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nett Foddy, 절망감의 11가지 맛

글: 베넷 포디(Bennett Foddy)

번역: 이여로

게임 디자이너들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생각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절망감을 느낀다면 그 게임은 어딘가 잘못 디자인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게임 디자인들은 대개(어쩌면 모두?) 절망감을 본질적인 요소로 갖고 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Space Invader>에서 플레이어가 죽었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땠겠는가? <미스트 Myst>에서 플레이어들이 쩔쩔매지 않았다면 어땠겠는가? 절망을 완전히 배제한 게임이란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게임,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게임이 될 것이다. 그저 뜻하는 대로 전부 이루어지는 게임은 단순한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나는 절망이라는 감정을 인정하고 우리가 그 감정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살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절망이 가질 수 있는 상이한 경험들을 이야기해 보는 편이 유용할 것이다. 모든 절망은 동일하지 않다. 절망은 각기 다른 맛을 낸다. 어떤 맛은 남용되고, 어떤 맛은 우연하게만 쓰인다. 아주 드물게, 절망감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위한 맛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감의 다양한 풍미를 표현할 언어를 갖추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현대 사회가, 모든 절망감을 치워 버리려는 산업용 기계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절망감을 생산해내는 기계임을 생각해본다면, 이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어찌 됐건 여기 내가 좋아하는 절망감의 몇 가지 맛이 있다.

 

1. 거의 다가가기, 완전히는 말고 (Nearly There, But Not Quite)

집 잽(Zip Zap)의 이 단계에선, 위에 놓인 철탑을 치기 위해 아래의 작은 주황색 부품을 돌려 가며 구조물을 휘두르게 된다.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목표를 놓치는 데 허비한다.

내 위장 가장 위쪽에, 이런 맛을 내는 절망감이 얹혀 있는 느낌이다. 소화불량 때 따라오는 속 쓰림처럼 말이다. 목표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잠시나마 기대와 안도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게 목표에 근접하다 이내 실패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지혈대가 상처를 점점 조여오듯 절망이 찾아온다. 이는 아주 진귀하고 순수한 유형의 절망감으로, 최고의 맛 중 하나다.

 

2. 다시 시작하기 (Start Over)

<섹시 하이킹 Sexy Hiking>에서, 한 번의 잘못된 움직임이 당신을 절벽의 바닥까지 단번에 떨어뜨릴 수 있다.

여기서는 아주 다른 맛이 난다. 당신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시작점으로 되돌려져, 이때까지의 고된 노력을 완벽한 헛짓으로 만들기 위하여 도달했을 뿐이다.

롤러코스터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처럼, 이러한 절망은 위장에 뚫린 구멍처럼 당신을 시름시름 앓게 만든다. 혹은 숙제가 담긴 외장 하드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우리는 종종 게임 내 고쳐지지 않은 버그 때문에 이런 일을 겪기도 한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이 감정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규칙적으로 부여하는 유일한 종류의 게임이다. 그런데 요즘은, <소울 Souls> 연작의 레벨 시스템이나, <스필런키 Spelunky>에서 하나씩 얻을 수 있는 캐릭터들처럼, 게임 내 진행 상황에 따라 그보다 이전으로는 되돌아가지 않게 해주는 장치들이 생겨, 이러한 역겨움이 종종 달콤하게 중화되기도 한다.

 

3. 갔다가 돌아오기 (There And Back Again)

<드래곤 퀘스트 8 Dragon Quest 8>에서, 당신은 눈에 보이는 곳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찾는 게 거기에 없으면, 무작위로 마주치게 되는 적들을 끊임없이 상대하며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단순히 ‘다시 시작하기’에 비해서, ‘갔다가 돌아오기’란 더 강렬한 절망이다. 당신은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과정을, 벽돌 쌓듯 착실히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 맛은 위에서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아니면 입천장이나 코 뒤편을 강타하는 시큼함에 가깝다. 달갑지 않은 교훈을 주는 절망일뿐더러, 자기 상자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말을 듣는 듯한 괴로운 경험이다.

 

4. 우리 아직이야? (Are We There Yet?)

<모든 이가 휴거에 들었으니 Everybody’s Gone To The Rapture>는 당신더러 한가로이 시골 마을을 거닐라 한다. 방금 재앙이 닥쳤을지라도.

이 맛은 창자 저 아래에서 느껴지는 경련이다.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경련은 쌓여 간다. 절정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커지다, 이내 당신의 저항은 무용해지고, 당신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고통은 “임무를 완수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플레이어가 예상하는 시간 대 실제 걸리는 시간”이라는 구도에 따라서 결정되는데, 이런 느릿함이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로 느껴지는지, 아니면 불필요하거나, 어쩌면 악의적으로 보이는지에 따라, <다크 소울 Dark Souls>에 나오는 병자의 마을(Blighttown) 속 늪지대처럼 잠시 겪고 지나갈 일인지, 영원히 계속될 조건인지에 따라 그 맛이 크게 달라진다.

 

5. 어디로도 가지 않기 (Going Nowhere)

인크리페어(Increpare)의 <무덤 Grave>은 플레이어를 관에 넣어 땅 아래 산 채로 파묻는다. 힘없이 관뚜껑을 두드려볼 수도 있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무런 소용도 없고 상징적인 짓에 불과한 노력을 할 때 따라오는 절망감이, 요즘들어 이런저런 무료 게임에서 환영받듯 쓰이고 있다. 무의미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동조하듯 절망감을 느낀다. 리자 메이 포스트(Liza May Post)의 단편 영화 및 사진 연작인 <시도하기 Trying>에서는 한 여성이 코끼리에 얹힌 안장에 발을 올리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이러한 절망감을 가장 훌륭하게 포착한 작품 같다. 이 맛은 위장에서 느껴지는데, 불안함과도 유사하다.

 

6. 거긴 허락되지 않는다 (Going There Is Not Allowed)

<슈퍼 마리오 선샤인 Super Mario Sunshine>의 수중 유적에는 이상한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다. 이 책을 가져갈 방법은 없고 벽 너머로 잠깐 비추는 모습을 캡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맛은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손을 불 속에 넣어본다거나 비누를 먹으려는 행동)을 제지당할 때 느끼는 것이다. 계층화된 권력 관계가 다시 세워질 때, 자신이 믿고 있던 권위를 빼앗길 때의 겸손한 감각, 플레이어는 이제 자신이 게임 계층의 최하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진(binary)법 체계의 자료들을 보호하는 디지털 권리 관리(DRM)라는 무정한 세계 내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컴퓨터의 지배는 절대적이다.

 

8. 해낼 수 없어, 남들은 해내지만 (Others Can Get There, But I Can’t)

<더 위트니스 The Witness>에는 전축이 다 돌아가기 전에 여러 퍼즐을 전부 풀어야 하는 특별한 도전이 있다. 많은 플레이어는 퍼즐 몇 개를 풀기는 해도, 도전을 완수하진 못한다.

기술과 인지력을 요하는 과제가 주어지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내게 불가능할 뿐이다. 이런 과제들에 덤벼들 때면 종종, 요구되는 능력치에 도달하기 한참 전부터 내 능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서서히 깨닫게 된다. 농구에서 덩크슛을 시도할 때나, 카운터 스트라이크(Counter-Strike) 혹은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에서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려고 할 때면, 누구나 이를 느낀다. 자신감과 낙관은 이내 굴욕적이고 병적인 현실주의로 바뀌고, 우리의 행동에서는 활기가 빠져나간다. 그 일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우리 정신에 밧줄을 쳐버리는 순간.

 

9.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어 (I Don’t Know What The First Step Is)

자크 바스(Zach Barth)의 <TIS-100>은 아무런 사전 절차도 없이, 당신을 어셈블리 언어[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 체제의 기계어를 인간이 사용하는 특정한 문자와 1:1 치환해서 표현한 언어]로 이루어진 프로그래밍 화면에로 던져 놓는다. 이전에 어셈블리어를 써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눅이 들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중에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시작도 전에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절벽 끝자락 너머를 바라볼 때처럼, 당신은 이런 당황스러움을 발바닥에서 느낄 것이다. 내 경험상, 성인들은 대개 이런 종류의 좌절감을 특별히 두려워하는데, 이 감정은 자존감을 받쳐주고 있는 그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역량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디자이너로서, 성인 유저들이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건 특별히 매력적인 일이다. 누군가 간지럼을 심하게 탄다고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

 

10. 목표에 도달했지만, 상대도 마찬가지다(무승부거든) (I Am There, But So Is My Opponent (A Draw))

1999년 크리켓 월드컵이 끝을 향해갈 무렵, 호주 팀은 남아공과의 경기가 동점으로 끝나자 환호한다. [호주팀은 소수점 자리의 미세한 차이로 승리하게 된다]

미국의 디자이너들은 동률(tie)이나 무승부(draw)는 너무 불만족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게임에 무승부를 넣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더 안 좋은 결과가 그려진다면 무승부도 신나는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런 감정은 거창하게 시작해서 처참하게 마무리되는 특별한 종류의 절망일 따름이다. 당신은 결의를 다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맛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불안해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어쩌면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게임을 한다는 게, 바보들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운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1. 전에 와본 적 있는데 (We’ve Been Here Before)

메소프(Messhof)의 <처벌: 처벌하기 Punishment: The Punishing>에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항상 이전까지의 단계를 모두 다시 깨야 한다.

같은 일을 계속 계속 반복하라 함은 특별한 절망감을 준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매일 다시 일어나, 다시 씻고, 다시 열차에 올라탄다. 이러한 반복은 현실의 삶 속에선 금세 가리워 지고 마는 선불교 적인 절망일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다른 방식으로 절망을 구조화한다. 게임은, 반복해야 한다는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같은 모퉁이를 여섯 번 돈다면,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어에게 여섯 번의 다른 경험을 전해주려 한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반복적일 때, 이는 게임 형식에 대한 망상적, 유토피아적 이념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절망감의 맛은 여기까지다. 이 글은 완벽한 요리책도 아니거니와 일종의 분류학도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최고의 맛을 선별해 보여주었을 뿐이다. 당신이 추가하고 싶은 맛의 절망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댓글에서 맘껏 떠들어주시길 바란다!

 


* ‘절망감의 11가지 맛’ 원문: http://www.foddy.net/2017/01/eleven-flavors-of-frustration/

* 베넷 포디(Bennett Foddy, 1978-)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게임 디자이너로, 한국에서는 속칭 “항아리 게임”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다. 호주 멜버른 대학교에서 인지과학과 인간의 중독 현상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옥스포드 대학교 과학 및 윤리 연구소의 부국장을 역임했다. 박사 과정 중인 2007년, 게임 프로그래밍을 독학하여 첫 번째 게임 <Too Many Ninjas>를 만들었고, 프린스턴 대학 재직 중이던 2010년에 만든 <QWOP>가 큰 인기를 얻으며 게임 디자이너로서 알려진다. 현재 뉴욕 대학교에서 설립한 게임 센터에서 게임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유료 발매를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을 포디의 개인 사이트에서 플레이해 볼 수 있다. (http://www.foddy.net/category/games/brow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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