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위_‘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평

조태위

재일조선인의 자살률은 평범한 일본 국민의 자살률에 비해 더 높다고 한다. 아니, 더 높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국민’은 자살을 결심했다가도 “뒷머리를 잡아채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의 작용을 받아 마음을 고쳐먹기도 하는 반면, ‘디아스포라’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를 나열해 놓을 뿐이다. “소중한 고향과 그곳의 자연,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 조상이 남겨준 유형무형의 재산,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혈통, 과거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국민’의 전통, 고유의 역사와 문화”…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돌베개, 2006

누구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필요로 한다. 삶에 수반되는 일종의 근원적 외로움을 달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꼭 실존적인 이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집단에의 소속은 여러가지 크고 작은 실용적인 혜택을 보장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아싸outsider’이기보다 ‘인싸insider’이고자 노력한다. 하물며,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두터운 공동의 기억과 ‘문화’라고 하는 정교한 코드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천만단위로 집계해야 할 만큼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국민’이라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라면, 때에 따라 죽음을 불사하거나, 죽음을 극복해낼 만큼 강력한 것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조상, 혈통, 국민, 전통, 역사, 문화… 등으로 상징되는 끈끈한 구심력의 영향권 바깥에 놓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연민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쓸쓸한 처지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더라도, 몇 가지 반문하고픈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행여 ‘국민’ 개념에 자꾸 딴지를 거는 현대 인문학의 담론을 따라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냉소주의에 젖어든 청년 무리의 일원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염려되지만, 속으로 자꾸 되새기게 되는 몇 마디 소감을 바깥으로 꺼내 놓고 그 꼴을 한번 살펴보고 싶다.

명절 때가 되면, ‘조상’ 덕 본 집은 제사상 앞에 있지 않고 해외에 나가 있다는 말이 미소를 유발하는 싱거운 과장법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소견이 되고, ‘그러게 잘 좀 태어나던가’라는 영화 속 대사가 천만 관객의 뼈를 때리는 사회에서 ‘조상’, ‘부모’, 그리고 ‘혈통’이란 무엇인가? 다음 생에는 되도록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은 헬조선인에게 ‘역사’와 ‘문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한국의 자살률을 언급해버리는 것은 너무 치사한 반칙일까…

저자가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이란 어쩌면 현실 속에서 관측된 것이기보다, 관념 속에서 상상된 것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저자가 인용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을 두고 ‘상상된 공동체’라 했지만, 그 공동체의 구성원조차 스스로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상상해버린다면, 상상을 넘어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특히 디아스포라와 국민의 처지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자살의 문제에 있어 ‘디아스포라’와 ‘국민’의 구분을 실상에 비해 더 확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저자는 사랑의 문제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식민지배자의 자식과 피지배자의 자식”이 행복한 사랑을 할 수는 없으리라 믿었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마음이 끌릴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이 주로 위기의 순간에 제기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곧 위기에 빠지는 순간이 될 만큼 위태한 신세였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windows on worlds

한운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감독 김기영)에서 주인공 아로운은 일본 여성 히데코의 사랑을 좀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선인 강제징집병인 그는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기 보다,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비관하며 재차 애인에게 묻는다. “풍속은? 사상은? 조상은?” 히데코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풍속은 세계 공통이 돼가요. 사상은 영구성이 없어요. 본 일 있으세요? 원숭이를!” ‘디아스포라’가 풍속-사상-조상과 같은 ‘국민’의 조건을 따지고, 제국의 딸이 코스모폴리탄적인 계몽에 애쓰는 이 아이러니.

이와 같은 모순적 순간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주체구성을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저자가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한가” 하고 한탄하는 것은 일종의 ‘남성적인’ 사고방식에 갇혀있기 때문일 수 있다. 꼭 프로이트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구분과 배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법과 권력을 운용하고,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지켜내는 활동이 소위 가부장의 전통적인 담당 업무임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 때, 구분의 주체가 되기보다 구분에 의해 배제되는 쪽에 속할 일이 더 많은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질서를 견제하고 극복하기 위한 대안 전략을 채택해야 할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류 혹은 지배자의 논리를 내면화 해버리는 수가 있다.

이란의 여성 예술가 시린 네샤트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란 여성은 “남성(…)의 예상을 뒤엎는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감추고 있다고.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억압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빠르게 다시 일어서는 탄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는 단지 이란 여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속의 디아스포라’와 다름 없을 모든 차별 받는 여성, 그리고 더 나아가 디아스포라 일반에게 요구되는 자세일 수 있다. 저자가 재일조선인의 죽음을 묘사하며 사용한 표현 – “스위치를 뚝 끄듯이” – 이 과연 실상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네샤트가 말하는 ‘탄성’이라는 것과 거리를 좁혀 볼 여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유가의 가부장적 입장과 대비를 이루는 ‘여성성’에 내재된 잠재력에 주의를 환기시켰던 노자는 또한 한자 ‘현玄’을 애용하지 않았던가. ‘이 것’ 혹은 ‘저 것’에 속하기보다, 둘 사이에 애매하게 끼워져 있어 ‘가물가물’하고 ‘오묘하다’는 뜻을 갖는 ‘현’은 디아스포라 친화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해도 좋으리라. ‘사이dia’에 ‘흩뿌려진spora’ 디아스포라는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현해탄玄海灘을 사이에 두고, ‘조국’과 ‘고국’ 그리고 ‘모국’이 어긋나 있는 “어중간한” 정체성을 가진 저자라면 ‘사이’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탄성’의 확보를 위한 인식론적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바깥’이라는 표현을 고수한다. 스스로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의 틀 바깥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필연적이기도 한 감각”이라 주장한다. 나는 조심스레 반문하고 싶다. 안과 밖의 구분이 어찌 필연일 수 있으랴. 그것은 저자의 관념 속에서 필연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안-밖의 구분에 정치적인 효용은 있을지 몰라도, 과연 디아스포라의 실존과 스스럼없이 잘 어우러지는 인식틀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이’ 구역의 주인인 디아스포라를 ‘밖’으로 “추방당한 자”로 그리는 것은 과연 디아스포라의 주체성을 긍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가?

제국 일본은 내지/외지의 적극적인 구분을 통해 제국에 유리한 조건을 구성해가는 일에 고도의 효율성을 뽐냈다. 오늘날 신문 기사에서 왕왕 볼 수 있는 ‘내부식민지’, ‘죽음의 외주화’ 같은 표현도 안-밖의 구분이 여전히 효율에 복무하며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디아스포라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저자의 경우, 스스로를 ‘바깥’으로 자리매김할 때 모순을 일으킬 소지가 적지 않다. 일본의 주류 엘리트를 배출해 온 명문 대학의 동문이자, 일본 ‘국민’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는 내부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여러 의미에서 혜택받았”음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현실조건이 갖는 특수성을 섬세하게 고찰하지는 않는다. ‘안 쪽’으로 들어와 있는 경계인이 정체성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깥’이라고 인식해버리는 것은 아닐지.

한편, 관념을 감성에 우선시하는 저자의 경향을 그가 학인인 점을 빌어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몸의 여행이기보다는 머리의 여행이다. ‘거대한 두상’이 놓여있는 마르크스의 무덤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상징적으로 느껴질 만큼. 저자의 몸은 런던, 광주, 카셀 등지를 방문하지만, 오감을 통해 입력되는 이국 경험은 독자에게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예컨대 첫 챕터는 명목 상 ‘런던 여행기’지만, 런던에서의 경험 대신 죽음과 내셔널리즘의 불가분 관계, 죽음과 저항의 관계, 저항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로 가득하다. 다시 말해, 여행의 무대는 런던이 아니라 저자의 머릿속인 것이다. 또한, 미술서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예술작품이 두루 소개되지만, 그것은 미학적 차원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라, 작품을 만든 작가의 사회적 조건, 특히 그의 디아스포라적 출신성분을 짚고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가깝다.

몸이 부각될 때, 그것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인간적인 것이기보다는 언제나 아프고, 예외적이고, 인간성을 상실한 상태로 나타난다. “수감자들의 땀, 피, 분뇨, 화농한 상처, 사체”가 만들어내는 “냄새”거나, “버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낙인”으로서의 “얼굴”이거나, 한센병으로 인해 없어져 버린 “손가락”이거나, “머리가 없는” 잉카 쇼니바레의 형상인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 몸이 분열된 채 살았”던 연유로, 저자의 무의식은 온전한 몸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 회피하고 싶게 된 것이 아닐까.

한국의 대중에게 친숙한 재일교포인 추성훈, 정대세 선수에게 몸은 축제의 장이다. 운동선수로서 사회적 자기실현의 기반이자, 방송 출연을 통해 한국의 대중과 접촉하는 매개체이며, 패션감각을 뽐내기도 하는 무대인 것이다. 반면, 저자에게 몸이란 전혀 다른 종류의 사연을 갖는다. 두 친형의 육체는 체포와 감금, 그리고 혹독한 고문의 대상이었고, 특히 큰 형의 “얼굴과 상반신에는 커다란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에서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시는 붕어’의 이미지가, 에필로그에서는 소의 혀를 입에 물고 종이에 혈흔을 남기는 아티스트의 행위예술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비유로 소개되며 기묘한 수미상관을 이룬다. 저자에게 익숙한 몸의 감각이란 자유롭게 강물을 가로지르는 연어의 힘찬 몸짓이기 보다는, 폐쇄공포증을 동반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머리-몸, 밖-안, 죽음-삶의 이분법이 서로 연동되면서 차츰 머리-밖-죽음 vs. 몸-안-삶의 구도가 자리를 잡는 듯하다. 정교한 대항을 이루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인상을 받기에는 충분할 만큼. 특히 프리모 레비, 슈테판 츠바이크, 장 아메리, 파울 첼란 등 해외 지식인의 디아스포라성을 부각시킨 후, 그들의 자살을 언급하는 패턴을 눈치채고 나면, 조심스레 가졌던 심증을 굳혀보게 된다. 디아스포라 지식인과 죽음의 관계를 더욱 가까운 것으로 만들고, 죽음을 ‘필연’적인 것처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잘 떠오르지는 않는데…

어쩌면 죽음의 부각은 스토리텔러로서 고안해 낸 장치일 수 있다. <디아스포라 기행>의 1차적 소구대상은 일본 월간지 <세카이>의 독자, 다시 말해 일본 국민이다.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무감각한 일본인에게 각성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죽음이라는 테마가 가지는 호소력은 문학과 철학에서 오래전부터 인정해 왔으니 말이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매혹이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변증법의 부재로 인한 우울의 징후일 개연성도 있다. 저자는 1970년대 한국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앞으로 “역동적인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며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생겨날 것을 기대한다. 분열과 종합, 죽음과 삶, 한과 흥, 음과 양 사이를 번갈아가며 일정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삶의 전 차원에 적용되는 변증의 원리라 했을 때,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가진 한 개인의 자기인식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함은 물론일테다. ‘이산’에 대한 표면적 인식 안쪽으로 역동적인 ‘이합집산’의 변증법이 작동할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식이라 할 수 있으리라.

서경식 도쿄 경제대학 교수, 사진 출처: 부산일보

저자는 자신이 겪는 내적 곤란함의 원인으로 “나 자신이라는 외곬”을 지목한다. 변증법은 ‘외곬’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갈래 길의 반복적인 충돌과 협상을 요한다. 예컨대 재일 디아스포라의 역사에는 아라이 쇼케이의 비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 마사요시의 성공신화도 있는 것이며, 유태인 지식인 디아스포라 중에는 때이른 자살이 아니라, 노환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자신이 가진 푸짐한 달란트를 완전연소한 자도 있는 것이다. ‘외곬’로 인한 기울어짐은 분열과 죽음, 한과 음으로의 멈출 수 없는 침잠으로 나타난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은 말라가기 마련인데.

변증법의 부재가 갑절 아쉬운 이유는 타나토스(죽음 충동)의 만연 속에서 이따금 에로스(삶 충동)의 기운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마치 저자가 아오야마의 대사관에서 마주친 중동 소녀의 “검은 옷자락이 살짝 뒤집히며 붉은 하이힐이 엿보였”듯이. 예컨대 그는 디아스포라를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그를 포함한 재일조선인이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혼자가 아닌” 것이라 말한다. 나는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챕터를 할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날 만큼 흥미로운 테마라고 생각한다. 또한, 디아스포라의 주체성을 이해하는데에도 무척 중요한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디아스포라의 가능성과 한계를 골고루 참견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계에 집중하며,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한 두 줄의 동떨어진 문장의 형태로 머무르도록 놔둘 뿐이다.

내용으로 충족되지 못한 기대는 형식의 참신함으로 달랠 수 밖에. 해방적인 미래를 훤히 내다 보는 머리와 달리 이행기의 느린 변화에 묶여있는 몸이 겪는 불편함을 기술한 것이 <디아스포라 기행>의 내용이라면, 형식 면에서는 예술장르와 학문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적절하게 선별된 지식조각들을 엮어내는 디아스포라적이고 창조적인 가로지르기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흩뿌려져 있는 단문은 일견 두서없는 넋두리처럼 보이지만, 일관된 주제를 항상 시야 안에 두고 있어서, 저자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고민에 방해받지 않고 푹 빠져들기 좋아하는 바그너의 무한선율처럼 텍스트 조각들의 저변에서 은근하게 감지되는 ‘라이트모티프’가 끊기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고, 또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단락과 종결’에 구애받지 않고 느슨하게 유지되는 구심력은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중도에 멈추는 일 없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죽음에의 충동, 자발적 타자화, 변증법의 부재…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면서 내게 일말의 ‘의심’ 혹은 ‘비판’의 자세를 가지게 했던 부분을 몽땅 저자 탓으로 돌리려는 심보는 아니다. 저자는 “윤이상 같은 사람”이 느끼는 “망향의 심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뒤집어서, 나는 ‘서경식 같은 사람’이 느끼는 ‘망연스러운 심정’이 무엇인지 쉬이 헤아릴 수 없다는 뜻까지 끄집어내어 음미하더라도 무리는 아니리라. 윤이상 혹은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같은 망명 디아스포라는 적어도 자신을 ‘바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망향의 심정’에 시달렸을망정,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만지작 거리지 않았다. 이산의 무대가 일본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사상적 조건을 가진 국가였던 덕택이다. 오히려 조국에 의해 ‘바깥’으로 낙인 찍힌 그들에게는 독일과 프랑스가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되었다. 만약 배경이 일본이었다면 그들이 전혀 다른 삶의 조건에 쳐해졌을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전부일지 모른다.

권두에서 제안하는 ‘외부’와 ‘내부’ 사이의 “곤란한 대화”에 사뭇 진지한 자세로 임한 점을 내세우면서 저자를 위로할 자격을 나 자신에게 조심스레 부여해본다. 그는 아플것 같아서 자살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실체가 모호한 것 같으니 말이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세상은 점점 더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다. 국민국가 체제의 존속여부와는 별개로, 디아스포라적 삶이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디지털 세대라 할 청년들이 나라 밖을 나가보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시민적인 감수성 앞에서 ‘국민’과 ‘디아스포라’에 대한 어른들의 담론이 조금은 무색해진다. 그들이 미구에 꾸려나갈 참신한 거버넌스에 모쪼록 기대를 품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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