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훈_‘Tracers’, 헛것을 더듬으면서 우리가 나눈 대화들

헛것처럼 흰 선들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읊조린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가 우리의 주변을 배회한다. 캄캄한 밤의 숲에서처럼, 어떤 것도 우리에게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몸짓, 선과 말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휘발하는 것을.

비고, <Tracers>, 퍼폼플레이스, 2018

비고 작가의 공연 <Tracers>의 형식을 ‘말’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검은 방에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한 사람은 춤을 추고, 한 사람은 말을 만든다. 흰 선이 그어지면 그 선을 따라서 문장이 출력되고, 안무가는 출력된 문장에 맞춰 춤을 춘다. 관객은 이러한 메커니즘 전체를 바라보며, 지시문에 따라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연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커뮤니케이션의 목표가 구체적인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있다면, 여기에서는 구체성과 정확성이 누락되어 있다. 가령 낭송의 경우, 낭송자는 드로잉을 따라 어휘를 조합하여 문장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낭송되는 문장은 불완전 문장인 경우가 많고, 언어는 구체적인 정보 전달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드로잉이나 안무에서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여기에는 어떠한 맥락도 결여되어 있기에, 퍼포머들의 드로잉과 목소리, 안무는 텅 빈 몸짓이 되어 공연장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Tracers>가 보여주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형식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각 퍼포머들을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우리 뇌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에 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것도 타당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와 같은 공연의 형식에 대한 부분이 아니다. 이처럼 텅 빈 몸짓들 속에서 불가사의하게도 의미가 축적되고 전달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비고, <Tracers>, 퍼폼플레이스, 2018

아마도 그 의미와 전달 양상은 4회의 공연에서 모두 다르게 빚어졌을 것이다. 즉흥성에 기반을 둔 공연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불현듯 시적인 순간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선연한 몸짓과 언어들은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문장들 속에서 태어나기에 관객의 뇌리에 보다 깊숙하게 자리 잡는다. 이렇게 우연으로부터 태어나는 시적인 순간에 포획되는 경험, 텅 빈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의미가 태어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Tracers>의 독특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침묵에 우호적인 비선형성을 곡선에 소란스러운 문장을”이라는 문장을 떠올려보자.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 문장은 서로 엇나가는 어휘들의 조합 속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비춰본다면, 각 관객의 이해와 감상은 사실 오해에 가깝다. 명확한 맥락이나 코드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파편화된 기표들을 개별적인 청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첨가하여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렇게 표현해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Tracers>는 밤의 숲속을 걷는 일과 유사하다. 검은 방 속에서 관객들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 같은 흰 선을 쫓으며, 찢긴 문장들과 함께 부유하는 이 세계의 원주민을 목격한다. 어떠한 언어도 통하지 않으며 어떠한 상식도 통용되지 않는 가운데 오직 ‘접촉’만이 내가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절박한 순간 속에서, 우리는 이 세계의 형식 자체를 고민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어떠한 정보도 서로 주고받지 못했지만, 분명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손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어렴풋한 느낌을.

공연이 끝나고서 바닥에 간헐적으로 번져 있던 자국들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안무가의 땀이었거나 누군가의 발자국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다가 문득 사냥꾼에게 잡히자 눈물로 번져 사라져버렸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 떠올랐다. 모든 퍼포머들이 퇴장하고 난 후여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는 의미를 쫓았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흔적 앞에 서있다. 흔적들만이 점층적으로 쌓여있다. 흔적들만이 자꾸만 번져나간다. 어렴풋한 느낌이 손끝에 남아있다.

비고, <Tracers>, 퍼폼플레이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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