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_미세먼지에 관한 짧은 투정

“자연성분의 흡착거품이 미세먼지를 팝팝!”

지난 3월 아모레퍼시픽의 프레시팝은 그린허브레시피의 광고를 선보인다. 모델 이소라는 미세먼지로 가득한 서울의 전경을 뒤로한 채 자신의 두피를 쥐어 잡는다. 대열을 갖춘 댄서들은 “문제 있어?”란 표정으로 자신있게 머리칼을 흔들어 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신없이 화려한 영상은 미세먼지의 그것보다 더 희미하게 재난의 기억을 지워버리는듯 하다. 맥주 브랜드 테라는 초미세먼지로 가득한 뿌연 도심 속에서 ‘청정라거’를 소리친다. 그들의 특별한 맥주는 호주의 청정지역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찾은 청정맥아 100%를 자랑한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테라만의 차별점을 부각하는 마케팅 전략과 청정, 자연, 천연을 지향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했다고 말한다. 스웨덴의 마스크 기업인 에어리넘(Airium)은 최첨단 필터 테크놀로지 기술을 탑재한 ‘패션 미세먼지 마스크’를 출시하였다. 배후에는 스웨덴 왕립공과대학 공학박사팀과 스톡홀롬 경제대학교의 제작 지원이 있었다. 창업주 알렉산더는 인도로 이주한 후 재발한 천식이 창업의 계기라 말한다. 그는 매일 사용해야 할 좋은 마스크를 찾았다. 하지만 기존의 마스크는 기능이 불완전했고, 심지어 광부들이나 쓰는 낙후된 디자인이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알렉산더는 ‘최첨단 기능성 패션 미세먼지 마스크’를 개발한다. 마스크 안쪽 면에는 금방이라도 코가 뻥 뚫릴 것만 같은 스웨덴 국기가 붙어있다. 일본제, 미제라는 소비주의적 신앙심의 자리를 이제 호주와 스웨덴이 넘겨받은듯 하다. 이 모든 환상들은 시장에서의 독점을 확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었다. 자본은 지역의 문화적, 지리적 특수성을 가장 매력적으로 선보이려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하비에 따르면 독점적 특권은 교통과 통신의 변화와 함께, 그 매력적인 힘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자본은 이제 물리적인 공간의 소멸에 따른 독점지대에 대한 새로운 전략에 주목한다. 독점적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만의 진실함과 독특성을 뒷받침하는 전략을 고안해야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 2014: 183-185) 가령 패션미세먼지 마스크는 그 기능과 사용가치와 전혀 무관한 ‘스웨덴’이란 청정지역, 즉 문화적 특수성을 동반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호소한다. 여기서 잠시 ‘Airinum’이란 회사명을 주목해보자. Airinum은 공기를 뜻하는 ‘Air’와 플라티눔을 의미하는 ‘inum’의 합성어다. 하지만 플라티눔은 환경오염의 주원인으로 지목받는 플라스틱, 합성섬유, 실리콘 수지 등에 쓰이는 원료다. 더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기업을 자처하는 에어리넘의 번역서비스는 중국, 한국, 베트남,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만 제공된다는 것이다. 깨끗한 대기와 환경권을 호소하던 스웨던 자본의 뻔뻔한 위선은 자신의 굴뚝 연기까지는 숨기지 못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어설픈 젊은 창업주의 사소한 실수인 것일까?

몇년 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미세먼지가 아니었을까. 미세먼지 속에는 80여개의 금속과 30가지의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다. 입자는 코와 인두를 지나 후두, 기관지, 세기관지, 종말세 기관지, 폐포로 들어간다. 먼저 간단한 주요 유해성 입자를 살펴보자. 비소는 피부암, 방광암, 폐암, 심혈관질환, 당뇨병을 유발하며, 크롬은 내출혈, 호흡장애, 간 및 신장 장애, 피부염, 피부궤양의 원인이 된다. 인체에 접촉한 니켈은 피부염, 알레르기 반응, 두통, 현기증, 폐울혈, 발열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납은 뇌출혈, 지능발달지연, 발달 장애 등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며 어린 아이에게 특히 예민하다.(유미, 2011) 이렇게 미세먼지는 우리 사회 속에서 호환마마보다 더 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였을까. 언제부터인가 미세먼지는 환경산업의 주요한 마케팅전략이 되어버린 것 같다. 미세먼지에 강한 공기청정기와 건조기, 기능성 청소기와 의류건조기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세먼지가 효자라는 설레발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전시장의 동향은 미세먼지 관련 제품의 급격한 매출 상승을 자랑하고 있다. ‘친환경’, ‘청정’이란 개념은 자기보존이란 공포를 경유하여 자본 축적을 위한 끊임없는 결핍을 제안한다. 우리는 이제 자본이 설계한 수요와 구조적인 욕망으로 유인되어 간다. 자본은 피비린내 나는 생고기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굶주린 늑대처럼 자신의 과잉분을 실현시키려 바삐 눈알을 굴린다. 다시 말해, 자본은 점점 저하하는 자신의 부가가치의 공백을 위신, 환상, 문화, 지식 따위의 상징을 통해 상쇄하려 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 2008) 패션 미세먼지 마스크를 보라. 그들은 미세먼지라는 애처로운 신앙심을 팔기 위해 수십억원의 광고비를 지불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닌가. 자본은 자신이 만든 미세먼지란 비극을 다시 자본의 실현을 위한 기폭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듯이 패션 미세먼지 마스크는 환경문제 해결에 유용하지 않다. 단지 유해 중금속으로 가득찬 미세먼지의 입자에 ‘패션’이라는 불순 분자만 더 추가할 뿐이다.

욕망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환경 위기라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생활양식과 생산수단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환경운동이 주목하는 몰역사적인 환경 파괴라는 일면의 현상보다 그것을 야기하는 원초적 동력부터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미세먼지가 폭발적인 소비주의 문화와 자본의 내재적 축적 모순이 야기한 일종의 재난이라 가정한다면, 생활양식, 즉 소비주의의 작동 근원인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대하여 차근 차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결핍의 다른 말이다. ‘결핍 없음’은 달리 말해 ‘욕망 없음’ 이기도 하다. 하지만 욕망은 그 내재적 모순과 함께 ‘결핍 없음’이란 숙명적 재앙을 안고 있다. 따라서 욕망은 무언가를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공간이다. 오늘날 욕망은 왜곡된 유토피아로서 강력한 소비문화의 원동력인 동시에 공포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생존의 불확신은 공포의 근원이며 욕망의 동력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욕구를 초과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 즉 욕망의 기저에는 자기보존의 원초적 본능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된 사회에서 욕망은 가장 철저히 절제된다. 공포는 초과된 욕망을 봉인하고 합리적인 결핍을 소환한다. 케인즈는 이 공포를 걷어내고 자유로운 소비를 유인하는 욕망의 해방을 제안한다. 그는 욕망의 해방이 기술혁신과 노동시간의 절감에 기여하여, 궁극적으로 비물질적 가치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욕망이 어떤식으로 설계되든,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물질 혹은 비물질을 취하고 소비한다. 자본은 욕망을 매개했으며 우리가 체험한 행복과 감동, 절망, 사랑, 배신, 우정은 자본으로 매개된 지금, 여기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자본이 계획하고 설계한 세상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자본은 생산을 증대하고 합리적인 착취를 강화하는 대신에, 오락과 휴식, 달콤한 여가시간을 약속했다. 하지만, 믿었던 자본의 약속은 인간임을 망각한 우리에게 기만적인 노동의 연장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노동자들의 유일한 권리는 자본에 의해 파괴된 육신의 재생산과, 자본의 증식을 위해 부여받은 구매의 자유뿐이다. 우리는 자본으로부터 상처받은 결핍의 구멍을 채워야 한다. 다시 말해 욕망은 재생산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욕망은 그 내재적 법칙상 절대 ‘충분’해서는 안 된다. 욕망되는 목적을 얻기 위한 우리의 재화나 행위는 언제나 시장에서 부족하게 관리되기 때문이다. (막스베버, 몸젠・마이어 편집, 2001) 사실 이 규칙은 이미 우리가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자본에 의해 결정되었다. 만약 우리가 생산한 물질이 필요에 의해 소비된다면, 자본은 더이상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산적 소비이며, 소비적 생산이다. 다시말해 필요에 의한 소비의 ‘최대 효율’은 자본의 가치 실현에 있어서 ‘최대 비효율’이다.(앙드레 고르, 2008)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다시 말해 무엇이 결핍되었(어야 하)는가? 자본은 그 영속적인 축적을 위해 결핍을 설계한다. 만약, 우리가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화가 충분하다면, 소비 속도는 천천히 감소할 것이며, 시장은 더이상 빠르게 순환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정체될 것이고, 가치를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끊임없이 결핍을 제안하며, 우리를 구조적인 욕망으로 유인한다. 이제 필요(수요)는 생산(공급)에 앞서 설계된다. 자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의 필요를 설계하며, 관리하고, 이에 따라 공급 과잉을 최소화하며 이윤율을 높이려 한다. 자본간 경쟁이 극심해지는 동시에 기계 생산성도 높아지면서 생산직의 이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아무도 ‘필요’를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이 설계한 질투, 시기, 세련된 윤리를 구매하고 있다. 기 드보르는 사용가치의 저하 경향은 연장된 생존의 내부에 새로운 형태의 결핍을 발전시킨다고 밝힌 바있다. 스펙타클은 이러한 환상의 일반적인 표명이다. 실재하는 소비자는 환상의 소비자가 된다. (기 드보르, 2014) 하지만 그에게 스펙타클은 제조업을 포함한 여타 생산 노동의 이윤율 저하에 부딪친 자본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다. 스펙타클은 사회의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를 매개한 화폐의 또 다른 의미인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사회의 모든 생산물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체계의 합리성을 진술하고 있을지 모른다. 즉 사회에서 허락된 소외된 구매의 자유, 그리고 그것에 참여하는 소외된 이들은 자본주의의 숙명을 진술하는 스펙타클에 참여하는 것이다.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우리는 그 상품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편하게 된다. 상품과 소비자의 관계는 총 생산물 만큼의 스펙타클을 재생산, 가시화하며 사회와 생산자, 상품 간의 관계를 재편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비’는 그 자체가 스펙타클의 산물일 것이다. 가령 지식이란 스펙타클은 인간의 경험을 전략적으로 제한하며 자본주의 체계의 합리성을 설계한다. 따라서 소비라는 숙명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련받는 일종의 지식의 스펙타클이다. 즉 숙명적 소비는 교욕된다. 이제 우리는 자본이 설계한 거짓된 욕구를 욕망하게 되며, 생산이란 끝을 알 수 없는 증식의 동력을 제공한다.

자본은 스펙타클의 후방 지원과 함께 숙명적 생산에 돌입한다. 홍성태 교수에 따르면,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삶의 영위를 넘은 사회적 위치와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이다. 즉 오늘날 사람을 평가하는 지표로 ‘무엇을 생산하느냐’보다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중요해진 것이다.(홍성태, 2004 : 59) 여기서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어떻게 소비하느냐”이다. 흔히 괴팍한 소비주의문화를 상상할 때, 집채만한 햄버거를 입에 털어버리는 천박한 심슨아저씨나 새로운 아이폰 출시를 기다리는 배나온 미국의 좀비들을 상상한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느냐’ 즉, 소비의 결과에 주목하며 문화적 가치관을 검토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어떻게’라는 가치는 소비주의문화를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 모른다. 심지어 굉장히 정교하다. ‘어떻게’는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에 추가적인 가치관을 부여한다. 가령 그것은 애국주의적 소비, 윤리적 소비, 가부장적 소비, 위신적 소비 등이다. 한국에서 애국주의적 소비가 금모으기 운동의 잔재라 한다면, 윤리적 소비는 그보다 더 오래된 향토적인 감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우리는 당장 내일이라도 대한민국이 망해버릴지 모른다며 일본 여행자들을 비난한다. 가끔은 인간과 사물 간의 눈물나는 도원결의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물을 인격화하며, 소비의 ‘의리’를 지키려 한다. 어떤 이들은 삼다수 외의 어떤 물도 마시지 않는다.(심지어 빈 물통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최근 소비에 있어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해지며, 그 품종과 방식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일반화되어 감에 따라, 그에 발 맞춰 이커머스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1) 기술 혁신에 발 맞춰, 결핍은 더 화려해지고, 욕망은 더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국지적 차원을 넘어 다양해진 결핍을 더 빠르게 채우려 하며, 자본은 로지스틱스 기술의 혁신으로 보답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수 많은 지역 경제는 붕괴되고, 욕망은 디지털로 매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욕망의 끈을, 다시 말해 자본이란 모순이 설계한 화려한 착각의 숲을 내던지고 진짜 숲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자본과 자연

앞서 우리는 소비라 쓰며 욕망이라 번역되는 생활양식이 자본과 생산양식에 밀접하게 규정되어 있단 사실을 알았다. 즉 인간은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음식, 옷, 거주지를 노동을 통해 얻는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은 전통적 수공업같은 개인적인 노동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 사회적 분업에 따라 생활양식을 취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분리되어 생산하는 모든 물질은 자연의 전유와 변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그 변덕스러운 욕망은 사회적 생산과 자연 간의 관계를 매개한다. 모든 생물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생존 조건을 부여받으며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2) 하지만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고유의 능력이 있다. 인간은 사회조직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생태적 조건에 적응함과 동시에, 변형시키고 생태 복합체의 특수한 교란이나 격변을 창조할 수 있는 예외의 종이 된다. (데이비드 하비 1998;, 하일라・레빈스, 1992) 따라서 미세먼지를 포함한 환경오염이라는 인간 재생산에 치명적인 위기를 야기하는 생산양식의 모순, 즉 자본의 모순을 중심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일부 낭만주의 생태론자들은 자연 앞의 지식은 부질없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관이라 비판한다. 그들에게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관념적 가치를 내포하지 않는다. 가령 인간중심주의자들은 자연의 총체성을 상정 및 구조해놓고, 그것에 ‘위대함’이란 인간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는 건방진 주체라는 것이다. 물론 지식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생태위기의 실제에, 즉 자연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이 건방진 오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제임슨 무어 외, 2006) 본 논평은 인간중심주의적/생태중심주의적, 자연과학의 생태학/역사주의적 관점을 이원적으로 분리하거나, 이들의 논쟁적인 마찰을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 아득한 미세먼지와 오늘날의 생태위기, 그리고 일상과 생활양식의 파괴를 규정하는 생산양식을 둘러싼 논의를 더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일부 생태학자들은 ‘생태계 위기’는 과장된 표현이라 주장한다. 한계이론은 허황된 이야기며, 생태주의는 너무 낭만적이고, 과학은 자연의 파괴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미 수 많은 환경 문제는 전 세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화석연료와 담수의 고갈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증발한 호수와 강은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키며, 나아가 식수 운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한다. 매일 기준치를 초과한 초미세먼지 입자는 대기오염이 더이상 음모론자의 배부른 하소연이 아니라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 상품 생산의 무한 경쟁이 야기한 대량의 탄소 배출은 역설적으로 생산성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지구온난화는 구름의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강우량과 물 보유량에도 변화를 주게 되고, 토양이 침식되거나 농업 생산량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롭 헹거벨트, 2013 : 181) 우리는 이제 생태위기가 더이상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태어날때부터 달고 사는 축농증은 폐기능까지 약화시켰다. 최근에는 콧구멍이 본래 냄새를 맡기 위한 기관인지, 미세먼지를 마시기 위한 기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가속화되는 대기 오염은 새로운 계층별 불평등 관계를 가시화하기도 한다. 소득과 지위, 지역에 따라 오염을 감수해야할 계층이 분리되는 것이다. 환경불평등에 대해서는 김민정의 연구가 흥미롭다. 김민정은 포스코 광양 제철소 인근 지역인 태인동과 금호동을 중심으로 환경불평등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동일한 환경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혜택이 좋은 금호동은 태인동에 비해, 환경의식이 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금호동은 광양제철소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반면에 태인동은 하부 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역의 비숙련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계층의 주변화 정책은 연대적 사회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때문에 금호동과 태인동 주민들은 상호간 연대를 통한 환경 운동까지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노조를 견제하기 위한 포스코의 복리적 지원이 기업을 위한 피지배자의 자발적 헤게모니로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김민정, 2009) 한반도 전체를 덮어버린 거대한 초미세먼지와 환경불평등을 모두 종말론이라 비난해도, 초거대 자본이 —자신들의 자본 축적을 담보받기 위한 안정된 원료 공급을 위해— 전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 오늘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태위기를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생태위기와 대안사회

먼저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이어갈 필요가 있다. 이때 지적할 점은 마르크스를 우회할 수 없다는 것이다. 60년대 이후 마르크스는 신사회운동의 내부적인 연대 의식을 만들 수 없었고, 과감히 폐기되기 시작한다. 특히 환경과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마르크스는 무분별한 근대와 가부장제를 유인한 프로메테우스주의자라며 비난받는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진 빚을 잊어선 안 된다. 마르크스는 실천적 계급의식과 체계의 과학적, 이론적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생태적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보겠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창의력과 다양성을 극대화시켰고, 경이로운 생산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영원한 꿈이었던) 노동의 해방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물리학과 공학, 그리고 화학, 의학의 발전은 자연의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의 경이로운 생산력이 혁명의 모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분명 인간이 고안한 그 어떤 발명품보다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힘은 우리를 철저히 배신하고 있다. 그것은 분배의 배신을 넘어,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생태 위기를 함께 초래했다. 포스터의 말대로 자본은 도시와 농촌간 신진대사균열을 촉진했으며, 나아가 거대 자본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권리를 등에 업고 세계로 팽창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 팽창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일찍이 예고된 바 있다. 자본은 저임금 노동을 확보하며, 과잉 자본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을 끝임없이 팽창하며 식민 전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의 식민 팽창은 없다. 하지만 거대 자본은 부가가치가 높은 낙농업을 개발하기 위해,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위한— 대규모의 토지를 남반구로부터 착취한다. 또한 곡물 수입국으로 매수된 국가들은 초국적 법인자본의 그린파워에 포섭되어, 자생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제임슨 무어 외, 2006 : 41) 이들은 불임씨앗이나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통제 받으며, 끊임없이 외채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사실상 세계 무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건 자본이 전 세계의 농업을 수직통합하며 해체된 소농들과 —파괴된 토양을 상쇄하기 위해 더 강한 화학 비료에 적응한— 대규모 식품 군단들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한다. 수학계 7대 난제보다 어려운 건 오늘 점심 메뉴을 택하는 일이라고. 이 말은 식문화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어떤 음식도 굳이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컵라면, 김치찌개, 짜장면 뭐가 좋을까. 뭐든 상관 없다. 그냥 먹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도시의 혓바닥은 자본의 축적을 위해 합리적으로 설계된 미각만을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이 부여한 가짜 욕망을 숙명이라 인정해야 하는가. 잠자코 소비의 주체로서 생태 위기를 방관해야 하는가.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4) 또한 있다고 했다. 푸코를 믿고, 생태-코뮌주의자인 머레이 북친의 흥미로운 제안을 살펴보자.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보한 대안적인 생태사회를 꿈꾸는 사상가다. 그는 중앙집권적 권력의 독점이 아닌, 민회 중심의 권력 행사를 강조한다. 민회는 지자체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민주적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원리로 한다. 따라서 지역주의적 정치가 중요해진다. 도시의 금융 서비스와 산업, 공업 시설은 모두 지역 공동체가 관리하며, 시민은 공동체를 위해 삶을 설계한다. 이는 자본과 이해타산적 관계로 맺어진 오늘날의 기업주의적 도시와는 다른 것이다. 민회를 중심으로 한 지자체는 타 지역과 연대하여,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형성해 나간다. 민회는 전체 시민의 의사결정만 하는 기구가 아니다. 민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내재화하는 훈련과 교육을 받기도 한다. 북친에게 코뮌주의적 지자체는 정치적 이해집단의 상호배타적인 노동자가 아닌, 사회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민의 집단이다. 북친은 코뮌과 아나키즘의 차이를 몇번이고 강조한다. 다음은 그가 설명하는 코뮌주의의 요약이다.

“코뮌주의 이념은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또 아나키즘이 종종 드러내는 반이성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또한 코뮌주의는 볼셰비즘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적 권위주의의 부담도 지지 않는다. 코뮌주의는 공장에 초점을 두고 공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투쟁의 장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산업노동자계급을 중시하는 가운데 그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적 행위자라고 보지도 않는다. 코뮌주의는 공상적인 중세 마을에서 미래의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델을 찾는 식의 역행을 하지 않는다.”

“코뮌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통상적인 사전의 정의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사전은 코뮌주의를 사실상 자율적인 지역 공동체들이 느슨히 연결되어 이룬 연합으로서의 정부 체계 또는 그에 관한 이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머레이 북친 146-147)

그는 이렇게 아나키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는 민회를 중심으로한 지자체가 타 지역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하나의 연방을 형성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그에게 진정한 시민정치의 실현은 생태주의적 시민격의 부활이며, 자본이 파괴한 도시의 회복을 의미한다. (같은 책, 90)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근대가 잠식한 지역자치를 회복함으로써, 변덕스런 자본의 폭주를 견제하는 것이 ‘미세먼지 사회’에서 우리가 고민해볼 유의미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포스트포드주의는 규격화된 상품의 시장 포화로 인한 경제침체를 생산라인과 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조절이론은 제도의 구조적 조정을 통해 수요/공급, 잉여가치의 생성, 실현을 조절하며 거시경제적 순환을 지속화하려는 케인즈주의적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하비는 유연적 축적이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잉여가치 생성의 수단(노동강도와 일수 연장의 절대적 잉여가치와 기술혁신을 위한 상대적잉여가치)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 일시적 해결책이며 견고한 전환까지는 아니라 주장한다. (최병두 2007;, 데이비드 하비)

2)인간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으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연을 자신에게 유용한 물질적 형태로 변화시킨다. 마르크스는 실천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자연력을 이용하여 자연 속에 살아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 1991)

3)제임스 오코너는 자본 축적의 내적 모순뿐만 아니라, 외적모순에 의한 생태위기에 주목한다. 그는 자본의 축적 위기를 전통적인 1차 모순(생산력과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외적 모순(생산조건)인 2차 모순을 추가하여 정의한다. 여기서 생산조건은 인간의 재생산 조건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는 자연 원료, 그리고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를 의미한다. 그는 전통적인 자본의 과잉 축적이 만들어낸 내적 모순을 수요위기로 해 석한다면,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고갈되는 생산조건은 자본의 비용위기를 발생시켜 축적의 위기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4)물론 우리가 푸코를 따라가다 보면 대항 언어 자체를 폐기시켜버리는 자기 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의식의 각성을 위한 일종의 ‘혁명 훈련’으로 긍정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그것처럼, 에페스테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지식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반’은 일종의 ‘인간 되기’ 훈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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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베버(Max Weber). 2001. 몸제・마이어(Mommsen・Meyer) 편, 박성환 역. 「경제와 사회」,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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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Marx. K)・프리드리히 엥겔스(Engels. F)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1991. 최인호 외 역. 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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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황성원 역. 「자본의 17가지 모순」. 도서출판 동녘

롭 헹거벨트(Rob Hengeveld). 2013. 서종기 역. 「훼손된 세상」. 도서출판 생각과 사람들

머레이 북친(Murray Boochin). 2012. 서유석 역.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메이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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