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_정오(正午)의 그림자와 우상의 자리: Veni, Vidi, Vici 전시 비평

이민주

전시는 우상의 역사가 곧 이미지의 역사라는 서사를 세운다. 우상Idol의 어원이 희랍어 Eidolon, 즉 이미지Image에서 유래했다는 점, 이미지와 우상의 관계가 ‘신의 말씀’인 언어에 대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그 근거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동시대 인터넷 환경과 디지털 이미지의 조건 위에서 우상의 자리를 질문한다. 이에 대한 잠정적인 진단은 “우상이 더 이상 호출되지 않는다는 것”. 이미지가 전례없이 복제되고 순환되는 환경에서 우상-이미지는 너무 비대해져 그 자리를 가늠할 수 없거나, 혹은 너무 얄팍해져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시-행위는 우상과 이미지의 관계를 등치시키면서 언어와 이미지의 위계가 무너졌다고 현상태를 진단한다. 그렇다면 동시대 매체 환경이 어떤 방식으로 그 위계를 무너뜨렸는가?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는 동시대 매체 환경에서 어떻게 제시되는가?

이 글은 전시가 배경 삼는 디지털 매체 환경 조건에서 이미지에 대한 시태(時態)를 정오의 시간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정수리 위로 태양이 쏟아져 그림자가 지워진 시간, 모든 사물이 벌거벗은 시간에 이미지를 놓는다. 과거 우상과 등치되는 이미지의 성격이 일종의 그림자로서 윤곽이 희미한 상태로 자리했다면, 정오의 시간에서 그것은 과도하게 가시화된 대상에 사라진 그림자처럼 자취를 감춘다. 다시 말해 동시대 조건에서 우상-이미지는 (전시가 내린 진단처럼) 더 이상 호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쨍한 빛에 멀어버린 눈으로 인해 잠시 가려진 것이다. 그러나 매체 환경의 변화로 새롭게 출현한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의 범주로 볼 수 있는가? 디지털 이미지는 언어에 대한 재현인가? 우상과 디지털 이미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들에 먼저 답하기로 하자.

우상과 (디지털) 이미지

신이 인간에게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아마도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교만에 빠지거나 혹은 자유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려 종처럼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세계를 상상하면, 아마도 신은 계속 숨어야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신의 이러한 존재론적 양태 때문에 우상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자꾸 도망치는 신을 불러다 세우는 상징적 징표로서의 우상. 그러니까, 그 형태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신의 매개로서 우상은 언제나 스스로를 지켰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언어(말씀)에 대한 이미지로서,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전시가 문제삼고 있는 동시대 매체 환경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기존에 설정되었던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재고하도록 요청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픽셀이라는 최소한의 단위로 구성된 이미지이자, 일종의 코드 체계와 소스로 구조화된 문법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관념론적 이미지와 구분되며, 언어적 체계를 갖춘 것이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 파일file로서 데이터의 시각적 효과에 다름 없다. 이때 전통적인 차원에서 언어와 이미지의 위계는 무너진다. 이미지는 이제 서구 전통에서 공고하던 언어의 우위성을 넘보며, 언어와 –냉소적인 차원에서- 결탁하거나, 그것에서 해방된다. 결국, 매체 조건 내에서 이미지는 변태하면서 제 스스로의 벼슬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를 소위 “가난한 이미지Poor Image”라고 불리는 차원으로 읽는다면, 이는 그것의 존재적 위상을 결여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가난한” 이미지가 이미지의 열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생태를 조명하기 위한 전략적 수식이란 점에서 그것의 계급을 단지 열등한 것으로 수렴시킬 순 없을 것이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 언어와의 관계에 있어서, 혹은 언어의 우위성을 둔 유일신 사상과의 관계에서 디지털 이미지의 신분상승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동시대 매체 환경 내 이미지는 부유하지만 가난한, 가난하지만 부유한 졸부 정도의 위상을 점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터넷 환경에서 우상과 (디지털)이미지는 새로운 좌표값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상의 역사가 이미지의 역사였다는 대전제를 동시대에 적용불가능하게 만든다.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재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우상은 이미지로서 나타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상의 자리가 사라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 신의 빈 자리를 대체하는 상징적 징표로서 우상이 기능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욕망의 영역에서 나의 결여를 메울 수 있다는 환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재현적 이미지로서 우상의 존재는 사라졌을지라도, 그것의 자리는 폐기될 수 없는 것이다. 우상의 자리는 언제나 상상적 이미지로 채워질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전시는 태양 아래 모든 것이 과도하게 가시적인 풍경에서 그 비어있는 자리로서 우상의 작동을 조명한다. 그렇다면, 전시의 작업들이 어떻게 이미지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지, 그 자리로부터 우상의 상상적 이미지는 어떻게 도출되는지 살펴보자.

가난한 언어와 도망치는 것들

Muodraa, 비울림: rain distortion, mixed media, 2018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이 단위처럼 자신의 구획을 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공간에 배치된 작품은 뭐드라(Muodraa)의 <비울림:Rain distortion>(2018)이다. 가로형 모니터가 세로로 세워져있으며, 모니터의 인터페이스는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를 아래로 흘려보내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자세히 다가서면, SNS의 촘촘한 해시태그가 보이며 그 위에 뿌연 이미지는 아래의 해시태그와 연관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해시태그의 실시간 업로드 이미지로서, 정해진 시차를 두고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미지였고, 무엇으로 바뀌었는지는 알아차릴 수 없다. 엄지손가락의 상하운동을 연상시키며 대체되는 이러한 흐름은 이미지를 인터페이스 바깥으로 몰아낸다. 그것은 해시태그, 즉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유없이 코드화된 가난한 언어를 숙주삼아 아주 잠시 기생할 뿐이다.

윤호진, the bather, pigment print, 27x33in, 2015
윤호진, 2m7s, pigment print, 27x33in, 2015

윤호진의 작업은 여타의 것들과 달리 공간에 하나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분포되어있다. 전시장 바깥에 포스터<Triptychs>(2018)처럼 붙어있거나 걸리지 못한 사진 작품<the bather>(2018), <2m7s>(2018)처럼 바닥에 쌓여있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작업의 배치방식은 윤호진이 작업을 제작하는 방식과 이질적이다. 그는 이미지를 엄격한 체계로 다루기 때문이다. 작업은 이미지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오픈소스 이미지를 가져오거나 광고 업계에서 규격화된 사이즈로 제작된다. 작가는 이미지를 다룬다기보다, 데이터를 다룬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입력한 데이터값이 물적 조건으로 인쇄되었을 때, 작업의 성격은 전환된다. 가령, 출력된 인쇄물에서 노이즈처럼 드러난 포토샵 격자무늬의 기본 레이어를 보자. 이 레이어는 포토샵에서 작업이 진행되기 전, 곧 ‘이미지없음’을 드러낸다. 이 이미지없는 바탕이 파일로 변환되면, 격자무늬의 레이어는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 하얀 바탕으로 자동 대체된다. 그러나 윤호진의 작업에서 레이어는 자동 변환된 흰 배경 대신에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윤호진의 이미지는 재현의 맥락에서 전통적인 이미지처럼, 관객을 속이는 환영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 환영은 상상적 이미지로 대체될 여지를 마련하는 빈 자리를 나타내기보단, 오히려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더 이상 매울 수 없이 꽉 찬 상징적 이미지의 포화 상태를 보여준다.

안상훈은 회화 매체를 통해 이미지의 보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한다. 그는 –보이지 않아야 할 레이어를 이미지로 가시화한- 윤호진과 반대로,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게 만든다. 전시장에는 안쪽 벽을 마주하고 대략 성인 남성의 어깨폭 정도의 간격을 둔 흰 가벽이 세워져있다. 헌데 응당 작품이 걸려있어야 할 법한 외부면은 텅 빈 상태로 남아있다. 일반의 전시였다면 작품은 가벽의 바깥쪽, 그러니까 관객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관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 작업은 가벽의 안쪽, 조명 하나 설치되지 않은 어두운 벽에 작은 사이즈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관객은 100센티미터 남짓한 좁은 틈을 통해 작품을 본다. 그의 회화는 관객의 눈과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며, 관객에게 볼 수 없는 조건을 경험하게 한다. 여기서 작품의 단서로 기대할 만한 캡션을 찾아보자. 작품의 캡션은 회화 이미지와 전혀 연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벽 외부에 쓰여있다. 관객은 회화이미지로 작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 작품의 이름으로 회화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이때 작업의 특이성은 작가가 제목을 짓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는 작품 사진을 컴퓨터로 옮길 때 생성되는 이미지파일의 시리얼 넘버를 사용한다. 이 시리얼 넘버를 구글에 입력하고 가장 우선으로 검색된 문장을 작품 제목으로 채택한다. 이러한 작명 방식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 이미지와 제목은 디지털 코드라는 매개로 연동될 뿐이다. 요컨대 안상훈의 작업은 회화 이미지의 상상적 층위와 디지털 이미지의 언어적 속성을 붙이고 떼어보는 반복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주현욱, 메모리 네크로멘싱N37.6° E126.9°, variable size, single channel video, 5min, 2018

전시장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서면, 주현욱의 작업 <메모리 네크로멘싱N37.6° E126.9°>(2018)이 피규어Figure를 진열해놓은 것처럼 형형색색의 오브제로 놓여있다. 이를 지탱하는 설치물은 개별 오브제의 차이와 조건을 지워버리는 좌대로서 기능한다. 이 오브제들은 3D프린터 출력물로서, 전시가 진행되는 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의 방위를 기점으로 5km 이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운 동상을 대상으로 한다. 이 동상들은 “한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입은 채 특정 장소에 기입되면서 공간을 사건화한다. 설치물 옆에는 오브제가 생산되는 과정, 작가가 직접 동상을 스캔하는 행위가 영상으로 재생된다. 출력된 오브제는 데이터를 동력삼지만, 동상을 올라타고 허우적거리는 작가의 행위로 미루어보아, 입력값과 출력값이 계산되는 실증적 결과물이 아닌 것이다. 작가는 동상의 윤곽을 스캔하면서 동상이라는 물화된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현적 층위는 곧잘 무너지는데, 이는 개별 오브제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오브제는 특정 동상의 특별 부위를 닮은 형태로 제시되다가, 작가의 휘적이는 스캔 행위에서 발생한 오류적 형상이 그 사이에 끼어든다. 이때 오류적 형상은 값이 없는 상태로 출력되어, 재현의 층위를 벗어나는 지점을 마련한다. 즉 언어를 취하지 못한 행위가 설득되지 않는 방식으로 오브제에 기입된 것이다. 주현욱은 동상을 장소로부터 탈취해 기원이 삭제된 아토포스Atopos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로써,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어떤 내재적 연결도 허용하지 않는다.

전시는 디지털 매체 환경에서 우상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로 설명한다. 우상이 언어의 그림자로서, 재현적 이미지로서 자신의 존재 조건을 마련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디지털 조건에서 이미지가 재현의 차원을 벗어나면서 우상의 위상은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 욕망의 차원에서 우상은 언제나 제 스스로의 자리를 보장받는다. 그것이 가난한 언어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연명하거나, 상징적 이미지로 점유당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안상훈과 주현욱의 작업에서처럼 이미지가 언어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장면을 보여줄 때 우상은 자신의 공석에 상상적 이미지를 구축할 가능성을 갖는다. 결국, 모든 대상과 사물의 그림자를 지우는 정오의 시간에서 우상-이미지는 가려진 자신의 신화를 다시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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