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석_몇 번 쓰고 버려지는 새벽과 대충 쓰여지는 환청

이문석

여섯 해 동안 물류센터 상하차 알바, 일명 ‘까대기’를 하던 이종철씨는 자신의 경험을 그린 만화, 『까대기』를 출간한다. 이 중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이바다’는 작업을 하다가 목장갑이 더러워져 지점장에게 새것을 요청한다. 컴퓨터 사무업무에만 몰두하고 있는 지점장은 새 목장갑 대신 쓰다 남은 목장갑이 담긴 박스를 내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차피 몇 번 쓰고 버릴 텐데 대충 써.” 이 대사에는 딱히 욕설이나 짜증, 윽박지름이 없다. 다만 몇 번 쓰다 버릴 말투가 대충 던져질 뿐이다. 그럼에도 이종철 씨는 이 태도가 목장갑에서 사람으로 옮겨가지 않기를 바라며 전날 근무 중에 쓰러졌던 택배기사를 다음 컷에 등장시킨다.

《후진하는 새벽 Backward Dawn》오민수 개인전 2019.8.24.-9.21 / 기획 : 앤프랙티스 / 협력, 글 : 이문석 / 테크니션 : 김무환, 유병선 / 도움 : 김현진, 이양헌, 주현욱 / 포스터디자인 : 권영찬, 이건정 / 주최 : 앤프랙티스, 키핀 / 후원 : 충북문화재단

전시 《후진하는 새벽》은 이종철 씨처럼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작가 오민수의 개인전이다. 전시장 안에는 물류센터에서의 노동 경험이 육화된 사물들로 가득하다. 누구라도 작가가 물류센터에서 경험한 바를 듣는다면, 그것이 지난하기 짝이 없는 성질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을 거쳤음에도, 전시된 사물들은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비근한 면적과 소리를 드러내고, 별 볼 일 없는 반복을 수행하며, 구질구질한 광경을 만들어 내는 사물들은 어딘가 손상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차피 몇 번 쓰고 버려질’ 그리고 ‘대충’와 같은 감정들로 대우받는 사물들의 표정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상하차》시리즈 2. <파손>, 각관, 철판, 모터펌프, 높이180x가로40x폭40cm

물류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배치된 이 사물들의 표정을 하나씩 바라보자. <파손>과 <제자리구르기> 두 작업으로 구성된 《상하차》 시리즈는 로지스틱스 노동자들이 처한 위험의 징후를 현장에 있는 사물들의 손상과 오작동으로써 전달한다.<파손>의 형태는 매우 단순하다. 시중에서 유통되는 한 통의 섬유유연제를 사람 키만한 철제 막대의 꼭대기에 꽂아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시판되는 세제 한 통을 관통시킨 이 모습은 꽤 기이하다. 마치 참형을 받은 죄인의 머리를 매달아 두는 효수형(梟首刑)을 연상시킨다. 더군다나 플라스틱 용기가 관통당한 사이로 섬유유연제가 흘러나와 전시장은 특정 제품의 인공 향으로 낭자하게 된다. 전시장을 메우게 될 이 특정 브랜드의 향기는 작가의 근무장소를 가득 채웠던 바로 그 냄새이다. “로켓 배송”을 실현하고자 과열되어버린 유통망의 중심에서, 생활필수품들은 때로 상하차 과정 중 손상되곤 한다. 이때 섬유유연제가 터질 경우 물류센터는 목을 조르는 듯한 농도의 향기로 가득해진다. 이 무참한 향기는 상품이 손상되었다는 증거이며, 오민수는 이 증거를 전시장 안에 공유함으로서 물류센터 안에서 질식당한 듯한 그리고 손상된 듯한 사물의 표정을 제시한다.

《상하차》시리즈 1. <제자리 구르기>, 기어드모터, 콘베어롤러, 작업용사다리, 높이150x가로150x폭50cm

작업 <제자리 구르기> 앞으로 다가가면 작은 박스들이 파란색 컨베이어 롤러 위로 구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작업용 사다리 위에서 직류 모터로 작동되는 벨트는 배송 상자를 어디론가 옮겨야 하겠지만, 상자들은 제목처럼 제자리 구르기만 반복하고 있다. 당초 <제자리 구르기>에서 벨트 위를 구르는 사물은 종이 박스가 아니라 2L짜리 생수 6병들이 두 세트였다. 물류회사 자체 브랜드로 유통되는 깔끔한 진남색 비닐 커버의 6개들이 페트병 한 세트의 무게는 12킬로그램이다. 그러나 직류모터는 계획된 상품 더미를 감당하지 못했고, 작가는 벨트에 올릴 사물을 조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배송 상품 목록은 조정되지 않는다. 반드시 운송 인력은 정해진 상품을 정해진 장소로 가져가야 한다. 이 문장은 수행되어야만 하고, 만약 수정을 요한다면 그 대상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가 된다. 주어가 손목과 팔꿈치, 허리, 무릎 등의 신체 감각이 마비되거나 통증을 느끼거나 뻣뻣해지고 경련을 느끼는 근골격계 질환을 앓더라도 앞의 문장은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주어 교체가 빈번한 상하차 노동현장을 어떤 사물로 은유하는 것이 작가의 일 일 테고, 오민수는 이 은유를 작동의 반복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생수병들이 채 오르지 못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작은 상자들이 진전 없이 구르기를 반복하는 것은 물류 자본주의의작동이 아니다. 엄연히 여기서 반복의 작동은 오작동일 따름이다. 상품이 계획된 품목에 맞추어 배송되지도 못한 데다가 배송지로 향하지 않고 뱅뱅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 작동은 물류 순환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근골격계 질환을 겪을리 없는 직류 모터일지라도 어떻게든 배려하며 돌려야 했다. 대신 벨트 위의 사물을 수정시킴으로서 작동시킨다. 작가는 품목을 바꾸고 물류의 방향감을 상실시켜서라도 모터를 작동시키고 벨트를 움직이게 만든다. 우리는 오작동이 작동의 일종이라는 점을 이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강요받는 작동으로 인하여 기어이 기계도 오류고 상품도 오류인데, 마치 이제 곧 그걸 옮길 사람에게 오류가 생길 것을 점지하고 있는 듯한 작동인 것이다.

《사라진 박스》시리즈

《사라진 박스》는 이러한 오작동이 결국 사람에게 옮아서 담당자 결근 등의 사태로 이어지는 상황을 몇 가지 프레임 안에 보관하는 시리즈다. 그 프레임은 정육면체 아크릴 박스이거나, 55인치 TV 화면이거나, 17인치 모니터, 또는 A4 사이즈의 평면이다. 우선 프레임끼리 연동되어 있는 두 작업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폭파>와 <헬퍼>는 작가가 노동 현장에서 사용한 용어다. ‘폭파’는 “특정 권역의 배송기사가 부득이한 사유로 나오지 못했을 때, 다른 기사들이 해당 권역의 물품을 부담하는 분배 과정”을 말하고, ‘헬퍼’는 “물류회사 정규직원을 도와 상하차 업무와 권역별 상품 분배업무를 담당하는 하청 도급업체의 일용직 노동자”를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폭파>가 상황을, <헬퍼>가 그 상황에 맞닥뜨린 주체의 시선을 담아내지 않을까 예상해볼 수 있다.

《사라진 박스》시리즈 1. 〈폭파〉, 아이스박스, DC모터, CCTV, 아크릴, 높이200x가로100x폭100cm

작업 <폭파>는 정육면체 아크릴 박스 안에서 스티로폼 가루가 직류 모터에 의하여 환류 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것은 배송 권역 담당자가 갑자기 바뀌면서 운송라인이 꼬이고, 배송 상자들끼리 부딪쳐서 로스(loss) 상품을 만들어버리는 ‘폭파’ 현장의 모양새이다. 이때 배송 포장재 중 하나인 스티로폼 가루가 모터로 휘날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눈보라를 연상시킨다. 이 풍경은 키치한 부스러기들이 휘날리는 오배송 현장의 엄혹한 난장판 그 자체다. 그렇다면 <헬퍼>는 그 난장판을 받아든 노동자들의 시선일까?

《사라진 박스》시리즈 2. 〈헬퍼〉, 55‘티비, 17’모니터, 비디오 수신기, CCTV 실시간 재생,  높이60x가로140x폭90cm

<헬퍼>는 스티로폼 가루가 흩날리는 <폭파>의 현장을 송출시키는 55인치 TV의 프레임과 보색 대비의 문장을 내보내는 17인치 구형 모니터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쩐지 ‘스노글로브(snow globe)’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폭파> 현장은 아크릴 박스 안에 있는 CCTV를 통해 55인치 대형 TV로 전달된다. CCTV가 전송하는 이미지치고는 꽤 선명하고 커다랗다. 해상도가 조악하지도 않고 바둑판 프레임도 아니다. ‘폭파’되어 사방에 흩날리는 스티로폼 부스러기와 모터는 괜히 확대 송출되어서 아크릴 박스의 내부를 재난 상황 속의 거대한 기계장치처럼 보이게 만든다. 맞은편의 17인치 모니터는 실제 상하차 현장에서 쓰이는 구형 모니터 모델이다. 이 프레임은 뒤이어 얘기할 작품 <후진하는 새벽>의 멜로디 내용을 전하다가, 《상하차》시리즈가 말하는 손상되고 망가지는 상품들의 이야기를 얘기하다가, <폭파>의 상황을 밝히고 있다. 이 어수선한 연결은 보색 관계의 배경과 타이포로 전달된다. 프레임 안에서 작업 각각의 내용들이 서로 오가며 부여받은 사항만을 전달하고는 사라진다. 서로 등 돌리고 있는 두 가지 색의 화면만큼, <헬퍼>를 구성하는 두 화면은 서로 마주보고 있기만 할 뿐, 조금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사라진 박스》시리즈 3. 〈탐사〉, c-프린트

앞서 설명한 작업들은 흐르고, 회전하고, 날리는 등 현장의 오작동적인 풍경을 작동시키지만, 이 작동이 중단된 듯한 현장도 있다. 여섯 점의 A4 용지 사이즈 평면 작업, <탐사>는 국내의 한 로지스틱스 회사가 자체 브랜드, 이른바 PB(Private Brand)로 내건 명칭 ‘탐사(Tamsaa™)’에서 따왔다. “로켓 배송”을 강조하는 해당 물류회사가 ‘탐사’를 PB로 내세운 것은 아마 자사의 운송과정을 미지의 행성에 도달하여 벌이는 탐사작업에 빗대고자 하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 로지스틱스 운송의 범위와 물량은 우주산업 개발처럼 확장되고 있다. 이때 로지스틱스 산업을 팽창시키는 힘은 빅데이터와 같은 정보처리 프로세스의 발전만이 아니다. 빅데이터의 처리는 사람이 하고, 정확해진 물류량을 적재하는 것은 사람이 하며, 적재된 상품을 옮기는 것 역시 사람이 한다. 배송 차량터미널(Transfer Center)에서 새벽 배송을 하는 택배 기사 강형국씨는 한 언론사에 이 미시물류에 대한 짧은 넋두리를 건넨다. “어쨌든 다 사람이 하는 거예요. 아무리 자동화돼도 아직까지 배송은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PB로서의 ‘탐사’는 흥미로운 은유법을 통해 로지스틱스의 야망을 선명하게 홍보하며, 중간 단계의 노동 현장은 추상화시킨다. 그 현장은 요일을 가리지 않고, 휴일을 빼두지 않으며, 밤과 새벽에 잠들지 않지만,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탐사>는 단호하리만치 검은 바탕에 약간 희끄무레한 자국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는 이 2차원 평면의 검은 면적에서 추상화적인 면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야경 같은 면적은 운송 노동자들의 목장갑 무늬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당도한 추상화된 모습 안쪽에 새겨진 레이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늬는 여러 종류의 크기와 무게가 손바닥을 짓누르고 표면을 마찰시켜 누적된 때와 오물의 결이다. 그 평면은 노동환경의 레이어가 전달되는 두께이고, 검은 면적은 너무 오래 누적되어 추상화된 물류센터의 색상이다. 그래서 이 얇고 검은 C-프린트는 번아웃된 사람들의 표정처럼 보이고, 여섯 점의 작업은 문득 여섯 개의 온점으로 이루어진 말줄임표처럼 느껴진다.

〈후진하는 새벽〉, 후진 멜로디 스피커, 가변설치

하지만 이 시각적인 고요는 주기적으로 깨진다. 그것은 전시장 안쪽에 설치된 스피커가 내뱉는 멜로디 때문이다. 전시의 제목이자 전시를 구성하는 세 개의 시리즈 중 마지막 이름이며 한 작품의 제목인 <후진하는새벽>은 본 전시 전체의 상상력이 국내 물류센터 상하차 지점에 국한되지 않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주문(呪文)과도 같다. 앞서 <파손>이작업장을 잠식하는 후각적인 경험으로 전시장에 메웠다면, 이 작업은 멜로디 스피커를 빌려 경기도의 한 물류센터의 동인이 공간축을 가로지르고 시간축을 넘나들어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대한 물류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그려내는 단초로서의 멜로디는 한 굴지의 로지스틱스 회사에서 경험한 작가의 청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여러 축으로 팽창하는 상상력은 한 굴지의 로지스틱스 회사의 경험만으로도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 로지스틱스 택배 회사의 운송 차량은 후진할 때 특정 멜로디가 나온다. 오민수는 물류센터에서 배송 차량들이 배송지로 갈 상품들을 인계받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후진할 때 나오는 이 사운드에 주목한다. 몇 개의 레이어를 가진 파도가 밀려오듯 후진 경고음들이 겹치며 울리고 나면, 욕망하는 상자들은 전국 각지로 ‘보급’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보급이라고 말해볼 수 있는데, 애당초 로지스틱스라는 단어가 본래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병참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환기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군사 전략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 병참술로서의 로지스틱스는 유류 연료가 전장에 공급될 즈음 군사술의 중심을 꿰차게 되었고, 물류 자본주의 경영학의 중추를 이룬다. 그리고 이 흐름은 바로 이 멜로디에 응축되어 있다. 21세기 경기도의 물류센터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 사운드는 1978년 타이완 경제개발 시기 첸셴더(陳賢德)와 짱삐(張弼)가 작곡한 <난화초>라는 가요의 멜로디이며, 다시 이 가요의 가사는 1921년 군벌이 난립하던 대륙 중국 베이징에서 철학자 후스(胡适)가 쓴 시<희망(希望)>에서 따왔다. 경기도의 한 대규모 물류센터에서 매 새벽마다 들어볼 수 있는 택배 차량 후진음이 동아시아 물류벨트의 한 축을 담당하는 70년대 타이완을 잇고, 다시 21세기 로지스틱스의 원형을 이루는 군수공장들이 난립한 20년대 북중국을 잇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전시장의 정적은 병참술이 적용된 노동현장이 짓는 표정과 환청으로 깨진다.

난화초 악보

우리는 이 <후진하는 새벽>을 통해, 물류 자본주의가 짓는 표정의 엉뚱한 기원을 ‘탐사’할 기회를 얻는다. 관객들의 후각을 마비시키는 섬유유연제의 향기는 후진음을 타고 물류 자본주의의 궤적을 페로몬처럼 좇을 단서를 남긴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 오민수는 이 단서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후진 이후의 상상력을 조망하려는 동력을 일부러 상실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발견되는 것은 덧없고 우울한 반복이다. 전시 《후진하는 새벽》에서 작가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후진하여 어딘가로 향하는 택배차량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돌림노래였다. 그 돌림노래는 노동자의 귓가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아주 전진하지도 아주 후진하지도 않고 환청처럼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상상력에 있어서 어떤 길이가 확보되지 않고 단지 아주 좁은 반경만이 허락된 로지스틱스의 노동자들의 움직임 어느 한 귀퉁이가 전시장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물류 산업의 한 노동 현장에서 경험하고 목도한 신체의 반복된 움직임, 적재된 상품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 여러 대의 운송 차량이 후진할 때 앞 다투어 뿜어져 나오는 동일한 경고음, 배송할 때 감당해야 하는 쌀포대와 생수통의 무게의 시간이 잘게 부수어져 보관되어 있다. 보관된 경험을 작가는 스케치업으로 구현하고 3D프린터로 배치해본다. 그리고 이 구상들이 적절한 부품으로 이어지고, 결합되고 각자의 관절을 찾아간 뒤 작동하는 일련의 과정 동안 작가는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이 반복을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지 세 가지 시리즈로 구분하여 전시장 안에 설치해두었지만, 사실 거의 남남인 작업들에 가까워 보인다. 때로는 한 작업이 지시하는바가 어긋나게 겹쳐져 있다. 시리즈의 인과관계는 단일 서사를 이루지 않고, 에피소드화되어 있고 각 에피소드들은 때로 꼬여있다. 전시도 시리즈도작업도 어떤 하나의 단위라고 말하기 어려운 엇박의 길이를 가진다. 이 전시가 선보이는 짧은 길이의 말하기, 인과관계 상 그리고 이미지 상 연결고리가탈구된 프레임들 간의 바라보기, 어긋난 상태의 상호 지시가 난무하는 형태 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대적이다. 이제 유장한 서사란 시대극이 아닐 바에야 불가능하고, 각자 유사한 고통을 가지고 다른 형식으로 어긋나게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고작 허덕임에 가까운 에피소드가 되었다. 간헐적인 환청처럼 들려오는 ‘난화초’ 멜로디만이 사실 이 전시장의 이야기가 꽤 오랜 시간축을 가지고 또 꽤 넓은 공간축을 가지고 있는 내용임을 환청처럼 되뇌고 있다. 그것도 전진이 아니라 후진하며 말이다. 택배 현장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겠지만, 운송 차량 후진음인 난화초의 멜로디가 암시하듯 그 일사분란의 규모가 하도 크고 세밀한 탓에, 미시적인 구간들은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고 각 작품들이 말하는 에피소드의 길이도 숨이 턱 밑까지 올라간 노동자의 숨결마냥 짧다. 그래서 작업 각각의 주제는 위태롭고, 그 위태로운 주제들이 구성하는 전체 풍경도 위태롭다. 작업들은 거의 분열증적으로 허덕이며 오작동을 열심히 작동시키는 물류 자본주의의 에피소드들을 설명해내고 있다.

《후진하는 새벽》 2019.8.24.-9.21 전시전경

우리는 오민수의 작업들처럼 점점 더 에피소드화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미 그 에피소드들은 하나씩 오작동을 일으키다가 엔딩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8년도의 배송 트랜드는 새벽 배송이었고, 그해 예측된 2019년의 트랜드는 당일 배송이었다. 물류 자본주의의 배송 시간이 짧아지면서, 노동자들의 근무 순환 길이도 짧아지고, 목장갑의 교체 시점도 짧아지는 와중에 여러 종류의 컵라면과 고장 난 손전등을 놔둔 채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스물넷의 김용균 씨는 사망했다. 그이는 인간성의 지속 자체가 짧아진 자리에서 모든 안전 수칙을 준수했고 그래서 죽었다. 우리는 오민수의 세대가 마주하는 경세제민의 구조가 물류 자본주의임을 알 때, 그 앞에서 벌어지는 작동이 오작동임을, 그이의 작업 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몇 번 쓰고 버려지는 새벽에 대한 이야기이자, 대충 쓰여지는 환청에 대한 이야기이다.

* 본 게시물에 삽입된 《후진하는 새벽 Backward Dawn》 전시장 광경과 작품 사진은 정영돈 님이 촬영하셨습니다. 


참고 문헌

– 데보라 코웬, 권범철 옮김,『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폭력과 죽음의 삶』, 서울 : 갈무리, 2017

– 서보미, “새벽 배송도 사람이 하는 거예요”, 한겨레21,2019.01.04., (http://h21.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6428.html)

– 신연선, “만화가 이종철 “배송하는 게 무슨 만화가 되느냐?””,채널예스, 2019.06.05., (http://ch.yes24.com/Article/View/38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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