이 발화된다.

시에서 기억은 점점 더 풀어져 회상으로 이어지고 현재의 장면들에 과거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 개울에서…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시인은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저편 어딘가에, 자신의 육체 안에 그리고 현실 안에 살아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곰곰 생각을 거듭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속이 그 과거와 더불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임을 확인한다. 더 나아가 그 전통을 불러내고 수용하고 기억할 때만 스스로 온전해 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외친다. 더 이상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고 오히려 황송”하다고, 그리고 내가 이 기억을 회복하고 연속을 긍정하는 한(=‘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쓴다.

억압된 전통/역사를 ‘기억’해내는 문제17)는 이렇게 볼 때 시인의 깨달음에서 결정적 요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에 떠올려 화해하는 일은 전통/역사/과거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이 같은 ‘기억하기’18)의 문제는 민중미술을 추동했던 강력한 동인 중의 하나였다.19)

[도판3] 민정기, <포옹>, 캔버스에 유채, 145x112cm, 1981

민정기의 그림 <포옹>[도판 3]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이 그림은 능동적인 기억하기의 사례는 아니고 기억이 잠겨있는 상태, 즉 추방된 전통이 마치 유령처럼 출몰하곤 하는 상태를 가시화하고 있다. 이 그림의 모티브는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다. 하지만 이들의 풋풋한(?) 사랑은 매우 괴이쩍은 상황에 둘러싸여있다. 장소는 어디 동해안 바닷가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요약해서 말하면 분단현실과 전통이다. 앞 쪽으로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다.20) 뒤쪽으로는 기괴한 느낌의 정자,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고, 멀리 돛단배가 보인다. 이 정자와 소나무, 돛단배는 아마도 당시의 키치 그림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키치 그림에서 이 같은 소재들은 통상 일종의 이상향을 조성하는 소도구로 활용된다. 반면 이 그림에서 정자는 망측하게 솟은 바위 위에 마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같이 그려져 있고, 소나무는 마을 어귀 성황당 나무와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다. 돛단배는 기이한 시차를 유발하면서 그림 속 공간을 시간적 혼돈으로 이끌고 있다. 한마디로 이 전통소재들은, 시인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 개울에서…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듯 시간의 연속을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여기서 전통은 격세감을 유발하면서 시퍼런 색채의 배경 위로 유령처럼 위치해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전통과 정치현실 모두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더 나아가 주인공들의 포옹장면을 포함하여 그림 전체가 만화적 키치적 필치나 구성을 활용해 그려진 것을 통해 짐작해 보면, 작가는 그 풋풋한 사랑을 또한 키치화의 위험 속으로 삽입시킨다.

[도판4] 오윤, <원귀도> 일부, 캔버스천에 유채, 69x462cm, 1984

이와는 달리 오윤의 <원귀도>는 ‘기억하기’가 적극적으로 수행된 대표적 사례다. 이 그림에서는 6.25 전쟁에 대한 억압되고 차단된 기억이 너무도 자명하게 분출되어 나타난다. 그려진 것들은 학살당한 양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상이군인, 미친 여자, 귀신(중음신), 해골, 군악대, 관악기, 깃발, 벽보, 삐라, 부적, 까마귀 같은 것들이다. 오방색을 활용하여 마치 무대처럼 극적으로 구성된 화면 위로 전쟁으로 부서진 사람들 또는 귀신들, 해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온갖 허망하고 황폐한 전쟁의 에피소드들이 나열된다. 일종의 전쟁 기억의 제단화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은 끝 부분이 완성되지 않은 채 형태의 윤곽을 드로잉한 선들이 남아있고, 캔버스 천은 둘둘 말린 채로 남겨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파노라마 형식을 통해 그러한 기억하기는 중단될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깨달음은 전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이해는 우선 이중 구속에 의해 내면화된 전통 개념들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 개념들은 전통을 끊임없는 경합과 계승과정을 통해 이어져 온 연속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전통과 전근대 과거를 동일시하고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여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거나 혹은 옹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전근대 문화를 궁극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전통을 전근대 문화로부터 필요에 따라 선택해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엇(찬란한 전통/만들어진 전통)으로 취급한다. 이는 전통을 파기가능하거나 제작 가능한 ‘실체’ 혹은 ‘콘텐츠’로 보는 것, 곧 전통을 콘텐츠-전통21)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은 삶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것들이 이후의 것들로 부단히 형질변화하고 변용되는 지속적인 흐름 혹은 연속 그 자체다.22)이 흐름으로서의 전통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유물, 의례, 의식 등 흔히 ‘전통문화’로 범주화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전통은 가시화된 전통 말고도 일상의 감각 체계나 행위 리듬 혹은 인간관계의 규범이나 오랜 기간 형성된 사고방식 같은 수많은 무의식적 삶의 관행으로 이어지는 비가시적인 전통 요소들을 포괄하며, 이들은 표면적인 단절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각기 다른 개인, 사회의 층위들에서 끊임없이 방대한 양으로 수용, 전수, 변환된다. 즉 전통은 장기지속의 성격을 가진다.23) 혹은 전통은 기본적으로 장기지속-전통이다.24)

당연히 어떤 전통은 사라지고, 어떤 전통은 상대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또 다른 수많은 전통 요인들은 변용을 통해 지속한다. 하지만 전통 자체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통을 전근대 문화 일반과 동일시하여 고정시킨 채 그것과 전통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억압과 단절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전통은 근대적 삶과 조우하면서 지속과 변용을 거듭하는 가운데 전통으로 이어져왔으며, 또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근대-전통이 형성되기도 했다.25) 결국 요체는 바로 이 같은 전통의 장기지속적인 측면을 깨닫고, 조망을 확보하는 일이며, 이에 기반하여 전통을 능동적으로 현재화하는 일이다.

김수영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전통의 아비투스,26) 곧 장기지속-전통이다. 무엇보다도 비천하고 열등하다고 근대성에 의해 배제된 전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용을 통해 연속적 흐름으로 지속해 왔던 전통이 중요하다. 전통은 따라서 거대한 뿌리다. 너무도 거대하여 이것에 비하면 제 3인도교의 철근기둥은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 거대한 뿌리다. 때문에 이것을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거대한 뿌리를 상상한다면, “진보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통일도 중립도, 은밀과 심오와 학구도…” 모두 개좆이다. 이 거대한 뿌리에 젖줄을 대지 못하고 그것을 망각하거나 몰각한 채 행사되는 이념과 행위와 기구들은 네에미 씹이다. 반대로 시인이 애호하는 것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같은 무수한 반동들이다. 이것들은 새롭지도 찬란하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낡고, 더럽고, 뒤처진, 깨알 같고 씨알 같은 이 작은 폐물들이야말로 장기지속-전통이 가시화되는 증거물들이며, 기억을 담지한 파편들이고 흔적들이다. 이들은 더럽다. 하지만 아무리 더럽더라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더럽다/아니다가 아니다. 더럽거나 찬란하기 이전, 좋고/나쁘기 이전에 전통은 불가피하다. 이렇듯 더러움/찬란함 식으로 이항대립을 구성하는 것은 사후적 혹은 자의적인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전통은 무엇보다도 거대하고 불가피한 연속체다. 시인은 이 무수한 반동들의 연쇄로 지속하는 전통에서 ‘거대한 뿌리’의 모습을 떠올린다.27) 이는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며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다. 시인은 망각으로부터 다시 건져낸 잃어버린 시간의 연쇄, 곧 이 거대한 뿌리를, 이 땅에 발붙이기 위해 이 땅에, 내 땅에 박아 넣는다.

여기서 시인이 장기지속-전통을 ‘거대한 뿌리’라는 형상으로 제시한 것은 전통의 시각화라는 논점과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이 거대한 뿌리가 통상 우리가 떠올리는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때의 뿌리가 아님은 분명하다.28) 하지만 시에서 거대한 뿌리의 형상에 대한 묘사는 몇 가지 암시에 그칠 뿐 구체적이지 않다. 그 암시 중 하나는 김홍중의 해석에서 볼 수 있듯 ‘과거의 징후로서의 무수한 폐물들이 마치 뿌리줄기(리좀)처럼 망을 구성하며 옆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결집체’의 모습이다.29) 다음으로는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고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괴기스런 형상30)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 다시 말해 숭고31) 혹은 상상불가능, 재현불가능의 이미지다. 따라서 ‘거대한 뿌리’는 손에 잡을 수 있는 전통에 대한 형상적인 비유라기보다는 장기지속-전통의 집합체적 성격, 기이한 출현과 재현불가능성을 지시하는 쪽에 더 가깝다.

신학철의 작품들은 이러한 장기지속-전통의 형상화 문제를 더욱 풍부하게 생각토록 한다. 그는 잘 알려진 ‘한국근현대사’ 연작을 통해 ‘기억하기’의 문제 그리고 이 기억으로 드러나는 전통/역사/과거의 형상화 문제에 지속적으로 천착해왔다. 이 연작은 한국 근현대 역사의 무수한 사건, 서사, 인물들을 결집하여 그야말로 상상불허의 기이한 형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예로 들어보자. 이 그림은 바닥에 깔린 무수한 희생자들, 그로부터 뒤틀려 용솟음쳐 오르는 그야말로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형상 그리고 우주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배후의 검은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철은 왜 한국근현대사를 이 같은 형식으로 그려냈을까? 아마도 그 역시 김수영과 마차가지로 어떤 깨달음, 일종의 기억하기의 순간, 곧 한국근현대사를 상상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았나 싶다. 그 충격과 기억의 분출 속에서 혹은 그 순간의 기이함 속에서, 그는 먼저 깨알 같고 씨알 같은 말할 수 없이 수많은 고난의 사건과 인물, 서사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이들이 어떤 흐름 혹은 연속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리라. 또한 동시에 그 연속체에 가해진 힘과 그것으로 인한 뒤틀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어떤 역동적 움직임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 흐름과 연속의 무한한 지속과 영원함 즉 재현불가능성을 깨달아 일종의 막막함에 다다르지 않았을까? 실상 그의 그림은 어떤 형상을 그려냈다기보다는, 어떤 재현 불가능한 대상 혹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대상을, 그것이 재현 불가능하고 감히 상상하기 힘듦을 확인할 수 있도록 그려낸 것에 가깝다. 우리는 어떤 형상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가능한 형상을 상상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거대한 뿌리’를 그림으로 그려내고자 할 경우, 이는 그야말로 가까스로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 아닐까?

* 이영욱, 박찬경의「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은 2016년 10월 20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인디프레스에서 열린《앉는 법》(기획: 이영욱)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은 1주일에 한 편씩 총 4회에 걸쳐 크리틱-칼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16) 기억으로부터 추방된 전통(과거)은 우연한 계기를 만나면 유폐된 곳으로부터 흘러나와 마치 유령처럼 출몰한다. 김수영의 초기 시 <아버지의 사진>에는 시인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숨어서 보는 장면이 나온다. 시인은 왜 사진을 숨어서 보는 것일까? 여기서 부재하는 아버지는 전통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버지=전통은 완전히 죽지 않고 괴이한 기운을 뿜어내는가 하면 보이지 않지만 거기 있다는 불길한 신호를 보내면서 시인의 감성을 압박한다. 김홍중은 억압되고 차단된 상태에서의 이 같은 전통의 출몰을 ‘유령-전통’이라고 부른다. 김홍중, 「유령, 리좀, 그리고 교량」,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370~371쪽 참조.

17) 릴라 간디Lila Gandhi에 따르면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민족은 압도적인 낙관주의에 휩싸여 과거와의 단절 내지 과거의 망각을 시도한다. 그들은 전통과 결별하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런 상태에 ‘포스트식민적 기억상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식민에 의해 생겨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손상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종속이 초래한 왜곡은 계속해서 남아있으면서 사이드Edward Said가 말한 ‘지독하게 부착된 낙후성’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억하기’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간디는 식민 이후의 기억상실을 치유하려면 정신분석에서 사용하는 기억을 통한 치유법, 곧 ‘기억하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릴라 간디,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1998, 17~32쪽 참조.

18) 호미 바바Homi Bhabha는 ‘기억하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기억하기는 “결코 자기반성이나 회고 같은 정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 맞춰 보는 것, 고통스러운 다시 떠올림”이라고 말한다. Homi Bhabha, The Location of Culture, Routledge, London, 1994, 63쪽.

19) 하지만 그간 민중미술 관련 연구는 이 점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단 하나 있다. 박소양, 「기억과 망각의 시각문화: 한국 현대 민중운동의 정치학과 미학(1980-1994)」, 『현대미술사연구』, Vol.18, No.1, 2005.

20)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린 1981년만 하더라도 연인들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쉽지 않았고, 해안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포옹을 하다 군인들에게 들켜 곤욕을 치루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21) 콘텐츠-전통과 관련해서는, 김홍중, 앞의 글, 365~367쪽 참조할 것.

22) 전통이 변용되어 이전과 다른 모습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전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선행하는 전통 요소들이, 적어도 외부의 관찰자가 볼 때는 수차례의 전이과정을 거치면서도 흡사한 동일성(가족유사성)을 유지함으로써, 연속성을 인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박영미,「박종홍에서 전통의 문제(1)」,『시대와 철학』, 제 26권 1호, 2015, 221쪽 참조.

23) ‘장기지속longue durée’ 개념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지속-역사’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역사는 사건들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사건들이 전개되는 표면 아래에는 사건사적 시각으로 포착되기 어려운 역사적 시간들이 존재한다. 역사는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는데 첫째는 개인들의 의지를 통해 형성된 사건들의 역사, 즉 표면의 역사이며, 둘째는 집단적 이해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리듬을 따라 순환하는 국면의 역사이며, 셋째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역사적 주체들의 의지를 거부하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구조의 역사이다. 장기지속은 이 같은 구조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24) 이렇게 본다면 콘텐츠-전통은 한 사회가 물려받은 전통 전체의 폭과 깊이, 곧 장기지속-전통의 극히 일부분을 구성할 뿐이다. 일견 콘텐츠-전통은 이런 장기지속-전통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장기지속-전통의 존재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약된다. 콘텐츠-전통이 전통 요소를 전략적으로 재구성하여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 전략의 성공여부는 통상 장기지속-전통의 담지체인 대중의 호응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홉스봄Eric Hobsbawm은 “전통의 의식적인 발명은 공중이 맞추려는 주파수에 방송이 전파를 내보내는 데 성공하는 정도만큼 꼭 그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새로운 공휴일, 의례, 영웅, 상징들은 진정한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일반 시민들을 동원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 496쪽 참조.

25) 전근대로부터 이어온 전통의 요소들이 근대적 삶의 과정에서 변용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지 시기 자본주의 시장경제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이 수적으로 증대된 현상(물론 자본주의 시장의 확대로 그 비중은 높지 않았지만)은 농촌 지역 주민들이 재래시장이 지니고 있던 지역 중심성을 새롭게 활성화시킨 결과다. 이렇듯 전근대의 전통적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된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선택과 재해석을 통해 변용시키는 조건으로서 작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적으로 그 자신 역시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적응하면서 창조적으로 변용된다. 이병수, 앞의 글, 319~321쪽, 조형근, 「근대성에 내재하는 외부로서 식민지성/식민지적 차이와 변이의 문제」, 『사회와 역사』, 제73집, 2007, 406~408쪽 참조.

26)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 장기지속-전통에 상응하는 것으로 ‘전통적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동문선, 1995, 17쪽

27) 김홍중은 기존의 전통 개념과는 여러모로 상이한 이러한 전통 개념에 ‘리좀-전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특성을 다음의 3가지로 탁월하게 정리해낸다. ① 과거를 하나의 보편적 전통으로 실체화하지 않고 그것을 생성, 변이, 흐름, 접속, 변환 등을 통합 경합적 계승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전통은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부단한 형질 변화에 종속되어 있으며, 현재성과의 교감을 이룸으로써 영원성을 간직한다. ② 이런 계승과정에서 발견되는 전통의 사물들은 과거의 모양대로 보전된 유물들과는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괴되고 망각돼가고 있는 폐물로 나타난다. 이는 전통을 상징이 아닌 징후로 드러냄으로써 전통을 물신화하는 태도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한다. ③ 이러한 폐물적 상상력에 의해 전통은 최종적으로 회상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즉 김수영에게서 전통은 주어진 소여가 아니라 식민이 초래한 기억상실에 의해 발생한 의식의 공백, 다시 찾아야 하는 ‘잃어버린 시간’으로 규정된다. 김홍중은 따라서 ‘거대한 뿌리’를 통상적인 나무뿌리(뿌리 깊은 나무)의 형태가 아니라 망상 조직의 형태로 상상한다. 김홍중, 앞의 글, 381~382쪽.

28) 이 지점에서 김수영의 전통 개념은 그 어떤 유형의 민족주의 혹은 그들의 전통 개념과도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29) 이 지점에서 김수영의 전통 개념은 그 어떤 유형의 민족주의 혹은 그들의 전통 개념과도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30) ‘괴기영화의 맘모스’라는 형상은 시인의 네오-고딕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프로이드Freud는 반복강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운하임리히Unheimlich라는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이 개념은 오래전에 떠난 집(또는 고향)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낯설고도 친숙한 감정의 동시병존을 포착한 것이다. 한국처럼 식민을 겪고 전쟁과 급속한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삶의 급격한 단절을 강요당한 사회에서는 과거와 전통이 심리적 차원에서 희미한 기억의 친숙함과 망각으로 인한 낯설음이 동시 병존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남기 십상이다. 과거와 전통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추방되어 있곤 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그 출구가 열릴 경우 이 기억은 갑작스러운 회귀의 방식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그러한 갑작스러운 회귀를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어딘가 기이하고 괴이한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은, 무수한 파편들이 모인 거대한 부정형의 힘, 의미, 사건, 양상들이 앞서 말한 단절의 심리 상태에 부응하여 출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같은 미학적 정황을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활용하여 표현하면 ‘식민적 기이함Colonial Uncanniness’ 정도가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31) 미학 상의 용어이자 미적 범주의 하나인 숭고는 “보통 좁은 의미의 ‘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대상이 인간을 압도하는 크기 또는 힘을 갖는 경우, 소위 미적 형식은 상실되며 처음에는 그 형식과 내용의 길항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지만 곧 그런 느낌이 사라지면 유한한 감성을 매개로 무한한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생명 감정이 자극되고 역감力感이 앙양되어 대상에 대한 경외, 정서적인 경악이나 황홀경, 즉 넓은 의미로의 ‘미’의 감정을 낳게 된다. 전형적인 것으로서는 해돋이나 바다와 같은 숭고한 자연(칸트Immanuel Kant), 비극적인 행위의 도덕적 신념(쉴러Friedrich von Schiller) 또는 초기의 인도적, 모하메드적, 유태, 기독교적 시와 신비주의 속에서의 신의 임재(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가 언급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숭고(崇高, the sublime, Das Erhabene),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199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