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내_예술의 ‘힘’에 대하여 – 모리 미술관의 ‘Catastrophe and the Power of Art’ 감상 후 든 사념들

http://40.117.228.186/artist/pablo-picasso/buste-de-femme-1943

팔레스타인에 피카소의 그림을 걸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2011년, 피카소의 Buste de Femme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수도, 라말라의 International Academy of Art-Palestine 에 전시되었다. 작품 하나를 걸기 위해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보험이었다. 7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걸작을, 끊임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전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어떻게 운반할 것이며, 누가 그 필요성을 피력할 것인가? 어떠한 보험 회사도 이 부담을 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팔레스타인은 국가로 규정되지도 않기 때문에, 어떠한 상태도 아닌 그 땅에 세계적 걸작을 보내길 원하는 자는 없었다.

칼레드 후라니 Khaled Hourani는 이 작품을 팔레스타인으로 대여해오기 위해 개최한 기자회견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담았다. 그의 작업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언어이다. 피카소가 정치적 의제를 소재로 삼는 꽤 투쟁적이었던 화가였음은 잠시 내려둔 채, 그가 어떠한 조형 언어를 사용했고, 그것이 미술계에 얼마나 혁명적인 시각을 가져왔는 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팔레스타인으로 가져오는 것이 경제적 비용을 모두 넘어설 정도로 예술적이고 가치있는 일임을 역설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는다. 미술사 수업이 되어버린 기자회견에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흔들린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재앙을 주제로 한 기획전의 거대한 작품들 사이로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모리 미술관은 재앙을 주제로 <Catastrophe and the power of art> 라는 전시를 기획하고 관련 주제로 작업을 하는 작가군을 폭 넓게 선정했다. 여기서 재앙이라는 단어의 기획은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부터 911 테러와 그로 인해 촉발된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 IS의 무차별적 테러 등 현재에 여전히 지속되는 ‘전쟁’이라는 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 일본이라는 장소성은 몇 가지 메타포를 아주 쉽게 덧씌운다. 동일본 대지진, 방사능 누출, 원자폭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얘기하려 하지 않는 것들.

모리미술관은 일본 도쿄, 롯폰기 힐즈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는 도쿄에서 야경 명소로 제일 유명한 전망대가 자리하고, 사방이 트인 전면 유리를 통해 도쿄 시내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다. 도쿄에는 꽤 많은 모리 빌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리 빌딩 전망대에서 또 다른 모리 빌딩들을 볼 수 있다. 부동산 재벌인 모리 다이키치로 이름의 제일 첫 알파벳 M이 건물의 꼭대기에서 붉게 빛나며 그 존재감과 재력을 과시한다.

전망대라는 공간은 도시를 내 발 밑으로 관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가 속한 삶에서 한 발 물러나서, 저 공간은 나와 아무 관련 없다는 양, 빽빽하고 짜임새있게 발밑으로 들어찬 풍경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공간이다. 그 풍경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장엄한 파노라마씬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작은 경탄과 함께 전망대를 슬슬 지나며 바로 옆에 있는 미술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재앙 그리고 예술의 힘’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발 밑으로 들어찬 세계를 적당히 모른 척 하자 말하면서, 왜 아무것도 관심이 없냐고 서로를 꾸짖는다.

전시의 제목은 야심차게도 The Power of Art 에 대해 말한다. The Power of Art 예술의 힘. 그러나 미술이 주요 대재앙들을 어떻게 다루는 지에 대해 전시하고자 한다는 야심찬 기획이 무색하게도, 작품들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지도 않는 채 그저 산발적으로 널브러져 있다. 어떤 작품은 재앙을 재현하고(이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토마스 허쉬혼의 신작은 알수없는 재앙으로 파괴된 건물의 벽을 종이박스로 재현한다.) 어떤 작품은 재앙의 순간을 포착한다.(Sheba Chhachhi는 인도에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신부 지참금 문제로 인해 딸을 잃은 여성들의 시위를 사진으로 포착한다) 어떤 작품은 재앙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조합하고, 또다른 작품은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치유를 시도한다.(Miyajima Tatsuo의 스테이트먼트에는 어둠 속에서 다른 속도로 점멸되는 LED 조명을 통해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쓰여있다.) 모든 작품을 느슨하게 묶어주는 하나의 공통점은 어떤 작품도 실제적인 예술의 효용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 지점을 교묘하게 피한다. 거대한 당위 앞에서 적당히 세계를 모른척 하자 말한다.

우리는 틈만 나면 세계의 파국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폭풍이 결국 나를 집어삼킬 것을 빤히 알면서도 반대편으로 냅다 뛰어서 그 순간을 모면코자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파국의 잔해 위해서 또다시 도래할 파국에 대해 떠들어대며 허무주의를 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미술관의 기획은 예술로 세계를 치유할 수 있고,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와 같은 순진한 믿음에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전시된 작품들이 취하는 약간의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태도는 충분히 그 의도를 뒤집어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나는 어떤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Power는 아마 모리 미술관에서 기획한 ‘힘’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힘’이라는 야망 넘치는 제목을 보았을 때, 그리고 화이트 큐브에 펼쳐진 조악하지만 시끄러운 아우성들을 보았을 때, 효능과는 다른 뜻의 ‘힘’에 대해서는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블랑쇼는 ‘재난의 글쓰기’라는 글에서 재난의 시간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아포칼립스는 비록 도래하지 않았을 지라도, “이미 발생한 것”’ 이라고 했다. 그는 재난에는 규정된 시간도 공간도 없으며, 오직 글쓰기만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척도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자들은 그러한 죽음이라는 수동성에 내맡겨진 채로 계속해서 소멸하면서도, 계속하여 글을 써내려간다. 그는 초인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에 내 몰려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고통에 짓이겨져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는 예술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힘’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재앙의 끝에서 어느 시간대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재앙의 실체를 써내려 가는 힘. 그 힘은 결과론적인 실질적 힘, 즉 예술의 ‘효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파국 속에서, 끊임없이 위협받으며 예술의 힘을 말하는 것, 쓰는 것, 표현하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과거의 재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위협받고 있는 현재에 대해 말하는 힘이다. ‘힘’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 도래하느냐 하지 않느냐, 예술이 그것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느냐와 같은 질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www.mori.art.museum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의 한 등대가 무너져내렸다. 카토 츠바사는 봉사차 후쿠시마에 방문했다가 한때 지역의 명물이었던 그 잔해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등대가 있던 위치에 새 등대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은 가짜 등대이다. 그는 행정가가 아니고 예술가이기 때문이었다. 등대는 겉은 모두 얇은 나무 판자로 만들어져 있고 속은 텅 비어있다. 500명의 주민들이 모여 누워있는 판자의 끝마다 밧줄을 달아 구령에 맞추어 줄을 잡아 당긴다. 예술의 ‘힘’이란,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잔해 위에서, 내가 세우는 것이 부서져 버린 그 등대가 아니라 그저 껍데기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은 온 힘을 다하여 나무 등대를 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힘이다. 어수룩한 등대는 겨우겨우 일으켜 세워지고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곧 철거될 가짜 등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훔친다.

진짜 등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새 등대를 세우더라도 그것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며 나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속이 빈 가짜 등대를 세우기 위해 흘리는 땀의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계속 나아가야 할 의무를 남긴다. 블랑쇼는 재앙의 진정한 재현은 불가능하다고 말함과 동시에 진정한 재앙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의 한 벽에는 결국 피카소의 작품이 걸릴 수 있었다. Hourani는 후에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실 피카소 그림보다 우리에겐 먼저 필요했던 것은 정상적인 국가상태였지요. 하지만 우리가 국가상태였다면, 피카소의 그림은 필요없었을 거에요.” 예술의 결과물은 때로는 잔인한 현실의 반영만을 수행한다. 또는 우리의 냉소를 가속화하고 파국에 대한 분노를 촉발 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계속해서 꼼지락댄다. 힘은 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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