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_Kob. (찌질의 즐거운 기록)

나는 그 애의 젠틀함이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 그 모든 것이 특별하다 느끼진 않았지만, 동시에 이 정도 담백한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따뜻함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늘어진 모습으로 함께한 아침과 진한 커피, 고등학생 때의 만우절 해프닝 등, 그 모든 소소한 것들이 그 애와의 섹스를 더 즐겁게 만들었다. 첫날의 섹스보다 덜 진해서 좋았고, 그 애의 눈이 아침에 더 푸르러서 좋았다. ‘사랑해’라는 말이 금기라는 사실 외에 모든 것이 좋았다. 함께 누워있으면, 사랑하진 않으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순간의 감정과 온도만큼은 잠시의 거짓말 정돈 눈감아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하루 지나 먼저 연락이 와서 좋았고 할 말만 끝내고 떠나지 않아 예뻤다. 장문의 답에 하루가 지나는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어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쉬웠으나 아쉽지 않았다. 떨어지면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 절절함을 표현하던 아티스트처럼 안고 있었던, 졸려 하는 내 모습을 사랑스러워 해줬던 그 짧은 시간의 기억들로 당분간은 기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바람과 네이비색이 검정으로 향하는 길 아래 반짝이던 전봇대 등, 가벼운 코트로 충분했던 그 날씨에 듣던 그 바다 같은 노래가 너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애가 나간 집 밖에서는 청량한 소리가 쏟아졌다. 상쾌한 공기와 소리와 그 애 냄새가 섞여 있는 방에서, 나는 그 애의 회색 맨투맨만 입은 채 주방에 갔다가, 벽에 걸려있는 사진도 봤다가 먹을 것도 찾다가 걔를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Pasteboard – Flipper

Matsubara Miki – Stay with me

이 관계가 끝이 나든 계속 가든 시간이 지나 내 마음이 새로운 색으로 물들면, 저 노래들 들을 때마다 초가을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다홍빛 설렘 떠올리겠지. 그 집으로 가던 길, 바람과 공기와 오늘도 부서질 듯이 꼭 안아주겠지 기대하던 나를.

대화가 통해서, 혹은 통하지 않아서, 궁금했고, 궁금하지 않았다.

영어라서 다행이었다. 말이 완벽히 통했더라면, 벌써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았던 부분.

눈이 예쁘다. 시선을 절대 떨어트리지 않는다.

끝까지, 바라본다.

그래서 나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있는 잠시에 찾아오는 외로움엔, 절대 믿지 않는, 믿지 않으려 하는 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너에 대해서 생각했었어. 너와 나 사이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다고 느꼈어. 알몸으로 듣는 말엔 한껏 거만해져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차가워지는 베를린의 밤 아래서 덮은 이불이 충분하지 않을 때면, 그 말이 다시금 빙빙 돌았다. 먹여주던 요거트와 화장실 아담한 거울 속 우리 둘의 모습과 함께.

완벽해. 이제 나갈까?

좋아.

Osloer로 가는 방향이 더 빨리 오면 그걸 탈 거야. 차라리 그게 일 분 뒤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친구라는 선택지는 정녕 없는 건가 생각했다. 같이 있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은 아마도 베를린에서 마지막 햇빛일 거야. 마지막 20도일지도 모르지. 열한 시로 가는 바람은 그저 좋고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러니까 갈래. 지하철이 너무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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