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산_기억의 과잉, 역사의 과소, 아디오스 프루스트: 프루스트적 시간론에 대한 비판적 시좌

“우리는 기억 속에서 무엇이건 다 찾아내게 마련이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 화학 실험실 같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위험한 독약이 잡힌다.”1)

1. 들어가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의 자전적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소설의 화자 마르셀이 불현듯 찾아온 과거를 대면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냄새를 통해 과거가 효과적이고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현상을 가리켜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 프루스트적 기억(Proustian Memory)’이라는 개념을 다듬어 낼 만큼- 과거, 재현, 회상, 기억을 다루는 특정한 형식을 구현하며 많은 독자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2)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3)

그리고 이러한 회상 장면의 묘사로 대표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리가 시간성을 상상하는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적어도 기억에 대한 특정한 서사화 방식에 대표적인 모델을 제공하였다.4) 구체적이고 유일무이한 대상을 통해 현현하는 기억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 mémoire involontaire)이라 명명했고, 이를 과거의 본질로 파악한 바 있다.5) 이에 따르면, 의식을 통해 가닿을 수 있는 곳은 다만 표면적인 기억일 뿐이며, 일순간 현재로부터 과거를 이어내는 일- 즉 기억을 회복하는 일은 의식의 범주로 포섭될 수 없는 인간의 동물적 신체에 각인된 특별한 물질적 작용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6)

이러한 프루스트의 과거 재현의 모델은 삭막하게 지속되어온 현재의 시간에 순간적인 균열을 내는 계기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하며, 그러한 작용에 촉매가 되는 우발적인 ‘사건’을 암시한다는 측면에서 경험과 기억의 관계에 대한 일말의 진리계기를 지니고 있다. 요컨대 기억과 경험이 역사와 맺는 관계와, 정지의 시간성을 평생의 작업주제로 삼았던 벤야민이 프루스트가 그려 내보이는 시간성에 매혹되어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 몰락하는 부르주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삶의 행복을 잊은 채 살아가던 중년의 마르셸이 마들렌의 향이라는 찰나의 우연한 계기를 통해 황홀했던 유년시절의 전체를 상기하게 되는 서사와, 그 속에서 시간의 그러한 단락을 만들어낸 기제가 사소하지만 유일무이한 물질적인 대상(마들렌)이었다는 사실은- 경험의 구원, 역사의 구원, 과거와 현재의 조우 혹은 통일, 굳어진 체계의 단절 등 벤야민의 근본적인 관심과 조응한다. 그런 점에서 프루스트식 모델이 곧 벤야민적 시각에서 지배자의 역사에 대한 비판, 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계기를 지니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헤아려봄직하다.7)

허나 반대로 우리는 물화된 기억의 모델의 원사가 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프루스트를 떠올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그가 구술사와 엮여 논의될 때, 우리는 이러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파울라 해밀턴(Paula Hamilton)은 구술사와 감각의 관계에 주목하며, ‘프루스트 효과’라는 주제로 이를 엮어낸 바 있는데, 그 핵심은 회상, 회고에 따른 구술 증언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는 ‘구술사’에서 청각, 시각, 촉각, 미각, 후각으로 대표되는 오감이 갖는 위상을 주장하고, 감각이 경험의 본질을 고려함에 있어 얼마나 결정적인 인자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쓴다.

“학자들은 감각을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주장 해 왔다.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관계처럼 인간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경험의 본질, 나아가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살며, 공간을 통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감각의 역사는 탐구의 “장”이 아니라, 과거에 대해 사유하는 습관이었고, “과거에 더 맞춰지게 되는 어떤 방식”이었다. 우리가 감각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잠재의식적 역사들”을 접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것들에서 제기된 과정과 내용을 재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전 인터뷰들의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게 해준다.”9)

공교롭게도 구술사를 바탕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현재의 독특한 유행의 이러한 내적 귀결은, 반성의 대상이자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정치적 사건 및 제도적 총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감각 단위 및 일기장과 같은 개인적인 사료들을 통해 역사 전체를 충분히 재현하고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문화사, 미시사, 일상사로 이어지는 역사학 내부의 전환과 공명하며, ‘프루스트 효과’로서 호명됨으로써 심리학적 근거를 얻는다. 이때 프루스트 식의 기억론이 역사학의 특정 방법론과 엮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이 신경생리학적 수준에서 논해질 수 있을 만큼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 범람하고 있는- 심리적 주체의 감각지각을 매개되지 않은 것, 투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주장들의 정제된 표현이며, 기억의 과잉에 조응하는 역사의 과소의 부분이자 그 형식이다. 여기서 역사는 과거의 사건 혹은 그 삽화적 나열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산출하는 매개로서, 일종의 구조화된 시간대, 체계의 시간대를 가리킨다.10) 즉 매개된 층위의 문제를 개별자들 간의 순수한 폭력으로 간주하곤 하는 당사자성의 실체화 및 운동에서의 명목론, 20세기의 투사 모델과 같은 대문자 주체에 대한 냉소, 정치적 좌우 구분의 무력화 등 우리가 직면한 정치의 한계들은 전체에 맞서 부분을 실체화시키고 기억을 역사와 등치시키거나 대립시키는 프루스트주의의 다양한 현상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허나 자본주의의 역사, 근대 사회 및 국가의 역사는 냄새를 풍기지 않으며, 마들렌과 같은 단일한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체계’이다. 우리는 그러한 체계는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나는 이 글에서 프루스트의 기억론을 물화된 기억의 준거가 되는 징후적 대상으로서 조명하고, 헤겔과 그 외 실재적 매개의 문제를 사고한 논자들을 참조함으로써 그것이 놓치고 있는 기억과 경험의 위상을 논하고자 한다.

2. 물화된 기억의 전형으로서의 프루스트

우선,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바, 프루스트가 과거를 상상하기 위해 동원하는 대상은 기억과 경험이며, 이때 기억과 경험은 비의식적인 감각지각의 수준에 제한되는 특정한 사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독립적인 대상이다. 이는 물화 및 공간화된 시간의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게오르그 루카치는 베버의 ‘합리화(rationalization; Rationalisierung)’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을 철학적 개념으로 다듬어내며, 본래 사회적이며 따라서 가변적이었던 것이 고정적이고 단일한, 정태적인 것으로서 현현하고 또 그렇게 전화(transformation)하는 것을 ‘사물화(reification; Verdinglichung)’의 과정으로 파악한 바 있다.11) 그에 따르면, 이때 본래 객체였던 사회는 주체가 되고, 이를 구성해낸 주체는 객체가 됨으로써 예속 관계의 역전이 발생한다.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뒤바뀌는 이러한 ‘주-객전도’의 모티프는 헤겔에게서 일찍이 ‘주-객동일성’의 모티프로서 근대 국가의 체계 속에서 조명되며 동료 시민의 인정을 받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본질적 자유’의 획득 과정으로 파악되었으나12), 초기 마르크스에게 소외론 및 물신주의 개념의 근간으로서 부정적으로 파악된 이후, 루카치에게 ‘사물화’로서 파악되었고- 아도르노에게 이르러 ‘교환원리’와 ‘동일화 사고’로서 정립된 바 있다. 이러한 전통을 염두에 두고 말하건대, 기 드보르가 지적한 경험이 스펙터클화13)하는 현상과, 손택이 지적한 서사가 이미지화14)하는 현상의 원사는 바로 이러한 ‘주-객전도’의 모티프, 그 중에서도 ‘물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징후로서 시간이 점차 공간화 되어가는 경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의 용례에서 그러한 경향은 패스티시(pastiche)와 관련된다. 그는 세계화에 따른 포스트모더니티의 자장 속에서 변화된 예술작품의 경향을 패스티시라 호명하고, 이때 작품의 형식은 고흐의 구두가 그랬듯 더 이상 작가의 내면 혹은 작품 바깥의 현실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워홀의 구두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표면에 머무르며, 과거의 양식 자체의 차용을 내용으로 가진다고 지적한다.15) 이는 “안과 밖의 해석학적 모델” 및 다음과 같은 심층모델- “본질과 현상에 대한 변증법적 모델”, “잠복(latent)과 현시(manifest) 혹은 억압에 관한 프로이트적 모델”, “진정성과 비진정성에 관한 실존주의적 모델”, “기표와 기의 사이의 기호학적 대립”16)을 폐기하는 시대적 흐름에 조응하며, 미래의 다른 시간성을 창안해낼 것을 주창함으로써 가능했던 모더니즘적인 ‘스타일의 갱신’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든다.17) 미래로 열린 시간대 속에서 과거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규정될 때, 스타일의 갱신은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비판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으며 시간은 오브제로 전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상품경제의 세계화와, 포스트 냉전체제가 과잉결정된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 외부에 대한 상상적 시간성은 붕괴되고 과거는 즉자적 재료가 되어 특정한 맥락에 관계없이 가용한 오브제로서 물화된다. 갱신되기 전까지는 세계에 대해 반복가능한 해석학이 될 수 있었던 양식(style)은 그 순간순간에 조립되었다 이내 사라질 일시성, 일회성, 우발성, 단독성을 지니는 ‘전략’으로 대체된다.18) 이런 조건 속에서 제임슨에게 시간이 공간화(물화)되는 현상은 가능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과거의 시간 자체를 일시적인 표면으로 환원하는 과정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용례에서 이러한 공간화된 시간으로의 전환이 생산양식의 여러 부분들에서 나타나는 (헤겔적 의미에서 실체화된)단독적 형식들을 동반하는 한- 분절되고 물화된 시간성의 영향은 비단 문화생산물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며, 정치의 영역에선 전통적인 당의 모델을 대체한 네트워크형 조직 모델의 득세, 경제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건재한 포드주의적 산업생산물의 존재를 망각하게 하는 파생상품의 득세, 철학적 에토스의 수준에선 보편성을 대체한 특수론의 득세(혹은 실재론을 대체한 명목론의 득세)로부터도 감지될 수 있다. 이때 이들은 (가령 네트워크형 조직 모델은 경제로부터, 파생상품은 제조업으로부터, 명목론은 사회로부터) 여타의 사회적 심급(혹은 사회적 총체성)들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가정된다. 유일무이한 것으로 가정되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기억에 도달하는 프루스트주의가 역사로부터의 자율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프루스트주의는 공간화된 시간의 일종으로서, 포스트모더니티에 특징적인 시간-경험-기억의 양식이기도하다.

이보다 추상적인 수준의 다른 논의들로부터 시간이 물화하는 현상을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베르그송은 공간은 양적, 분절적, 병렬적인 반면 시간은 질적, 통합적, 연속적 계기를 지니기에, 시간과 공간이 명백히 다른 성질을 갖는다는 점을 역설하며, 따라서 공간적 표상을 시간으로 전치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19) 그에 따르면 공간상의 점으로 추상화된 운동은 시간의 진정한 성질인 지속(durée)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며, 곧 생성으로서의 변화와 질적 다양체들이 갖는 질적 강도, 전체에 대한 파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한편 들뢰즈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베르그송의 논의를 전유하여, 공간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머무르는 것과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일을 구분하고 후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20) 이는 들뢰즈의 기획이라 할법한 표상, 재현, 체계, 동일성에 대한 비판 및 이로부터 따라 나오는 선험적 주체에 대한 비판 등과 맞닿는 주장으로서,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와 생성의 반복을 논하기 위해 (양적으로)공간화된 시간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을 전거로 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다소 추상적이며, 내가 곧 이어 설명할- ‘체계, 동일성, 총체성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론을 차치한다면, 우리는 상기한 논의들을 하나의 오브제로서 공간화된 시간, 즉 프루스트적 시간을 비판적으로 독해할 준거로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이는 들뢰즈가 『프루스트의 기호들』을 집필했던 맥락과 무관하다). 허나 물화 자체는 하나의 징후, 혹은 현상을 명명하는 것이기에 그 스스로 유효한 비판을 완성해낼 수 없다. 관건이 되는 것은 이러한 물화의 형식이 시간성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내용을 갖는지를 규명하는 것인데, 이때 문제는 이러한 물화된 시간은 시간의 매개된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며, 따라서 경험의 매개된 차원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프루스트적 시간의 한계가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경험의 다른 측면에 대해 논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기억과 경험이 또한 단일한 오브제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기억과 경험은 비의식적(비자발적)이지만 또한 의식적 수준의 장치들에 규정되고, 개인적이지만 또한 집단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존재와 인식이 일치하게 되는 차원의 경험이 존재하며, 이는 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존재의 상상적 조건이자 인과의 회로인 동시에 존재를 규정하는 일차적인 작인으로서 실체를 지니는 것이다. 사실 사회 속에서 경험의 본질적인 형상은 바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마치 의식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수준에 자리한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경험은 매개된다. 매개된 경험 속에서 기억은 굴절된 방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험과 기억이 허위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경험을 산출하는 체계의 작동원리가 경험에 대해 선차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적 시간은 기억과 경험, 과거를 단일한 오브제로 실체화시킴으로써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매개된 경험의 층위를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다. 벤야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때 역사의 구원은 이뤄지지 않으며, 기억은 역사 혹은 동일성에 맞서 실체화됨으로써 외려 추상적으로 이해된다.21)

3. 매개된 경험형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프루스트적 기억 모델은 곧 사회적 실재로부터 무매개적인, 투명한 경험을 전제함으로써 으레 표상 및 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준거로서 활용된다. 그런 점에서 개별적인 것들, 차이와 다양성, 질적 계기 등을 억압하는 체계에 맞서 개인의 경험을 실체화시키는 경향을 우리는 프루스트적 충동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체계가 현존하는 한 그것을 관념적, 상징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인 충동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동일성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기표에 머무는 공허한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지시대상 혹은 실재의 수준에 자리하는 현실의 동일성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하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국가와 화폐에 대한 비판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22) 그것이야말로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을 통해 주-객이 일치하는 계기로서 ‘현실성(actuality; Wirklichkeit)’을 갖는 구체적 보편인바, 비판이 상대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현실적인 것(구체적 보편)이며, 실천이 만들어야 할 것 또한 현실적인 것이다. 현실적인 경험을 규정하는 1차적인 작인이 되는 곳, 경험의 구제를 위해 전장이 되어야 할 곳, 즉 파괴함과 동시에 수립해야 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 곧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프루스트적 문제설정이 지닌 긍정적 계기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우회해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장치 및 국가권력과 구별되는 실재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에 관해 논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억압적) 국가장치의 통일은 집권계급의 계급투쟁 정치학을 실행하는 집권계급 대표들의 지도하에서 통일, 집중된 한 조직에 의해 보장되는 반면, 각기 다른 ISA(Ideological State Apparatus)의 통일은 지배 이데올로기, 즉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대개 모순적인 형태로 보장된다.”

이는 “억압적 국가장치가 제공한 ‘엄폐물’ 뒤에서 정확히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일반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23) 즉 억압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ISA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장소로서, 누군가 이곳을 “유리한 전투 진지로서” 삼는다면 그는 이로부터 “자기표현의 수단과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24) 이 지점에서 ISA는 헤겔이 논한 인륜성의 구체적 형태 및 그 속에서 개인이 사회적 자유를 부여받는 근대적 제도들과 유사하다. 알튀세르가 논한 ISA의 실례들은 “교육기구, 종교기구, 가족기구, 정치기구, 노동조합기구, 커뮤니케이션기구, ‘문화’기구”25) 등이며, 경험의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계기를 지닌다. 즉 그것은 제도, 관습, 의례 등 장치의 배치와 그 실행들이 만들어 내는 비의식적 공간이자 실천으로서, 이에 따르면 ISA는 이데올로기 즉 각 개인이 그들을 둘러싼 실재의 존재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가 상연되는 장소이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는 수단이자 구체적인 존재를 가진 “전역사적 실재”26)로서 간주하였으나, 생산관계의 재생산 공간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해 그 양태가 결정되는 곳으로 조명함으로써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에 매개되어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계급적 사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배계급과 피착취계급을 마주 놓는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생산관계의 재생산 실현의 총체적 과정이 이러한 계급투쟁의 관점을 채택하지 않는 한 여전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재생산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은 최종심급에서 계급투쟁의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되는 것은 ISA의 설치를 통해서이다. ISA내에서 이 이데올로기가 실현되고 또 스스로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치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건 무척이나 모질고 간단없는 계급투쟁의 목표이다.”27)

알튀세르의 국가 장치에 대한 분석이 시사하는 바,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사유하고 행위하는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 자체가 경험의 회로를 이미 산출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굴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나는 여기서 물신주의를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간주하는 지젝의 용례를 따르고 있다).28) 요컨대 아무도 화폐의 본질에 관해 묻지 않고, 그에 관해 의식하지 않지만 누구나 화폐의 본질을 안다는 듯이 행동함으로써 화폐의 본질 및 매개된 경험은 매순간 거듭 관철된다. 이때 본질과 경험은 보편적이며, 동시에 대상적이다. 그것은 전일적인 관점과 투명성을 결코 담보 받을 수 없다.29) 물질적인 사유형식으로서의 관습, 의례 등을 포함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대상적 장치를 경유하여 정교화 되기에 일차적으로 실재이며, 곧 주체의 조건이 된다.30) 근대 국가, 근대 사회의 발명 이후 경험은 더욱 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유인즉 그때 ‘사회’란 곧 총체적 매개(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개의 개체들이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통합되고 분리되며, 그들의 행위와 관념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규정하는 심급이 바로 사회라는 총체라는 것이다. 일찍이 헤겔이 “제 2의 자연”31)으로서 사회를 규정했을 때, 혹은 뒤르켐이 자살을 사회적 수준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간주했을 때, 이들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적 사회학이 사회가 지니는 이러한 전체의 규정성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총체성과 보편성의 객관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며, 변증법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사회가 “단순한 개인들의 덩어리가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매개된, 그리고 매개하는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뭐라 부르고 싶어 하든, 그것은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며, 개인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자율적인 무언가도 아니다. 사회는 항상 이 양자의 계기들을 동시에 포함한다. 그것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서 오직 개인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개인들로 축소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변증법적인데 (…)왜냐하면-한편엔 개인과 다른 한편엔 사회라는-이 두 대립하는 범주들 사이에 매개에 대한 개념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32)

사회의 이러한 이념적인 계기는 자크 동즐로를 경유하여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즐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수립된 공화국체제가 열어 놓은 정치적 대표성의 딜레마에 주목하며, 그러한 공화국의 내적 논리가 인민 혹은 시민으로 재현되지 않는 계급에 의한 항상적인 봉기의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33), 그와 함께 심화되어온 자본주의적 생산이 야기한- 광범한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정치적 장에서 적극적으로 재현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혁명은 국가로 하여금 사회라는 대상을 발명하도록 강제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발명된 사회는 보장 보험을 통해 물질화된 시민간의 경제적 연대를 자신의 내용으로 갖는다. 이때

“사회는 더 이상 [이런저런 제도들과 개인들의]그러한 집합의 결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형태로부터 출발해서 사회는 인구 증가와 인적, 물적 교류의 확대의 영향 하에서, 업무의 분화 원리와 구성의 복잡화 원리를 따라 진화했기 때문”이며34), 이 속에서 “보장 보험 방법에 의해 국가는 생산의 구조들이 사회 계급들에게 그들이 서로 불가피하게 대립한다고 믿도록 만들려 하는 바로 그곳에서조차 개인 간에, 그리고 사회 계급 간에 연방적 관계-이것은 모든 이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다-를 통용시킨다.”35)

그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마찬가지로 이러한 ‘객관적인 총체성’을 지니는 대상은 상품이다. 아도르노는 올바르게도, 근대 이후 가장 강력한 분리와 통합의 기제가 되는 것의 한편에는 ‘사회’가, 다른 한편에는 ‘교환원리’가 있음을 지적한다. 아도르노의 용례에서 교환원리는 전(全)역사적 시장에 조응하는 개념이 아니라, 상품형식이 관철되는- 등가교환의 장소로서의 역사적인 자본주의의 논리형식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근대 사회의 총체성이란 곧 생산양식의 총체성에 1차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사회란 그 ‘사회화된’ 형식에 있어서, (…)단지 사회화된 인간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 근본적인 전제조건으로서의 교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회를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만드는 것, 개념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교환관계이며, 이는 이러한 종류의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결합시킨다. (…) 여기서 추상의 요소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 되어있다는 시시한 관측에 만족하는 관념이 아니다. (…) 우리가 고려하는 추상은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련된다고 진술하는 사회에 대한 다소 얄팍한 정의를 제공하는 사회 이론가의 머리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은 실로 교환과정 자체의 구체적인 형식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조직화가 처음으로 일어나는 근원적인 사회적 사실이다. (…) 따라서, 추상은 사회학자의 추상화시키는 사고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 있다. (…)‘개념’과 같은 무언가는 사회에 그 객관적인 형식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36)

앞서 살펴본 바, 우리는 사회적 매개가, 전체를 구성하며 그 외부가 없다는 의미에서 ‘총체적’이며, 이것은 객관적이라는 점을, 따라서 그 모순을 관념적으로 지양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삶을 심층에서부터 주재하는 생산양식과, 그 규정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총체성의 계기로서의 보편성과 그 객관성이란 바로 이러한 측면을 일컫는다.37) 따라서 오늘날 주체의 매개가 유례없이 심화되고 있다고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점차 분화되며 전지구적 경제 질서가 고도로 발달된 정보통신 기술과 유통체계를 통해 더 없이 촘촘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 체계의 회로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며, 이는 사적 자유의 확대가 공적 자유의 축소를 동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이 금지를 명하는 아버지의 형상이 희미해져가는 현상을 지시하는 ‘포스트 오이디푸스’라는 개념을 통해 암시하듯, 억압이 자유의 외양을 취함으로써 누구도 이데올로기적 매개를 사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방부 처리된 프랑스산 마들렌 세트를 해외직구로 구매하고 지구반대편을 여행하며 SNS를 통해 일상을 중개할 자유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의 상품 생산 및 유통을 실질적으로 거부할 자유는 없는 것이다. 체계는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강력하게 운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체계의 시간성 즉 역사는 우리가 그것이 멈췄다고 간주하는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에 맞서 기억과 경험을 실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매개된 경험에 머무르며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헤겔식 용법을 통해 표현하자면, 그것이 지배의 보편성에 맞서는 보편적 이성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전체를 파악하는 이성 속에서 비로소 사태의 본질과 그에 대한 우리의 개입-실천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성에 맞서는 것은 특수성을 전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소여의 보편성과 공모하지 않는 구성적 보편성을 물질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거대서사와 소서사 등 잘못 설정된 대립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요컨대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이길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이 암시하는 것처럼, 거대서사는 기존의 거대서사를 상대하는 대항적 거대서사의 실현을 통해서 지양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총체성의 객관성을 인정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가 다시 헤겔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다는 점은 필연이다. 필시 근대의 국가장치를 염두에 두고 제출되었을- 주관적 차원의 이기심이 객관적으로는 공공의 선에 기여하게 되는 현상을 적시하는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이 암시하듯, 그는 사회가 총체적이라는 것, 그것이 객관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경험의 매개된 차원을 사유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 들뢰즈, 리오타르, 푸코, 나아가 드보르, 벤야민 등에서까지 발견되는 역사에 관한 상상을 객관화시킴으로써 억압적인, 닫힌, 부정적인 체계로서의 역사론을 비판할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 비난의 도마에 오르곤 하는 역사는 대문자 역사로서 바로 소여의 총체성과 체계의 시간성을 의미한다. 허나 헤겔을 따라 말하자면, 문제는 역사가 또한 이성적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단순히 목적론적 의미에서 역사가 발전해왔다거나 가족-시민사회-국가로 이어지는 근대의 사회적 제도들의 역할을 낙관하는 진술이 아니라, 그러한 소여의 매개로서의 역사, 장기 지속되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의 역사란, 그것이 지니는 일련의 객관적인 체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한 이념 또는 추상을 자동적으로 실행시켜주며 일정한 방향과 목적을 준거로 하여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이성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차원에서 역사와 총체성은 소여의 것과 구성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즉 역사와 총체성은 새롭게 발명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총체성의 재구성을 위해서, 소여의 총체성을 비판하면서도 매개의 체계로부터 주의를 후퇴시키면 안 된다는 점이다.

르네 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1958, 캔버스에 우화, 61x50cm

4. 동일성과 보편성의 이중성

경험과 기억을 통한 저항적 실천의 가능성은 사실 보편성의 형식 자체에 있다. 즉 보편성은 그것이 생산양식의 계기로서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한, 특수자들을 가리고 규정하는 억압, 착취, 구속, 예속의 계기를 지니는 동시에 새로운 보편성과 그에 조응하는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이중성 및 체계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개념이 ‘모순’이라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으나, 오늘날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들은 진귀한 보석처럼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매개, 체계의 문제와 관련하여 차이를 실체화시키는 여러 논자들이 정확히 놓치고 있는 지점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나는 보편의 양가성에 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실례는 인권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1789년 8월 26일 재헌국민의회에 의해 선언된 인권은 보편적 정언명령과도 같이 전개되어 왔다. 이때 개별의 인간은 인간일반으로서 추상화되고, 질적 차이를 소거당한 채 동질화된다. 그러나 인권의 급진성은 그것이 취하는 동일성 및 보편성의 형식 자체로부터 연원한다. 이는 현실 속에서 인권위원회 등의 공식적인 관제 장치에서부터 크고 작은 모임의 정강과 강령, 규칙적 실천들에 이르는 여러 수준의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관철되며, 최소한 랑시에르가 지적했듯 현실적인 계쟁의 준거가 된다.38) 그에 맞서 인권의 예외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퇴행적인 시도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유인즉 인권이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느냐는 관념적 거부는 물질적 수준에서 실체로서 작동하는 인권의 보편적 형식을 무시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단순한 가상이나 허위의식으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39) 두 번째 예는 국민이다. 이는 우파 국수주의 및 제국주의 전쟁, 자민족중심주의와 결합된 배타적 인종주의와 포퓰리즘이 발현되곤 하는 반동적인 대상이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에 강력한 반 테제로 작용했던 민족해방 운동과 근대적 복지의 근간이 되는 사회보장의 대상이자 단위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단언컨대 국민이라는 보편성의 형식이 없는 보편적 복지란 불가능한데, 이는 자크 동즐로가 적절히 보여주었듯, 사회보장을 강제하고 집행하는 주체란 곧 국가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실례는 화폐이다. 화폐의 급진성 또한 그 추상성- 보다 정확히는 마르크스가 ‘일반적 등가물’이라 탁월하게 규정한 바 있는 그것의 보편적 형식으로부터 연원한다. 그에 따르면 개개의 재화가 지닌 특수한 질적 계기는 화폐를 통해 객관화되고 추상화되며, 곧 동일화 된다. 허나 그것은 양가적인 것으로서, ‘모든 견고한 것들을 대기 속으로 흩어지게 하는 급진성’을 통해 봉건적 예속관계를 일소시키고, 합리화된 교환에 힘입은 압도적인 생산성으로 이행의 물질적 조건들을 마련했던 것이 화폐의 힘이었음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때로 전 근대적인 인격적 지배에 맞서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옹호해야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보편의 형식들은 객관적이며, 따라서 그 성질은 악으로서 관념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객관적 측면에 존재하는 내재적인 지양의 계기를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역사에 대한 파악에도 중요한 준거로서 유념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제임슨의 주장은 대문자 역사에 대한 일면적 파악을 재고해야할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보편개념에 반대하는 투쟁은 이와 같이 문화적인 것이든 사법적인 것이든 헤게모니적 규범들 및 제도적 가치들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포스트모던한 입장은 보편개념이 불가피하게 규범적이라는 확신, 따라서 개인들 및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구속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달리 말해 보편개념은 본질이며,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언제나 모든 일탈을 가늠하면서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일탈자들을 식별하고 규탄하도록 해주는 어떤 규범을 단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규범을 고발하는 것은 정체성의 정치, 분리독립주의 단체의 정치, 주변부 문화나 억압된 문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격심한 정치적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극단에 이르면 헤게모니적 규범은 인종 청소의 이상들이나 집단학살의 실천들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규범의 모호성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문화적이거나 민족적인 단언은 제국주의, 표준화, 세계화 아래서의 민족국가의 자율성의 퇴보 등에 반대하는 저항을 구축할 수도 있다.40)

다시금 강조해도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는 식의 어설픈 회색의 입장 및 기회주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모순이 객관적이라는 사실, 따라서 새로운 역사와 보편성을 창안할 수 있는 계기는 보편의 형식 내에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점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모이쉬 포스톤은 다음과 같이 객관적 모순이 산출하는 비판적 계기를 정식화 한 바 있다.

“현대사회의 구조 혹은 근본적인 관계들이 모순적이라는 개념은 내재적인 역사적 비판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는데, 이는 역사적 비판으로 하여금 사회 형성에 대한 역사적이고 내적인 동학, 즉 이미 “존재하는(is)”것에 내재적인 실현가능한 “어떤 일(ought)”에 대해 그 자체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지점을 설명할 수 있게 하며, 그 비판의 관점으로서 역할 한다. 이러한 접근에 따르면, 사회적 모순은 내적인 역사적 동학과 사회적 비판의 존재 자체, 이 양자의 전제조건이다.”41)

이렇듯 언급한 바와 같이 체계로서의 사회에 대한 저항이 또한 사회 내부에서 그 탄생의 근거를 마련한다면, 기억과 경험은 역사에 맞서 실체화될 필요가 없으며, 보편성과 그 동일성을 성토할 근거로서 활용될 필요 또한 없다. 헤겔이 주관과 객관은 동일한 것의 양 측면이라는 주장으로, 혹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주장으로 암시했듯- 새로운 보편성은 이미 소여의 보편성의 한 계기이자,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억압적인 대문자 역사’의 반대편에 억눌려 왔던 개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두거나, 또는 동일화하는 이성의 반대편에 가려져왔던 유일무이한 감각적이고 현상학적인 체험을 둠으로써 그들을 실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려 양자의 위상차와 매개의 문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경험은 의식을 산출하는 장치들에 본질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며, 그런 한에서 사회적 관계에 매개되어 있다. 비록 추상적인 형태이지만 헤겔이 경험은 감각지각의 수준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그것을 경험으로서 인식하고 규정하는 의식에 이미 매개되어 있음을 논증했을 때, 따라서 경험은 곧 의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경험의 매개된 측면이 객관적이라는 사실이었다.42) 우리가 실체화된, 자율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즉자적인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매개된 측면에 주목해야할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경험은 이미 소여의 실재에 매개되어 있는바, 마찬가지로 창안해야 할 것은 매개된 경험인 것이다. 이는 헤겔적 의미에서 주관이 객관과 통일을 이루는 장소로서의 인륜성(Sittlichkeit)과 조응하는, 문화를 건설할 필요에 대한 주장이다. 우리는 이제 긴 우회로를 거쳐 프루스트적 시간을 비판했던 이유에 도달하였다. 물론 우리는 헤겔 이상으로 나아가야하며, 마르크스 이후로 수많은 논자들이 보여주었듯 헤겔을 전유할 필요가 있다.43)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모순적 통일이라는 헤겔적 계기에 착안하여 역사의 구성 및 저항의 물질적 조건을 탐구하고, 헤겔을 실재적 수준에서 혁명적 재료로 사용하려 했던 루카치의 작업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문제의 방법론”에서 루카치의 1차적인 관심은 주관과 객관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정치의 장에서 변용, 반복하는 것이다. 헤겔이 주관과 객관 양자를 실체화 하지 않고, 양자의 구별에 머무르는 동시에 그들을 종합하려 하는 과정에서 매개의 문제를 사고했듯, 루카치 또한 ‘매개’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조직’에 주목한다. 그는 운동 내부의 “개인들의 결심이나 숙련이 성공이나 실패를 야기했다는 단순한 가정”으로서의 주관주의적 편향과 “사건이 추상적인 ‘필연성’에 따라 일어난다는 견해”로서의 객관주의적 편향 양자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며44), 지배에 대한 유효한 저항은 주관의 편에도 객관의 편에도, 즉 개인의 편에도 사태 자체로서의 대상의 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한다. 여기서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는 단위로서 도입되는 조직은 주관과 객관을 매개하는 단위가 된다.

“조직이야말로 이론과 실천 사이의 매개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변증법적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여기에서도 역시 변증법적 관계의 항들은 조직의 매개 속에서 그리고 조직의 매개를 통해서 비로소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한다.”45)

그에 따르면 조직은 개인(혹은 주관)들을 기반으로, 개인들을 통해 작동하지만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대상(혹은 객체)으로서, 여기서 주체들은 개인 간의 ‘특정한 의례 및 절차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실행하며, (별다른 주관적 결단 없이도)이미 객관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수행하고 산출하게 된다. 따라서 루카치에게 조직은 새로운 동일성이 작동하는 공간이 된다. 요컨대 그는 객관적 모순, 즉 객관적인 이행의 계기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다는 점을 승인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나, “공산당은 이러한 비약을 위한 의식적인 도움닫기에 대한 조직상의 형태이며, 이런 식으로 해서 자유의 왕국을 향한 최초의 의식적인 걸음이다.”46)라고 말하는데, 이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조직은 곧 의식’이라는 동일성인 셈이다. 실로, 실재로서의 객체(곧 생산양식과 사회)와 주체(개인)가 직접 대면하는 것은 위와 같은 동일성을 성립하지 못하기에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지도 못하며, 매개의 형식으로서 조직을 요구하는데, 이는 동일성과 보편을 상대하는 것이 곧 정치의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조직의 정치적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 시켜야 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나, 역사가 실로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의식의 수준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거로부터 현재 나아가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시간이고, 따라서 그것이 오브제로서 물화될 수 없으며, 분절적이고 삽화적인 계기들의 총체로서 이해될 수 없다면, 역사를 상대하는 것은 바로 조직과 체계가 전제하는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 속에서야말로 현실적으로 지양될 수 있음은 명백하다.47)

5. 맺음말

나는 여기서 프루스트에 대한 예술적 비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를 하나의 기억의 모델로서 조명해 보고자 했다. 매개의 선차성과 동일성과 보편성, 총체성의 이중성을 논구하는 과정에서 ‘프루스트적 시간’, ‘프루스트적 경험’, ‘프루스트적 과거 재현 모델’ 등의 표현으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감각 지각적 경험과 역사를 등치시키거나, 양자를 대립시키는 경향을 일컫기 위함이었다. 실로 시간을 감지함에 있어 경험과 기억을 그 자체로 논한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즉자적인 경험인바, 경험과 기억을 통해 역사에 유효하게 개입하기 위해서는 아직 전개되지 않은 직접성을 넘어 매개된 차원에 도달해야한다. 그것이야말로 프루스트의 마지막 책의 부제가 표현하듯, ‘되찾은 시간’으로서, 경험을 회복하는 길이다.

* 본 글은 전시 <역사적 이미지의 사후? 나의 공장형 마들렌>(2018. 8.9-8.13)에 선게재 되었으며, 2019년 1월 정치경제학 연구소 프닉스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갇힌 여인, 김창석 역, 국일미디어, 1998, p.526. 여기서 인용된 김창석 역의 국일미디어판은 1954년 플레이야드 판을 번역한 것이다. 1984년 플레이야드 판으로 번역중인 민음사 판과 팽귄 클래식 판은 각각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6권-게르망트 쪽 2』,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8-소돔과 고모라 2』이후 로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 새로 발견된 원고들과 수정사항들이 반영되었다는 84년 플레이야드 판본이 프루스트의 의도에 보다 충실하다는 것이 정론이나, 『되찾은 시간』의 몇 부분을 제외하면 원문의 내용 자체에는 양 판본이 전반 적으로 큰 차이가 없기에, 이 부분에서는 ‘갇힌 여인’을 포함하는 국내 완역본인 김창석 판을 인용한다.

2) 이는 이제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연구되곤 하는 독자적인 주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Chu, S & Downes, J. J, Odour-evoked autobiographical memories: Psychological investigations of Proustian phenomena. Chemical Senses, 25, 2000, pp.111-116; Chu, S & Downes, J. J, Proust nose best: Odours are better cues of autobiographical memory. Memory & Cognition, 30, 2002, pp.511-518; Marieke B. J. Toffolo, Monuque A. M. Smeets, and Marcel A. van den Hout, Proust revisited: Odours as triggers of aversive memories. Cognition And Emotion, 26(1), 2012, pp.83-92; Cretien van Campen, The Proust effect: The senses as doorways to lost memories(translated by J Ross),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3)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 2012, pp.90-91.

4) A. E. Bernstein, The contributions of Marcel Proust to psychoanalysis,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Psychoanalysis and Dynamic Psychiatry, 33(1), 2005, pp.137–148.

5) Paula Hamilton, The Proust Effect: Oral History and the Senses. The Oxford Handbook of Oral History, Edited by Donald A. Ritchi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219-232.

6)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p.85.

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김영룡, 망각과 회상: 1920년대 에리히 아우어바흐와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친화력 연구, 독일어문화권연구, Vol. 20, 2010; 발터 벤야민, 프루스트의 이미지,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최성만 역, 길, 2012.

8) Paula Hamilton, The Proust Effect: Oral History and the Senses. The Oxford Handbook of Oral History, Edited by Donald A. Ritchi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223 등에서 해밀턴은 신경지각적 수준에서 과거 의 감각의 방식과 현재의 감각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감각을 역사적인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 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당시의 감각 조건이 되는 상황과 맥락이 변한다는 수사에 머물 뿐, 감각을 전체로서의 역사 이해의 유효한 작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부당한 실체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덧붙여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의사소통 과정의 일부이자 기억의 행위로서 감각에 대한 모든 종류의 언급을 기대한다.”(p.223) “구술사에서 감각의 역할을 고려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과거의 관행에서 많 이 받아들여져 온 시각적 감각의 본질을 재고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감각은 인터뷰 대상자에 의해 전달되는 이야 기의 중심주제가 될 수도 있고, 행위에 대한 설명에 있어 원인이 될 수도 있다.”(p.224)

9) Ibid, pp.220-221.

10)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연구, 2018. 서론에 해당하는 “낌새채기로서의 비평”의 논의를 참 고하라. 여기서 서동진은 일부 비판적 역사가들에 의해 논의되곤 하는 ‘역사에서 기억으로의 전환’이 야기하는 효과 들을 추적하며, 그것이 결코 포착하지 못하는 역사의 차원에 주목해야 함을 역설한다. 한편 본 글은 서동진과의 세미 나 및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11) 게오르그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특히 제 4장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을 참고하라.

1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Frederick Neuhouser, Hegel’s Social Philosophy, The Cambridge companion to Hegel 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y, edited by Frederick C. Beis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프레더릭 바이저, 헤겔, 이신철 역, 도서출판 b, 2012. 특히 2,3,6장을 참고하 라. 전자의 작업에선 『엔치클로페디』, 『정신현상학』, 특히 『법철학』을 중심으로 헤겔의 사회론이 자세하게 검토되 며, 헤겔에게 있어 각각 ‘개인적 자유’, ‘도덕적 자유’, ‘사회적 자유’에 해당되는 자유의 세 단계의 성격과 그 위상학 적 관계들이 재고된다. 헤겔이 지닌 사회비판적 계기를 체계 내부에서의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고자하는 뉴하우저의 작업은 저항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동일성의 이중적 계기를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3) 특히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는 그의 언급을 참고하라. 기드로브, 스펙터클의 사회, 유재홍 역, 울력, 2014, p.13. 자본주의적 동일성 혹은 자본주의적 매개에 대한 비판을 이미지 비판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는 쟁점은 중요하나, 본 지면에서 다루지는 않기로 한다.

14)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역, 이후, 2004. “쉴새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프레임에 고정된 기억, 그것의 기본 적인 단위는 단 하나의 이미지이다.”(p.44)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 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 가슴이 미어질 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 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뭔가 다른 일을 수행한다.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pp.135-137)

15)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ke University Press, 1991. 특히 6장 “Utopianism After the End of Utopia”의 논의를 참고하라. 이 장에서 제임슨은 자신이 “공간적 전환 (spatial turn)”이라 부르는 경향을 (예를 들어 J.G. 발라드, 로버트 고버, 백남준, 데이비드 살레 등의 작업과 같이) 문학, 미술, 음악 등 전방위한 예술 부문들에서의 변화를 추적하며 예증해낸다. 요컨대 그는 유토피아적 전망(미래)의 상실에 잇단 “향수적 파토스”에 대해 역사의 가르침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총체적으로 전환된 생산양식을 구 성하는 하나의 항으로서 문화생산물들을 대질한 뒤, 이들이 모더니즘작품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지만 여전히 유토 피아적 충동을 물화하며 보존하고 있다는 점을 논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은 The Political Unconscious(1982); 정 치적 무의식(2015)에서 전개된 논지와 공유하는 지점이 크다. 한편 워홀과 고흐의 구두를 비교하며 소급적으로 포스 트모더니티를 규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1장 “The Cul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을 참고하라.

16)Fredric Jameson, Ibid, p.12, 1991, p.156.

17) 과감하게 정리하자면 예술의 인식론적 계기를 지우고 경험을 전면화하는 손택의 작업(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 한다, 이민아 역, 이후, 2002)이나 랑시에르의 작업(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역, 궁리, 2016)의 대두로부 터 해석학적 모델의 폐기를, 헤겔-마르크스-아도르노 등으로 이어지는 보편적 체계에 대한 논을 조소하는 실증주의 및 분석철학의 대두로부터 변증법적 모델의 폐기를,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대두로부터 프로이트적 모델의 폐기를, 진 정성의 상실과 속물의 대두로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에토스를 분석하는 김홍중의 작업(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 동네, 2009. 특히 1장 3절 이하를 참조하라.)으로부터 실존주의적 모델의 폐기를, 실재에 대한 도달가능성을 부정하 고 담론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식의 주장이 여전히 이론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으로부터 기호학적 대립 모델의 폐기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18)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여기서 제임슨은 역사의 붕괴를 반영하는 “과거나 미래가 없는 순수한 현재”라는 시간감을 표현하기 위해 “단독성(singular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징후적인 미학적 에토스로 독해한다. 프 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역, 문학과사회 117호, 2017; 박진철, 세계 없는 세계의 딜레마들, 망원 사회과학연구실 자료집, 2017.

19)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역, 아카넷. 2001. 제 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 지속의 관념”을 참조하라. 직관 및 자아에 (근대 과학에서 주로 관측되는)공간화된 시간과 구별되는 순수지속을 감지할 특권을 부여하는 베르그송의 논의는, 직관에서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통합할 계기를 발견하는 낭만주의자들 혹은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아를 실체화한 피히테의 주장과 논리적으로 조응하며, 그런 점에서 비판적으로 독해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한편 주객 분할과 시간의 공간화라는 현상이 근대를 기점으로 첨예하게 전개되어왔다는 점에서, 양자는 생산양식의 총체적인 변화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의 전환에 대한 각기 다른 철학적 반응들로서 독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역, 문학과지성사, 1996.

21) 사물화와 추상화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보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사고되는 것은 외려 사태의 외부에 머물며 피상적인 인상 이상의 규정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요컨대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환원주의적인 서사, 경험주의자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실증주의적 서사는 모두 추상적이다.

22) 그런 점에서 현실의 대상들 속에서 질적인 것들을 사상하여 이데아라는 추상에 도달하는 플라톤의 관념론을, 마찬가 지로 추상을 수행하는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의 성립에 따른 효과라 주장하며 철학 비판을 화폐 비판을 통해 수행 하는 장 조제프 구의 논의는 설득력 있는 실재적 체계(동일성)비판의 한 사례로서 참조할 만하다. Jean Joseph Goux, Symbolic Economies: After Marx and Freud,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 제 3장 “Monetary Economy and Idealist Philosophy”를 참고하라.

23)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이진수 역, 백의, 1997, p.155.

24) 같은 책, p.153.

25) 같은 책, p.156.

26) 같은 책, p.165.

27) 같은 책, pp.188-189.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제 간의 구별성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행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논자들의 평가는 과 도한데, 왜냐하면 그런 결론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디까지나 전체 생산양식과 매개되어 사고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28) 알튀세르에게 ISA가 전역사적 계기를 지녔다는 점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매개된 ISA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알튀세르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측면에 집중 하여 ISA를 논의했지만, ISA의 본질적인 정의상 그것은 생산영역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상품)물 신주의는 역사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간주될 수 있다.

29) 물론 다른 수준의 예를 들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구도 성차의 본질에 관해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자연스레 성별 구분된 근대적 화장실을 이용하며, 따라서 자신이 어떤 성별의 화장실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알고 있는 셈이다. 성차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제도 및 실천들 속에서 이미 비의식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30) 체계에 대한 냉소가 완벽하게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지점을 비판하며, 행동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체계 의)이념을 지적하고, 이런 측면에서 주-객동일성의 기제를 이데올로기의 특징으로 정렬시키는 지젝의 다음 작업을 참고하되, 영어판과 대조하며 읽을 것을 권한다.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새물결, 2013. 특히 1부 1장 을 참고하라.

31)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The Philosophy of History, trans by J.Sibree, Dover Publication, Mineola, New York, 2004, p.40, p.206; G. 헤겔, 역사철학강의, 권기철 역, 동서문화동판, 2008;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 Edited by Allen W. Wood, Trans by H.B. Nisbe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35, p.195, p.289; G. 헤겔, 법철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08 등을 참고하 라. second nature; Zweite Natur: 데모크리토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 전통 및 키케로 등을 원사로 두고 있는 이 개념은 교육, 습관, 관습과 본성 간의 관계에 주목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 문화가 새로운 차원의 본성 및 자연을 구성한다는 점을 나타내며,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등 독일관념론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정교한 수 준에서 전개되기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헤겔의 논의인데, 그에게 “제 2의 자연” 혹은 “제 2의 본성”이란 단순한 직접성으로부터 전개된 자기의식이자 대자적 계기로서, 도덕 및 인륜성과 관련된 사회적 제도 들이다. 헤겔은 동물적 실존과 구분되는 현실적 인간의 존재를 사고할 때에, 제 2 자연을 핵심적인 항으로 간주한다. 문화의 근간이 되며 개인의 의지와 괴리되지 않는 터전으로서의 사회적 수준의 자연에 대한 헤겔의 강조는 우리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후퇴하지 않아야한다는 것과, (사회)실재론의 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32) Theodor W. Adorno. Introduction to Sociology,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2000, p.38; T.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문병호 역, 세창출판사, 2014. 이와 더불 어 로스 울프의 변증법에 대한 노트를 참고하라. Ross Wolfe, Society, totality, and history, The Charnel-House, 2017. https://thecharnelhouse.org/2017/05/26/society-totality-and-history/

33)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고하라. “어려움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권리의 언 어가 국가에게 허용하는, 정당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립되는 기대들 때문에 민주적인 국가를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 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크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주형일 역, 동문선, 2005, p.61.

34) 같은 책, p.71.

35) 같은 책, p.123.

36) Theodor W. Adorno. Introduction to Sociology,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2000, pp.31-32.

37) 물론 알튀세르의 논의가 일찍이 보여주었듯 헤겔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전체(social whole)와 헤겔의 총체성(totality)을 구분하는 알튀세르의 논의를 인정하며, 실 재론적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논의가 사회구성체를 파악하기에 훨씬 정교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허나 방법론의 측면에서 전체와 부분의 인과를 설정하는 방식을 논함에 있어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받은 논리적 영향과 그의 청년헤겔주의자로서의 경력을 간과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곤란하다. 예컨대 심지어 「자본」에 이르러서 도 헤겔의 관념적 계기를 차치한다면 전체를 일종의 (외부를 두지 않은 채 스스로 운동하며 재생산되는)체계로서 간주하는 것은 양자가 동일하며(이 지점에서 헤겔의 ‘이성의 간지’는 자본의 간지라할 법한 마르크스의 ‘물신’으로 전유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마르크스가 언급한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과 상품, 화폐, 지대, 노동의 관계는, 헤겔 이 설정한 본질과 현상의 관계 및 이성과 직접성의 관계와 조응한다. 양자 모두에서 본질(자본)은 현상(자본의 각 현상형태)을 통해 드러나야 하지만 현상의 총합이 본질은 아니며(피케티가 생산에 투여되지 않을 단순 재산마저도 자본으로 규정함으로써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데에 실패했듯), 이는 헤겔의 본질이 형상-목적인과 관련 된 대상의 내적 논리라면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천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관계로 규정되기 때문 이다. 또한 물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헤겔의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 및 주-객동일성에 관한 이론과 조응한 다. 주관적인 것이 곧 객관적인 것으로 되고 객관적인 것이 곧 주관적인 것이 되는 인륜성과 가족-시민사회-국가에 서의 통일의 계기는 ‘주관적인 관념이자 객관적인 대상’이기도한 상품형식의 논리적 전사라 할 법하다. 더불어 루카 치가 “조직 문제의 방법론”에서 보여주었듯- 이론과 실천, 관념과 물질을 통합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는 헤겔을 경유하더라도 논구될 수 있다는 사실은 헤겔을 쉽게 청산할 수 없다는 점을 예증하는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 관한 한 마르크스의 업적은 전체 및 주-객동일성에 자본이라는 실체적 형상을 부여했다는 점, 또한 그로부터 현실적인 억압의 계기를 발견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적 구분이 실은 프랑스 공산당 내의 스탈린주의적 경향을 일신하기 위한 알튀세르의 역사적 개입의 산물이었음을 감안할 때, 오늘날 우리는 외려 헤겔에 대한 관성적 독해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38)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역, 길, 2015.

39) 헤겔이 매개의 문제를 무시한 채 감각과 직관을 실체화시킨 18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아도르노가 하이데 거류의 존재론자들을 비판했던 까닭 또한 이런 측면에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40)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역, 문학과사회 117호, 2017, p.313.

41)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3, p.88.

42) 헤겔에게 이는 곧 직관을 의식에 대립시키는 관념적이고 무매개적인 낭만주의적 충동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43) 이 지점에서 수잔 벅모스는 다음의 저서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헤겔을 경유하여 보편성의 이중성을 드러내어 보여 준 바 있다. 수잔 벅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 김성호 역, 문학동네, 2012. 여기서 벅모스는 인권의 보편성을 주창했 던 프랑스 혁명 및 그에 따른 근대 국가의 약동에 전율했던 헤겔의 보편 철학과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흑인노예들이 수행했던 혁명 사이의 내적 연결점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 으켰던 아이티 노예들의 당위는 바로 보편성의 형식을 경유한 것이었다. 본 작업을 통해 그가 비판하는 것은 보편사 이지만, 주창하는 것 또한 보편사이다.

44) 게오르그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p.409. 이는 좌익 기회주의자들과 혁명적 대기론 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범주에서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비판, 혹은 별개로 떨어져 분리된 것으로 파악된 특수와 보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45) 같은 책, p.408.

46) 같은 책, p.429.

47) 서동진이 변증법의 회복을 조직의 회복에서 발견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적대와 정치, 꾸리에, 2014. 5부 이하의 “코다(coda)_낮잠 자는 변증법”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