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3)

2018년 8월 20일 발행

이영욱(미술평론가), 박찬경(작가)

 

4. 근대 -전통

전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상상할 것인가는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김수영을 좆아, 억압된 전통을 기억해내고, 그 전통을 부단히 변화하는 장기지속의 흐름으로 인식하며, ‘거대한 뿌리’를 상상하고, 그 뿌리를 내 땅에 박으려 한다면,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통념화된 근대 개념의 자장 밖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다.

흔히 근대는 서구에서 기원하여 나머지 세계로 확산 전파된 것으로 인식된다. 소위 확산론32)으로 알려진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근대화란 서구화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다양한 지역, 로컬의 문화와 전통들은 결국 유일하고 보편적인 문명33)인 근대문명에 포섭되어 사라져버릴 것으로 상정된다. 또한 근대성 곧 모더니티(근대의 역사적 경험 내지 자본주의, 국민국가, 자율적 개인, 계몽주의, 합리성 등 근대의 기본적인 특성)는 완성해 내야할 어떤 궁극적인 가치 혹은 이념 같은 것으로 표상된다.

하지만 그간 여러 학자들은 다각도의 비판을 통해 이러한 이해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혀왔다. 아도르노Th. Adorno와 호크하이머M. Horkheimer는 계몽의 사유가 그 근본에 있어서 비합리적이며, 그 사유의 도구적 성격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지배를 강화해 왔음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근대 이성이 스스로를 정상적인 것으로 정립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려 하는 가운데 어떻게 타자(광기)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써 계몽적 이성의 보편타당성이라는 것이 결국 서구의 경제적 지배, 정치적 헤게모니와 결합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통렬하게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은 근대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근본적으로 식민화와 위계화를 통해 구성된 것임을 밝혀냈으며, 발리바Etienne Balibar 역시 근대의 성립과 전개과정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식민지 침탈 내지는 착취체계와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 같은 근대 비판은 근자에 더욱 급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일군의 학자들, 두셀Enrique Dussel, 키하노Anival Quijano, 미뇰로Waltar Mignolo로 대표되는 식민성34)/근대성 연구그룹의 성과는 주목에 값한다. 이들의 입장은 한 마디로 ‘근대성=식민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근대성이 유럽 발 현상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비유럽의 타자성과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식민지 침략을 통해) 구성된 것임을 강조한다.35) 동시에 근대성이 해방의 합리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또한 처음부터 타자에 대한 종족학살적인 폭력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36) 이렇게 본다면 통념화된 근대성 개념은 식민화 과정을 은폐하는 일종의 비합리적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실상 서구중심적 시각에서 구성된 개념37)일뿐이다. 때문에 근대성(=식민성)은 이념이나 가치의 표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실정성positivity의 관점에서 그 자체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포착되어야 한다.38)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근대성 신화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된 타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식민적 차이’39)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고, 이 차이에 입각해서 지구적 차원의 인간 역사를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근대란 16세기 이래 인종, 계급, 젠더, 성적인 우열의 위계에 따라 성층화된 권력질서(권력의 식민성)에 근거해 수립된 근대적/식민적 세계체제에 다름 아니다.40) 이 체제는 문명화의 사명을 성취해낸다는 미명 아래 서양 외부의 무수한 로컬 타자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무의미’ ‘야만’ ‘비문화’, ‘비문명’ ‘저발전’으로 폄하하고 근대성 밖으로 추방해왔다. 하지만 이들 문명들의 전통과 문화, 존재는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실상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두셀에 따르면 이런 타자의 문화와 가치들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그것들이 근대성/식민성의 전체화하는 논리 속으로 완전히 통합될 수 없는 외재성, 곧 타자성41)의 관계를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 문화와 전통들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한 문화적 풍부함을 간직하고 있거나 변용 과정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 그는 이들 타자들의 억압되었으나 풍부하게 남아있는 문화적 가치에 입각해 서구적 근대성을 비판하고 횡단하며 극복하는 작업을 ‘트랜스모더니티’transmodernity(횡근대/초근대)라고 부른다. 트랜스모더니티는 서구적 근대성이 추구하는 단일보편성universality과는 달리 이렇듯 다양한 가치들이 공통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다원보편성diversality을 지향하며, 그 과정을 통해 서구적 근대성이 성취할 수 없었던 해방42)을 공동-실현해 나간다. 다시 말해 트랜스-모더니티는 근대성/식민성에 의해 억압된 모든 주체와 문화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여 정치, 경제, 생태, 성, 교육, 종교적 해방을 꾀하는 기획이며, 오늘날 한계점43)에도달한(특히 타자들의 수렴 불가능성) 근대적/식민적 세계체제가 해방을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지반이다. 이는 억압에도 사라지지 않은 무수한 전통과 문화, 존재들이 자신의 역사와 무의식에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뿌리> 마지막 부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이 그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과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가 연결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는 곳이다. 뒤쪽의 제3인도교를 근대 문물의 상징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그리고 앞쪽의 두 문구를 이 땅에서 제대로 살려면 이곳의 개개인 모두가 억압되어왔던 전통을 이 땅에서 기억하고 되살려야 한다는 암시로 읽으면 어떨까? 그럴 경우 “이렇듯 장기지속-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근대문물의 위력이란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이는 근대성/식민성 연구그룹의 시각과 김수영의 시가 그 핵심적인 모티브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양자는 공히 근대성에 의해 ‘야만’, ‘비문화’,‘비문명’, ‘무의미’, ‘저발전’으로 폄하되고 부정된 전통, 문화, 존재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거대한 희망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며, 그것이 지닌 해방적 잠재력을 신뢰한다.

최정화의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사례다.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그간 적지 않은 해석과 비평이 제시된 바 있다. 초기에는 신세대의 탈권위적 위반행위로 보는 해석이 부각되었고, 이후 대중들이 사용하는 값싼 일용품들을 주 소재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한국적 팝’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이곳 키치문화의 피상성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조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도시공간의 시각적 질서에 대한 개입으로 해석하는 시각44)까지 그야말로 다채롭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고 싶은데, 그것은 그의 작업을 제 3세계적 혼성의 문화현실에서 전통이 지니는 해방적 잠재력과 연결 지어 보는 것이다.

최정화의 작업의 모체는 도시다. 물론 이 때 도시는 통상적 의미의 근대도시는 아니다. 좀 더 구체화하면 전지구화(=세계화)의 추세로 국가를 횡단하는 문화 유입과 유출이 활발해지고 그로 인해 문화의 혼종성이 두드러지는 도시, 즉 근대도시와 탈근대도시의 속성들이 뒤얽힌 3세계 거대도시(예를 들면 서울)다. 그는 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죽음, 욕망과 좌절, 쾌락과 고통, 진실과 거짓 등 온갖 극화된 삶의 국면들을 민감하게 주시한다. 또한 권력, 욕망, 체계, 언어, 기호, 스펙터클 등 이곳 삶을 구성하는 요인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의 요체는 사물들에 대한 관심에 있다. 그는 이 사물들 속에 이곳 삶의 모든 주, 객관적 요인들이 결집하여 상호 침투하고 갈등하며 또한 공존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가 결국 이 사물들에서 끄집어 드러내는 것은 생명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에너지 흐름이다. 그는 ‘강한 것, 진한 것, 즉 모든 것을 여과시키고도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취한다고 말한다, 즉 삶의 미세 국면에까지 포섭하고 있는 인공화, 사물화, 기호화의 인위적인 체계들과 쟁투하면서 소멸을 거부하고 사물 속으로 스며들어 살아남은 생명력이 그것이다. 그의 작업 목표는 이 생명력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작업은 우선 이 생명력이 드러나는 사물들을 채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저기도 내 작품 있네!). 그리고는 그 채집된 사물들을 재구성하여 제시하거나 배치한다. 이 재구성-배치 과정의 목표는 이 사물들이 내장한 생명력을 좀 더 강력하게 응집시켜 드러내는 것이다.(알록달록, 빠글빠글, 번쩍번쩍 등). 이 사물들은 사람들의 왜곡된 감성체계로 인해 놀랍게도 그 생명력이 감지되지 못한 채, 저평가되어, 주변화 되고, 은폐되어 버려져 있다. 때문에 작가는 이들을 채집-재구성-배치하여 생명력을 극대화해 드러냄으로써 오늘의 왜곡된 감성체제를 뒤흔들고 변화시키려 한다. 그 방식은 여러 가지다. 많은 경우 그는 이 사물들을 대량으로 쌓아 올리거나 사방으로 펼쳐놓는다. 혹은 걸어놓고, 모아놓고, 난장으로 흩뜨려 놓는다. 또한 작은 사물을 크게 확대하거나 이런 저런 사물들을 결합, 증폭시켜 제시한다. 혹은 하나의 공간 또는 벽면을 이 사물들로 모두 채워 버리거나 뒤덮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자연적인 것을 인공적으로, 진짜를 가짜로 변형 전치시키기도 한다. 즉 나열, 집적, 확대, 과장, 결합, 변형, 전치 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최정화 작업에서 좀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다양한 방법들 저변에서 작동하는 몇몇 원리들이다. 우선 반복이 눈에 띤다. 그는 사물이 내장한 생명의 기미를 반복을 통해 증폭시킨다. 하지만 이 반복은 현대미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어떤 차폐된 정신의 단속적 표출(강박)과는 다르다.45) 그것은 시공간 상의 무제한적인 확장과 에너지의 흐름 혹은 생성에 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의 반복은 모든 곳에 편재하는 이 생명력의 무한생성에 대한 알레고리의 성격을 갖는다. 또 다른 하나는 대조의 방법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증폭된 생명력을 발산하지만 또는 그것이 위치한 주변 환경과의 대조를 통해 활력을 더한다. 작품 설치 장소와 그곳에 설치할 작품을 선택할 때 그는 항상 이러한 효과를 의식한다. 일종의 받아치기를 시도하는 것인데, 이로써 통상 서로 혼재하고 침투되어 있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생명의 활력/인위적 체계의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마지막으로는 확인할 것은 전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사물에 덧씌워진 담론화된 감성 체제의 장막을 걷어내려는 의도와 연결된다. 그의 작업이 흔히 다양한 기호론적 대립 쌍들(진짜/가짜, 고급(고상)/저급(천박), 가벼움/무거움, 인공/자연 등)을 뒤섞은 혼성체(진짜 같은 가짜, 인공적인 자연, 저급한 고급 등)로 출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의 혼성체들은 이 소비사회 속의 온갖 표피화된 욕망, 기호, 매끈함을 모방하고 관통하는 가운데, 이러한 경계 짖기의 담론/감성 체계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그것들을 뚫고 나와 해체시켜 버린다.

[도판7] 최정화, 천 개의 문, 2009, 명륜동 리모뎅링 건물 가림막

나는 그가 가시화한 이 에너지의 흐름이 시인 김수영과 두셀이 확인했던 억압된 문화, 전통, 존재의 해방적 잠재력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사회의 저변에서 변용을 거듭해 온 기층의 전통, 문화와 감성적 일체감을 갖고 있다(샤머니즘, 불교, 민속 문화[도교]의 형색과 리듬). 그가 온갖 사물들, 이제는 낡아버린 과거의 기물들로부터 쓰레기장에 버려진 이불보나 현수막을 거쳐 기계적으로 찍어낸 소비사회의 한없이 가벼운 물품들에 이르기까지의 사물들 속에서 생명력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거리에서 그가 발견한 억압된 전통의 해방적 잠재력에 조응하는 감성체계를 도시공간과 미술관 안으로 들여와 오늘날의 박제화 된 감성체제를 뒤흔들어 전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 이영욱, 박찬경의「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은 2016년 10월 20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인디프레스에서 열린《앉는 법》(기획: 이영욱)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은 1주일에 한 편씩 총 4회에 걸쳐 크리틱-칼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32) ‘확산론diffusion theory’은 유럽이 자신들의 인종적 특성, 환경, 문화, 정신 혹은 영혼의 독특함에 근거하여 근대세계를 출발시킬 수 있었고, 또한 근대세계의 지배적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나머지 세계는 유럽 문명이 확산되는 만큼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http://blog.naver.com/ostrov/140057194901 참조.

33) 역사에 등장한 여러 문명권들의 경우 자기 우월성을 의식하여 중심을 자처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구문명권처럼 자신의 가치와 규범을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확립하고 이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타자에게 부과한 일은 없었다. 유재건, 「근대 서구의 타자인식과 서구중심주의」, 『역사와 경계』, 46호, 2003, 32쪽 참조.

34) 이들이 말하는 식민성coloniality은 식민주의colonism와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식민주의가 식민적 행정기구의 존재와 제국의 특정한 정치적 행정적 지배질서, 그리고 그 시기를 전제로 한다면, 식민성은 그러한 행정기구와 지배질서와 상관없이, 특히 그런 기구와 질서가 종식된 뒤에도 지배적인 인종적/민족적 집단들이 종속된 인종적/민족적 집단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인식적, 정신적, 성적, 언어적 권력구조를 뜻한다. 김용규, 「트랜스 모더니티와 문화의 생태학」, 『코키토』, 70호, 2011, 142쪽 참조.

35) 최근 역사학에서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요한 의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적 근대의 출발 특히 자본주의의 출발이 비서구의 식민화를 내적 조건으로 하고 있었으며, 서구 근대의 풍부한 문화적 역사적 세부들이 식민주의 경험 속에서 성립되고 실천됐다는 연구 결과들이 다양한 증거와 함께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블롯James M. Blaut은 근대화와 자본주의를 향한 진보가 아프리카 일원과 아시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지만, 지리상의 이점에 의해 유럽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한 식민주의적 부의 축적이 유럽으로 하여금 급속하게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했다는 연구 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프랑크Andre Gunter Frank는 중화질서 내부의 조공 무역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18세기까지 세계경제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민쯔Sidney Mintz의 경우는 카리브 식민지가 유럽 자본주의 노동생산 체제의 일부였으며, 유럽에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유럽의 부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이었다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프랑스 혁명이나 계몽주의가 아니라 아메리카 정복이 근대성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사회적 단절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조형근, 앞의 글, 393~396쪽 참조.

36) 이들은 서구 근대가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보다는 1492년 스페인에 의해 주도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18세기의 근대성은 이 16세기 근대성의 결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대 유럽 형성의 결정적 모멘트였던 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은 흔히 이야기되듯 타자의 ‘발견’이 아닌 ‘타자에 대한 학살의 은폐’가 시작된 것으로 그리고 글로벌 식민화 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37) 서구중심주의는 (서)유럽에서 기원한 문명이 타자보다 우월할 뿐 아니라 타자를 평가하는 보편적 기준과 규범이 된다는 암묵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재건, 앞의 글, 32쪽 참조.

38) 강내희,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과 충격의 번역」, 『문화과학』, 31호, 2002 가을. 83쪽 참조

39) 식민지배자건 피식민 주민이건 모두 식민지에 근대성이 전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식민적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준다. 일본의 고위 관리나 학자들이 조선이 근본적으로 일본에 동화될 수 없다고 인식한 여러 문서상의 증거들이나 호미 바바의 식민지배자의 양가성(‘나를 닮아라’/‘나와 같아서는 안 된다’)에 대한 지적, 그리고 친일협력자들이 한편으론 황국신민이 되자고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던 사실 등은 모두 식민지근대성에 의해 완전하게 포섭될 수 없는 식민적 차이를 확인해 준다. 조형근, 앞의 글, 404~406쪽 참조.

40) 근대역사는 추상적 시간구조 내지 시간성의 경험 형식인 근대성을 세계의 공간적 분할과 연결시켜 유럽의 중심성을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근대는 세계의 무수한 이질적 시간성들이 서구에서 기원한 단 하나의 시간성으로 환원되는 시대다. 하지만 근대성은 동질화와 더불어 차별화를 자기 전개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근대를 시기구분의 범주라고 본다면, 시기 구분상의 차이가 지리적 공간에 차별적으로 분배되면서,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지역들이 비동시적인 성격을 부여받게 되는 방식이 그것이다(근대적 서구/전근대적 비서구). 근대역사는 시간을 역사화 함으로써 근대성의 목적론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시간들을 억압하고 주변화 할 수 있었다. 조형근, 앞의 글, 398~400쪽 참조.

41) 레비나스E. Levinas가 타자(성) 개념을 제시한 것은 전체성을 내세운 서구 주체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두셀은 레비나스의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존재의 외부성을 유럽적ㆍ유대적 세계의 맥락에서 사유했다면, 두셀은 그 외부성을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성찰한다. 곧 유럽 근대성과 유럽중심주의 사고에서 탈피해 제 3세계 주변부 민중들(노동자, 농민, 성적소수자 등)과,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여성 등 희생자들 곧 타자들을 역사화하는 방식으로 성찰한다. 조영현, 「엔리케 두셀의 해방정치철학에 대한 연구: 생명, 희생자 그리고 민중 개념을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제30권 1호. 2011, 304~306쪽, 참조

42) ‘트랜스-모던’하다는 것은, 두셀에 따르면 근대성이 지닌 ‘합리적인 해방적 핵심’을 긍정하는 가운데, 전근대적인 것의 절멸을 시도하는 근대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함으로써, 근대성 자체를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트랜스-모더니티가 부정하는 것은 근대성의 신화가 생성한 폭력의 비합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타자의 이성’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한다. 김용규, 앞의 글, 149~150쪽 참조.

43) 두셀은 이 한계점으로 3가지를 제시한다. ① 전지구적 생태계의 파괴 ② 인간성 자체의 파괴(삶-노동이 자본의 매개물로 전락하고 기술의 발달로 노동중요성이 감소하면서 인간이 남아도는 인간성으로 타락하는 것) ③ “근대성이 생겨난 이후 끊임없이 공격하고 배제하고 빈곤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과 경제들, 민족들, 문화들의 포용불가능성”이 그것이다. 김용규, 앞의 글, 146~147쪽 참조.

44) 신정훈, 「‘거리’에서 배우기」, 『시대의 눈』, 학고재, 2011, 참조.

45) 그의 작품 중에는 비닐로 제작한 거대한 풍선 형상들(꽃, 로봇, 동물, 왕관 등)이 같은 행위(부풀려졌다 가라앉는)를 반복하는 작업들이 여럿 있다. 이 경우 반복은 여타 생성을 가시화하는 작업들에서와는 달리 반복이 증폭 효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도 차폐된 반복과는 달리 생성/억압의 대립 구조가 감지되거나 에로티시즘의 성격을 띤 순환적 반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회적 방식으로 생성의 힘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