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정_여성적, 말하기? : ‘우먼 핵Women Hack’에 붙이는 글

2019년 1월 13일 발행

허호정

“타인만이 말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말이 아니라 차라리 말을 하라는 간청. 말과 함께 거부될 수도 있고, 제대로 들리지 않을 수 있거나 받아들여지지도 못할 수 있는 간청.”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1)

0. 알림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2017년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에 이어 2018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11월 9일부터 12월 9일까지 《우먼 핵(Women Hack)》을 전개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전시 《우먼 핵》의 정식 표제는 《우먼 핵, 사운드 이펙트(SFX) 서울 2018》로, 2007년 이래 5회 차에 이른 일련의 사운드 아트 페스티벌의 계보를 시사했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이 ‘사운드’ 또는 ‘사운드 이펙트’라는 대상을 가지고 겨냥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단적으로 해당 “축제”는 ‘듣기’를 둘러싼 문화의 편중 현상 – 대중 산업 음악을 위주로 듣기가 편성되는 제(諸) 현상 – 을 사운드 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수이자 편재하는 소리들로 극복하고자 의도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사운드 이펙트 서울>이 그려온 궤적을 따라가거나, 혹은 주최 측이 공연히 ‘듣기’ 문화의 선도쯤으로 자기 규정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 다만, 참여 작가 5인이 해킹의 메커니즘을 경유해 구조화하고 있는 것들, 이들을 한 데 묶어 “우먼 핵”으로 명명한 전시를 어떤 말하기-의 차원으로 풀어보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적 지지체, 질료, 메커니즘에 국한하는 사운드 아트 비평 또는 특정 감각에 집중하는 인상 비평을 피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1. 말하기라는 관건

여기서 왜, 말하기가 관건인가? 입을 연다는 것, 소리를 낸다는 것은 ‘말하기’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따금 경이(驚異)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사운드가 손쉽게 질료로서, 그 물질적 차원을 지칭하는 데 그칠 우려가 있는 한편, 말하기는 그것을 언어라는 구조 속에 두며 이에 관여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설정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하기는 곧, 소리를 내는 ‘나’의 세계(/구조)를 타자(-의 세계/구조)에게로 열리도록 하는 일을 은유한다. 소리를 매개로, 소리의 효과로 구성되는 어떤 ‘발화’는 세계의 열림을 위한 시도로 읽히는 것이다.

​실로 말하기에 관한 논의는, 지배적인 권력과 형이상학을 벗어나려는 사유들 속에서 말과 글의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민들을 품기도 하였다. 이때 거론되는 말, 말하기는 “형성되고 있는 침묵”으로서, “끊임없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낸”2)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또는 “[…] 입을 다물고 색다르게 있고자 하는 오래된 말…… 흔적도 없는 소음…… 어느 곳도 배회하지 않지만 도처에 자리한 말(13)”3)로 간주된다. 이어지는 글은 이러한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전시 안팎을 배회하는 소리, 소음, 간혹 침묵의 형상을 띤 말하기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2. 《우먼 핵》과 말하기

《우먼 핵,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8》에서 사운드는 다음의 이유로 인해 말하기로 이해된다. 첫째, 각 작업은 오브제가 생산하는 사운드를 다름 아닌 언어로 이해될 특정한 구조체로 만들려 한다. 둘째, 전시는 사운드와 관객 간의 관계를 발화하는 주체와 그가 향하고 있는 타자의 만남으로 가시화한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단순히 청각적 차원 뿐 아니라 시각적 차원을 포함하는 복잡한 매개 환경 속에서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언급한 두 가지 이유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이들 사운드 아트는 기존 음악에서 12개 혹은 특정 수량의 음(note), 단위들로 표현되는 구조를 벗어나려 노력하면서도, 결코 노이즈 차원에 머물지 않는 다른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노이즈 이상의 구조체, 다르게 말하면 언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언어는 그 웅웅거림이 하나의 의미를 향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거의 해독이 불가능한 채 덩어리로 남으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언어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배인숙, <리더>, 사운드 설치, 2018

배인숙은 음악의 입출력 장치일 뿐인 하드웨어를 그 자체로 소리를 내는 악기로 바꾼다. 카세트 플레이어, 시디롬, 하드 디스크, 플로피 디스크가 벽면에 붙어 있고, 이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시에 미세한 소리가 동반한다. 이를 보고 들으며 벽면의 물체들을 엮는 선을 따라가면 헤드셋이 끝에 걸려 있다. 그리고 헤드셋에서는 배인숙이 이 작업 <리더(Reader)>로 생산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주목할 것은 ‘하드웨어에서도 소리가 나요, 이 노이즈를 들어 보세요’가 아니라, 이것들이 다시 음악적 데이터로 가공되어 “멜로디와 리듬”을 생산해 내길 기대하는 지점에 있다. 노이즈가 기존의 구조를 방해하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 작가는 도리어 그 노이즈-기계음을 수집하고 재구성한다. 음악으로 이해되지 않던 하드웨어의 잡음이 <리더>안에서 구조를 거쳐 헤드셋이라는 정식 출력 장치에 재생되는 음악이 된 것이다. 듣는 자가 이 소리를 음악으로서 구조체로 인지하지 않는다 해도, 이와 무관하게 사운드는 노출된다. 이렇게 연출된 발화의 상황은 ‘소리의 효과(사운드 이펙트)’로서 일정한 언어 구조를, 체결 (불)가능한 상호 약속을 시사한다.

​이어서 둘째, <사운드 이펙트 서울>은 소리를 매개하는 전체 환경 안에서 비단 ‘청각’의 문제에 국한하여 발생하지 않는다. 전시는 말 그대로 전시인 이유로 일정한 시각적 형태를 갖추기 마련이고, 관객은 전시 경험 안에서 소리를 비롯한 여러 표면들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말하기는 그것이 글쓰기에 대별하여 음가(音價)를 갖는 것이 중요한 만큼 또 이를 듣는 타자로부터 얼굴을 중요하게 확인한다. 사운드 아트 전시의 시각적 차원은 발화 상황 속에서 얼굴들이 부딪히는 장면과 유사하게 보인다. 사운드 자체에는 얼굴이 없지만, 사운드-말은 그것을 생산하는 주체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상정된 타자의 얼굴을 그리기 마련이다.

에리코 스즈키, <세 가지 세계>, 사운드 설치, 2018

가령, 에리코 스즈키의 <세 가지 세계>는 제목이 알려주듯 전시 환경 안에서 사운드 아트의 양태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는 오브제와 관객이 마주치는 공간, 그리고 오브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이미지, 그리고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라디오 전파와 그것의 방해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를 두고 ‘세 가지 세계’라 명명했다. 작가는 한국의 다이소에서 구입한 값싼 물품들을 이용해 조명과 전파를 동시에 방해하도록 설치하는데, 이는 일정한 조작을 통해 방해된 라디오 전파로부터 사운드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기대한다. 작업은 라디오라면 으레 기대되는 ‘그’ 발화 대신, 독해를 바라지도 가능하게 하지도 않는 소리들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이를 향하는 과정 중에서 시각적 효과들을 동시에 배치한다. 이로써 <세 가지 세계>는 사운드 아트를 전시라는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말하기로서, 마주치는 얼굴의 시각적인 차원을 확인 시킨다.

이오아나 브레메 모저, <Zurkubuk, Nux Stridens, klangobjekt>, 사운드 오브제, 2018

마찬가지로 이오아나 브레메 모저가 특정하고 미세한 빛의 변화를 청각적 반응으로 변환한 <Zurkubuk, Nux Stridens, klangobjekt>, 그리고 그와 같은 사운드 오브제를 특정한 회로도로 풀고 벽면에 드로잉한 장면들. 이들 모두는 전시 조건 안에서의 사운드 아트를 주체-타자의 만남으로 시각화 하고, 또 그것을 특정한 언어적 구조화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 여성적 말하기?

다시 한 번, 말하기의 경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말하기의 놀라움은 최초의 말하기, 기존의 언어가 아닌 형태로 입을 떼기 시작한 말하기에서 극대화된다. 예컨대, 오랜 시간 강요된 침묵으로 일관해야 했던 자, 버림받음에 익숙해 보이는 자에게 “소리 내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너만 알고 있으라며 귓속말을 속삭이는 아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던 픽션 속 인물, 오랜 아픔을 처음으로 전하게 된 연인, 죄인의 마음을 신 앞에 들킨 종교인, 폭력에 노출되었던 기억을 #미투MeToo와 #위드유WithYou로 선포한 여성들에 대해서도.

​무엇보다도 이들, 최초로 소리를 낸 이들의 말하기는 아주 드문 정황, 발화된 말-소리가 타자에게 거의 불가능하게 도달하는 상황 자체로 말미암아 경이라 불린다. 즉, 말하기의 상황에서 주체와 타자는 모두 그것이 서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을 열고 말을 하며, 소리를 내는 주체는 항상 위태롭게 보이고 (그는 항상 타자를 향하고 있음에도) 심지어 고독해 보인다.

신원정, <소란>, 사운드 설치, 2018

이를테면, 신원정의 <소란>. 그는 전체 전시장에서 유일하게 녹음된 사운드를 배치하면서 드물게 발생하는 소통의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전시장 내 대부분의 작업이 현장에서 소리를 생성해내는 데 반해, <소란>은 퍼포먼스 당시 관객의 참여 및 반응으로 이끌어진 소리를 녹음하여 그것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전시장에 놓였다. 원형으로 마주보고 선 8개의 스피커-목재 조각은 소리가 발생할 때마다 깃처럼 휘날리는 봉투를 쓰고는, 일정하게 서로에게 반응하는 모양새로 장면을 취한다. 작가는 작업을 두고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의 한 종류인 대나무숲을 언급하기도 했다. <소란>이 연출하는 장면은 대나무숲이 그러하듯, 사운드가 이미 녹음된 것인 이유로 발화자의 정체를 가려 버리면서도 동시에, 봉투를 쓴 목재 조각이 펄럭이는 시각적 장치를 거치면서 사실은 누군가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그린다. 덧붙여, <소란>이 자주 사람의 아- 하는 음성이었다가 노이즈에 가까운 음 없는 소리였다가-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말이 결코 소용(召用)하지 못하고 마는 모습을 닮아 있다.

​이에, 전시 《우먼 핵》, 그리고 그의 작업들을 두고 굳이 ‘여성적’(혹은 퀴어(queer))이라는 수사를 따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의 여성적이라는 수사는 기존의 공동체가 아닌, 일반/보편으로 수렴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말하기에 붙여보는 이름이다. 전시가 여성적이라 평해질 것은, 작가 5인이 여성으로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도 아니고 ”산업적 대중문화”에서 “이성애적 성 역할이 강요된”4)것이나 “신체적 조건이나 뇌의 특징상 이런 제작 기술과 기능에 덜 최적화돼 있다는 선입견”5)을 애써 언급하거나 또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신, 이들 작업들이 여성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형(異形)의 언어를 향해 달리는 소리들과 그것을 한 데 모아 놓은 전시 풍경이 앞서 언급한 “아주 드문 정황”을 재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위태롭고 고독한 전경.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 그림자로 일렁이는 이미지, 빛과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동작들. 더하여, 이것들을 구체화하고 담아내는 코드, 도면, 새로운 음악/말의 구조.

말라 흐라디, <스핀사이클>, 사운드 설치, 2018

이들 사이에서 마침, 말라 흐라디는 <스핀 사이클>이라는 작업을 통해 전시 공간 내 관객 및 다른 작업의 움직임과 사운드와 상호 대화하는 방식을 표현했다. 전시장 안에서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벽면이나 장난감이 놓인 좌대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등 섬세한 개입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 있기 전에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전체적으로 조도가 낮으며 낯선 소리가 낮게 깔리는 전시장 가운데에서 큰 동작으로 움직이는 관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관객의 드물고 소심한 개입이 가끔 발생하면, 작동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에는, 앰프기계가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하고 앰프에서는 전시장 내 다른 작업의 사운드가 변위한 말-소리가 들린다. 이로써 말라 흐라디가 보여주는 것은 과연 ‘여성성’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 그것은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아니다. <스핀 사이클>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발화자의 고독한 상황을 극화하고, 말하기는 아주 종종 수행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때의 말하기란 언제나 타자를 향한 열림을 기대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불가능한 것으로, 작업은 그 조건 자체를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말라 흐라디가 재현한 말하기는 전통적 말/글/언어가 이미 선행하는 물화된 것으로 다루어 졌던 것에 반(反)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오로지 발화되는 순간의 경험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지만 상상적으로 구조화된 음악-말을 그려보는 노력에 다름 아닌 말하기 말이다.

​위태로운 소리-말들이 누군가에게 가 닿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러모아질 때, 전시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만 유의미하게 ‘여성적’이라 부를 말하기를 시도한다. 기존의 어법에서 탈구된 말하기는 해당 전시가 보여준 어떤 소리, 어떤 음악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질과 형태인지 듣고/보는 타자인 우리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말-소리들을 마주하는 타자로서, 또는 뒤이어 말하는 주체를 대비함으로써 대화에 참여할 따름이다. ■


1) 밝힐 수 없는 공동체』(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p.28

2)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박규현 역, 동문선, 2003.), p.45

3) ibid, (13)은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의 페이지 표시(l’Attente et l’Oubli, Gallimard, 1962.)

4) http://sfxseoul.org/ 축제 소개 중

5)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6191&fbclid=IwAR00CJhREKmdPIiyY0OZJg3icYKckNxeaCx0ee2LGdhirUYfy-foF1mJN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